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벤트 내리는 거요, 연결 배너가 여기저기 많이 있는데 배너도 같이 내려야 하지 않아요?”
현업이 웹사이트에 게재되어 있는 이벤트를 내려달라고 요청해왔다. 그 이벤트로 연결되는 배너들이 사이트 여기저기 많이 깔려있는 상황이었다. 현업은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이벤트 페이지만 내려달라고 요청한 것이 뻔했다.
“현업은 이벤트 페이지 내려달라는 얘기밖에 안 했어요”
“아니 그럼, 배너 누르면 존재하지 않는 페이지라고 나오는데 그걸 그냥 놔둬요?”
“우리는 시키는 일만 하면 돼요. 시키는 일만.”
복장이 터진다. 우리는 뇌가 없나? 생각이라는 것이 없나? 팀장이라는 사람 입에서 저딴 소리가 나오다니... 사이트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현업보다 운영팀인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잘못된 요청이 오면 제대로 된 방향으로 안내해 주는 것도 우리 팀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고? 마인드가 후지다 못해 멍청한 소리였다. 나는 이럴 때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후지게 느껴질 때, 나도 같이 멍청이가 될 것만 같다.
"저는 어디서 그렇게 일 안 해봤어서요!"
그래, 나는 그렇게 일 안 해봤다.
지금까지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때가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가장 바쁘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애착을 가지고 일했던 그때.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이다.
나는 웹 에이전시의 과중한 업무, 박봉과 야근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있었고, 저축은 할 수 있을 정도의 급여와 보장된 워라벨에 목말라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고 눈을 떴는데 ‘아… 이제 도저히 못 가겠다.’라는 생각에 천장을 보고 한참을 누워있었다. 퇴사 의사를 밝히고 한 달을 꾸역꾸역 다닌 후, 진짜 퇴사했다. 그리고 3개월 정도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구직 사이트에서 어느 공고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 대기업 계약직 디자이너. 공고에 기재되어 있던 연봉은 내가 기존에, 에이전시에서 받던 연봉보다 천만원이나 많았다. (아마 기존에 워낙 박봉이었기에 더 차이가 났을 것이다)
서류심사에 순조롭게 통과하고 면접을 보러갔다. 면접관은 5명, 면접을 보러온 사람은 나포함 7~8명으로 기억한다. 모두 동시에 들어가서 다 같이 면접을 봤다. 면접을 보면서 합격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앞두고 있는 사업 진행 방향이 내가 이전에 경험했던 프로젝트들과 겹쳐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예상대로 합격했고 출근하게 되었다. 아직도 처음 출근했던 날, 아침 풍경이 생생하다. 커다란 사무실에 사무용 책상과 파티션. 족히 7~80명은 넘어 보였다. 사무실 가운데에 위치한 파티션의 제일 끝, 복도 옆자리로 안내받았다. 아침부터 난리라도 난 듯 긴박해 보였다. 한 분이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로 뭔가를 하고 있었고, 네 명이 그분 뒤에 서서 뭐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갑자기 발생한 긴급 공지를 게시하느라 그랬던 것이었다. 우리나라 손에 꼽히는 금융사에 웹을 담당하는 팀에 디자이너 4명, 퍼블리셔 1명이 다였다. 전사에 홈페이지 관련한 일은 모두 우리 손을 거쳐야 했다.
대기업 계약직. 그 회사의 구성원이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한 애매한 그 어디 중간쯤. 전세 계약처럼 2년 동안 나는 이곳에서 일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소속감을 가질 수 있지만, 과중한 책임에선 벗어나는 자리. 어디 다니냐고 하면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간판. 그리고 여러 복지혜택.
정직원들처럼 승진을 위해서 인사 평가 기간에 술자리를 만들며 아부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내가 이곳에 있을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좋았다. 나는 2년 정도 한 곳에서 일하면 질리는데 퇴사하겠다는 말을 꺼내는 번거로운 절차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단순한 생각도 있었다. 정부에서는 계약직들의 고용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2년 이상 근무한 직원에 대해서는 정직원으로 고용하도록 했지만, 어찌 된 노릇인지 그 때문에 오히려 기업들은 2년만 고용하고 계약을 종료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 되어 버렸다.
에이전시에서 디자인을 할 땐 디자인만 집중하면 되었다. 업체와 조율하거나 기획서는 기획자가, 퍼블리싱은 퍼블리셔가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이트 관리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해야만 했다. 컨펌, 수정, 게재, 확인의 전과정을...
업무시스템에 등록된 업무가 각자에게 배정된다. 현업이 등록한 기획서를 보고 가이드에 맞지 않는 문구나 이미지 요청, 작업 기한 등을 직접 조율한다. 그 후, 디자인 - 컨펌 요청 - 수정 - 콘텐츠 관리시스템에 디자인을 등록하고 내용은 직접 퍼블리싱 - 테스트 화면에서 다시 확인 - 실환경에 게재 - 링크 등 화면 검수 - 다시 확인 요청 - 현업 확인이 끝나서 오케이가 되면 그렇게 한 건이 끝나는 것이다.
그런 작업 건들이 하루에 적어도 5개에서 많게는 10건. 배너, 이메일, 이벤트, 혹은 신규 페이지까지 다양했다. 우리는 각자가 PM이나 마찬가지였다. 기획-디자인-퍼블리싱-검수까지 멀티플레이어로 일했다. 이벤트 당첨자 목록을 시스템에 등록하는 것, 우편실에 가서 부서 우편물을 가져오는 것까지도 나의 업무영역이었다.
