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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Dec 03. 2023

그녀가 사라졌다.

10월이 끝나가던 어느 날, 왠지 정리가 안되는 머리, 그새 희끗희끗 올라온 뿌리. 미용실 갈 때가 되었다. 나의 헤어스타일은 숏컷이다. 7년 전 잘랐다. 그 후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 같아서 지금까지 유지하게 되었다. 나의 앞머리는 유독 잘 자라서 금세 눈을 가린다. 뒤통수가 납작해서 조금만 자라도 볼륨이 푹 주저앉는다. 전에는 흰머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 주로 있었는데 요즘은 정수리도 그렇고 옆머리에도 성성하다. 그래서 커트는 20여 일에 한 번, 염색은 40~45일 주기로 한다. 그래서 미용실을 자주 간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갈 수밖에 없다. 


내가 머리를 맡기는 헤어 디자이너는 인기가 많기 때문에 적어도 2주 전에는 예약을 해야 내가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받을 수가 있다. 예약을 하려고 예약 페이지에 들어갔다. 디자이너를 지정하고 날짜를 정하려고 하니 11월에 예약할 수 있는 날짜가 하루도 없었다. 당황했다. 내가 너무 늦장을 부렸나? 그사이 더 인기가 많아져 버렸나 보다. 12월을 미리 예약 할까? 근데 그때까지 한 달을 버텼다간 나는 그 지저분한 머리를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미용실에 문의했다. 내 담당 헤어 디자이너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 달간 쉬게 되었다는 것이다.




12월이 되기 전에 그래도 한번은 미용실에 가긴 해야 할 텐데 또 어디를 검색하고 찾아야 할지 앞이 막막하다. 지금 다니는 곳도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고 간신히 정착한 곳이기 때문이다. 한 달간 부재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나는 왠지 모를 미련 때문에 매일 예약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그러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디자이너 목록에서 아예 그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설마 그만둔 건가? 나처럼 사람들이 문의를 많이 해서 한 달만 목록에서 숨겨놓은 거겠지? 그래. 그럴 거야’

나는 미용실에 그녀가 그만둔 것인지 문의 글을 남기지 못했다. 진짜로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까봐...


가장 최근의 리뷰 글에 그녀가 달았던 답글들을 보았다. 평소 같으면 '관리 잘하시다가 다음에 뵐게요.'라는 말로 마무리를 했었는데 아니었다. '관리 잘하세요.'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렇다. 다음을 기약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럼에도 그녀의 퇴사를 믿고 싶지 않았다. 11월 내내 시간만 나면 예약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지만, 그때마다 여지없이 그녀는 없었다. 대신 새로운 헤어 디자이너가 충원되어 있었다. 혹시나 다른 지점으로 옮겼나 싶어 그 미용실의 다른 지점을 모두 검색해 디자이너 목록을 살펴보았다.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5년간 매달 만나던 그녀였다. 보통 키에 호리호리한 그녀는 밝고 쾌활하며 내가 했던 이야기도 기억을 잘하고 야무진 사람이었다. 친구도 한 달에 한 번 만나면 자주 만나는 것인데, 나는 그녀를 매달 한 번 꼭 만났다. 내 흰머리가 점점 늘어가는 모습을 봤고, 이제는 흰머리가 너무 늘어 컬러 염색으로는 덮이지 않자, 특히 많은 곳에만 새치염색으로 해주던 센스, 회사에 대한 푸념과 어이없는 일들 모두 그녀가 알고 있고 기억해 주던 그녀다. 


내가 비록 숏컷이지만 여름에는 조금 더 짧게 다듬는다는 것, 겨울엔 조금 더 길게 유지한다는 것을 안다. 염색도 내가 자연 갈색보다는 조금 붉은 기 있는 컬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몇 마디 말에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깔끔하게 알아서 해주던 그녀였다. 그래서 나는 3년 전에 그 동네에서 먼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도 굳이 그 미용실에 가기 위해서 매달 그곳으로 향했다. 퇴근하자마자 온 내가 배고플까 봐 다른 사람들은 하나씩 주는 과자도 항상 두 개씩 챙겨주었다. 한 번도 기분 상하는 응대를 한 적도 없고, 항상 친구와 수다 떨러 가는 마음으로 가던 곳. 회사와 집을 오가기만 하는 재미없는 일상에서 유일하게 힐링하는 곳이었는데 말이다. 서운함이 몰려왔다.


그 미용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디자이너인 데다가 몇 년씩 다닌 고정고객 또한 많은 그녀가 갑자기 떠났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직을 했나, 아니면 자기 매장을 시작하려고 나갔나, 그녀가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으니 갑자기 아기가 생겼나 혼자 이런저런 짐작을 해보았다. 부디 좋은 일이길 바란다.




결국 나는 그녀의 퇴사를 인정하며 집 근처 미용실로 향했다. 5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맡겼다. 처음 보는 디자이너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원하는 스타일을 설명하고 염색 컬러도 설명했다. 능숙하고 편안한 사람이었지만 왠지 그녀의 야무진 손길과 까르르 웃던 발랄함이 더욱 그리워졌다. 이 글을 쓰면서도 혹시 그녀가 다시 미용실에 복귀하지 않았을까 검색을 해본다. 역시나 그녀는 없다. 내가 글쓰기가 취미라고 했으니 이 글을 우연히 읽고 알아봐 줬으면 하는 소심한 기대도 한다. 언젠가 어디선가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좋겠다. 그럼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게 인사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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