「TV에 너네 동네 나온다!」
한동안 연락 없던 어릴 적 친구에게 뜬금없이 카톡이 왔다. 갑자기 보내온 메시지치고는 뜬금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며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 의도가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혼 없는 짧은 답변으로 대화를 끝냈다.
이틀이 지난 점심시간. 왁자지껄하고 정신없는 순댓국집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그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받자마자 바로 끊었다. 촉이 왔다.
'얘 또 우리 집에 온다고 하는 거 아냐?’
하지만 나의 몇 주간 주말 스케줄은 꽉 차 있었다. 거절할 이유가 충분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그녀에게 톡이 왔다.
「나 목요일에 서울 올라가는데 너네 집에서 재워주면 안 돼?」
이럴 줄 알았다. 며칠 전 보내온 카톡은 이것을 위한 밑밥이었다. 근데 주말이 아니라 평일? 오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자고 가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단, 가족은 제외) 일단 누가 와서 잔다고 하면 나는 잠을 거의 못 잔다. 심지어 목요일은 평일인데, 금요일 컨디션이 엉망이 될 게 뻔했다. 요즘 계속 감기로 고생하면서 10시만 돼도 침대에 눕는데 누가 오는 건 정말 성가시다.
게다가 우리 집은 5평 원룸. 나야 침대에서 자서 상관없지만 바닥에 똑바로 누우면 가구에 발이 닿는다. 옆으로 웅크려 새우잠을 자야 하고 침대에 있던 내가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하면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을 밟을세라 조심히 피해서 가야 한다. 게다가 마흔 넘어서 좁아터진 원룸에 사는 꼴을 보여주기 싫기도 하다.
지난여름, 그 친구가 우리 집에 왔었다. 매년 한 번씩 우리 집에 오겠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거절했었다. 하지만 그땐 거절할 핑계도 없었고 언젠가 한 번은 해야 하는 숙제 같아 결국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녀는 주사가 있다. 나는 술을 커피처럼 즐기면서 이야기하며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그녀는 ‘안 취할 거면 술을 왜 마시냐?’는 생각이다. 근데 그것도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 선에서 취해야지... 간만에 만남에 술 한잔하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동네 시끄럽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집에 들어오는 복도에서도 조용히 하라는데도 일부러 더 소리를 지르는 통에 난 단단히 화가 났었고, 다시는 집에 들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그땐 여름이었다. 대충 가벼운 덮을 것이면 됐지만 지금은 겨울 아닌가?
「근데 우리 집에 이불 없는데?」
「ㅎㅎㅎㅎㅎㅎㅎ」
그 말에 그녀는 웃기만 했다. 그것 가지고는 씨알도 안 먹혔다. 늦은 시간대라 차편이 매진이라서 부탁한다고 한다. 나는 여러 터미널 방면으로 집에 내려가는 버스 편을 알아봐 주었다.
「10시 반 차도 있네」
「근데 11시는 넘어야 해」
「무슨 일인데 11시가 넘어야 해?」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 잠깐 마음이 약해졌다.
영화 시사회가 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 무대인사를 꼭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무대인사는 보통 영화 시작 전에 할 텐데 영화 뒤에 조금 못 보더라도 조금 일찍 나가서 터미널에 가면 될 것 아닌가? 심지어 초등학생 애 엄마가 왜 그렇게 집에 안 가려고 난리인가. 이리저리 알아봐도 11시 이후 내려가는 차가 없어 보이긴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집 주소를 알려줬다. 그리고 나서도 내가 다른 차편을 계속 알아봐 주자 친구는 그냥 다른 집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니야, 그냥 우리 집에 와.'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읽씹을 했다.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그 시사회가 그날 갑자기 일정이 뚝 떨어진 것도 아닌데 지난번 우리 집에 와봤으니 ‘늦게 끝나면 얘네 집에 가서 자면 되겠구나’ 미리 계획해 놓고, 갑자기 부탁하긴 그러니 며칠 전에 별 상관없는 카톡 한번 보내놓고 이렇게 얘기한다는 것이! 나는 재워달라면 재워주는 사람인가?
내가 이 일 한 번으로 이렇게 화난 것이 아니다. 알고 지내는 동안 그녀는 무례한 부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왔다. 물론 이 친구의 성향은 외향적인 E고, 나는 내향적인 I. 그녀에게는 친구끼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도 나에게는 무례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한번은 고향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밤 10시도 넘은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술 먹고 있는데 나오라고 계속 물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정말 나가기 싫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택시를 타고 술집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가냐고 엄마에게 욕도 한 바가지 먹었다. 도착해 보니 당혹스러운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친구 옆엔 중학교 졸업 이후론 본 적 없었던 동창이 있었고, 앞자리엔 합석했다는 웬 남자 둘이 앉아있었다. 친구는 만취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장소를 옮겨 한 잔 더 하자며 붙잡았지만 마다하고 택시를 타고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가는 길에도 울고불고... 하. 떠올리기도 싫다.
내가 사촌 언니와 함께 살고 있을 때도 대뜸 늦은 밤에 전화를 걸어 우리 집에서 재워달라고 했던 것도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나는 난처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곤 했었다.
어느 땐 뜬금없이 술을 마시다가 연락해서 자기 선배가 술집을 열었는데 메뉴판 좀 만들어 주면 안 되냐는 것이다.
“오빠가 술 거하게 쏜대~”
나는 이런 종류 부탁을 정말 정말 싫어한다. 디자이너라고 해서 그냥 뚝딱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 그 일은 거절하면서 어찌어찌 마무리되었다.
몇 시간이 지나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톡이 왔다.
「나 다른 친구네 집으로 가기로 했어.」
구구절절 여러 개의 메시지가 이어져 왔다.
「응 미안해. 평일은 좀 그래서... 시사회 재밌게 봐」
하룻밤 재워줄 수도 있는 거 너무 예민하게 군 것 아니냐고? 거절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나지만, 이제는 싫은 것은 억지로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부탁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정말 가까운 친구와 가족뿐이다. 이유는 필요 없다. 싫으면 싫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