'나는 디자이너일까? 포토샵 하는 회사원일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일을 전반적으로 조율하고 진행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일이 훤히 내 손바닥 안에 있으니 바쁘긴 해도 스트레스는 덜 받았다.
일은 항상 넘쳐났다. 출근과 동시에 물건이 쏟아져나오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아있는 것처럼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이 흘러갔다. 어떤 날은 화장실 갈 틈도 없었다. 매일 녹초가 되어 퇴근했다. 퇴근할 땐 정말 얼굴이 허옇다 못해 초록빛이 돌았다. 다행히 야근은 거의 없었다. 매일 단거리 달리기를 전력 질주하는 기분이었다. 그날의 일은 그날 거의 끝났기 때문에 에이전시에서 구축 프로젝트를 할 때처럼 집에서도 일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정신적인 퇴근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구직사이트에 기재되어 있던 연봉 이외의 수당이나 보너스 같은 것들도 있어서 돈도 금방 모을 수가 있었다. 보너스라는 것을 살면서 처음 받아봤다. 하긴 이전에 에이전시에서는 그 적은 연봉에 퇴직금이 포함되어 있어 13분의 1로 월급을 받았으니 말 다 했다.
금융권 운영이다 보니 오타, 링크 오류, 이미지 엑박 같은 것이 났다가는 난리가 났다. 다음날 부장 방으로 줄줄이 끌려들어가 쌍욕을 듣는다. 치명적인 사고가 났다가는 뉴스에까지 나니 말이다. 일을 할 때마다 항상 신경이 곤두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핫팬츠에 조리를 신고 가도 상관없던 자유분방한 에이전시에 다니다가 온 나에게 이곳은 보수의 끝판왕이었다. 청바지와 운동화는 안 된다. 세미 정장에 구두.(그래도 봄, 가을에 피복비가 나왔다)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드라마 '미생'에 마부장도 혀를 찰 정도로 극악무도한 부장 탓에 부서에선 3년 동안 아무도 휴가를 간 사람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부장은 집엘 가기 싫어했다. 그 때문에 부서원들은 부장이 퇴근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부장은 거의 매일 11시에 퇴근했다) 게다가 주말에도 출근해서 부서원들은 주말에도 출근하곤 했다.
다행히 나는 계약직. 그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선택적 이방인. 정직원들처럼 눈치 보며 퇴근도 못 하고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었고, 주말에 출근하지도 않았다. (물론 갑자기 주말에 회사에 오라고 전화 온 적은 있다)
한번은 어떤 분이 3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여행을 위해 휴가를 내려고 말했다가 부장에게 헤드록을 당하는 것도 봤다.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오십을 바라보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분을 말이다.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일 텐데. 회식은 어떤가? 2차에 노래방으로 다 몰고 가서 남자, 여자 섞어 앉으라더니 옆에 앉은 늙다리 차장과 러브샷을 하라고 강요하고... 지금이었으면 기사에 날 이야기가 차고 넘쳤다.
현업들은 밥을 잘 사줬다. 아무리 가까이 지내는 현업들이라도 달갑지는 않았다. 점심이 유일한 휴식 시간인데 점심에도 일을 하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곧 부탁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잘 부탁한다는 뜻이지만 어떨 때는 ‘나는 그냥 하던 일 하던 대로 하면 되는데 뭘 새삼스럽게 밥을 사주나. 그리고 밥 사주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중에 양아치 같은 사람도 꼭 있다. 업무 시스템을 통하지 않고 개인적인 일을 메신저로 은근슬쩍 부탁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일이 힘들면 사람이라도 안 힘들어야 하는데 다들 매일 예민하게 일을 하다 보니 작은 일에도 서로 얼굴을 붉혔다. 의미가 담기지 않은 말에도 오해를 해서 사무실 분위기는 자주 냉동실처럼 얼어붙었다. 조용한 사무실에 두 명의 키보드 타자 소리가 격해지고 있다면 아마 그 둘은 아까 서운했던 누군가를 욕하고 있을 것이 확실하다. 그 와중에 업무는 여전히 돌고 돌고 돌아갔다.
글로 담을 수 없는 부조리함들과 산전수전공중전의 시간이 흘러가고 계약기간이 끝났다. 이제 회사 운영 방침이 바뀌어 웹 에이전시와 계약해 운영팀이 들어왔다. 우리 5명이 하던 일을 하기 위해 20명이 들어왔다. 열심히 짓던 농사를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긴 것처럼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3달 정도 번아웃에 빠졌다. 첫 달은 계속 누워만 있었던 것 같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팠고, 자도 자도 잠이 왔다. 매일 살얼음판을 걷듯 온갖 촉각을 곤두세워 일하다가 내려놓으니 다시 평온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간 애착을 가졌던 일이었기에 나는 한동안 불필요한 책임감에 시달렸다. 매일 실 환경 반영 시간이 되면 홈페이지에 들어가 제대로 반영이 되었는지 살펴보고 오류를 발견하면 이걸 알려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혼자 방에서 발을 동동 구르곤 했다.
그곳에서 일했던 경험은 나에게 큰 자양분이 되었다. 내 일에 책임감과 애정을 가지고 일했던 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날마다 달렸던 기억. 모든 과정을 주도하며 일했던 시간이 힘들었지만 보람됐다. 에이전시에서 구축 디자인을 할 땐 매일 두려웠는데, 이 일은 두렵지 않았다. 이 바닥 '짬밥'이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대기업 계약직은 아니지만 금융권 사이트를 운영하는 디자이너로서 이 길을 쭉 걸어오게 된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일해온 나에게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