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는 컨펌 났는데, 여기 폰트에 포인트로 쓰인 컬러값이 사용하던 것 맞는지 확인 좀 해 달라는데요?”
상세 페이지 내용 중 강조 문구에 포인트 컬러를 사용했는데, 폰트가 얇아서 조금 밝아 보였기에 현업 쪽에서 확인해 달라는 것 같았다. 소스를 확인해 보니 일관적으로 쓰고 있는 컬러값이 맞았고 그 사실을 이야기 해줬지만, 팀장과 퍼블리셔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마주한 상황은 아주 가관이었다. 팀장은 그 페이지를 캡처 받아 스포이드 툴로 컬러값을 찍어보고 있었고, 퍼블리셔는 "나는 하던 대로 했다, 내 책임이 아니다"만 연신 주장하고 있었다. 캡처 받은 이미지는 서체 끝이 뭉개져 있으니 제대로 된 컬러값이 나올 리 없었다. 여기저기 찍을 때마다 값이 다른 게 당연했다. 퍼블리셔는 본인은 원래 되어 있던 대로만 했다 하면서 다른 페이지까지 뒤져 본인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가 운영하는 사이트에 포인트 컬러가 몇 개 되지 않는다. 사용하던 컬러값이 ‘맞다’고 하면 끝날 일이었다. 얼마나 코미디 같은 순간인가. ‘당신네가 잘못했다’고 탓하는 메일 내용이 전혀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확인 요청을 한 것뿐이었다. 그 메일 한 줄 때문에 사무실은 비상 상황이었다.
“컬러는 면적에 따라서 달라 보일 수 있는 거라 저 폰트가 얇아서 밝아 보여서 물어본 것 같아요. 그냥 맞다고 하면 끝날 거 같은데요?”
좁고 조용한 사무실에 디자이너인 내 이야기는 공허한 메아리로 고스란히 무시당했고, 팀장과 퍼블리셔는 그 메일에 답문도 보내지 않은 채 오후 내내 그 일로 화면을 확인하며 끙끙대고 있었다. 장장 4시간이 넘게.
퇴근할 때까지 도돌이표만 반복하는 두 사람을 보며 사무실을 나서는데 땅이 꺼질듯한 한숨이 나왔다. 밤고구마 다섯 개쯤 물 없이 먹으면 이런 느낌일까? 답답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데.... 아무것도 아닌 일로 왜...... 도대체 왜...
어느 날은 현업이 보내온 기획서에 다소 헷갈리는 부분이 있어 내가 이해한 방향이 맞는지 확인을 해달라고 팀장에게 부탁했다. 오로지 팀장을 통해서만 현업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장은 현업이 보내온 PPT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런 거 아닐까? 저런 거 아닐까?" 추리만 이어가더니 끝까지 물어봐 주지 않고 확신 없는 결론을 내렸다. 한술 더 떠 차장이 한마디 보탰다.
“그거 물어보면 현업이 기분 나빠 하지 않을까요?”
사무실에서 매주 벌어지는 일이다.
헛다리를 짚어 작업을 하면 다시 작업을 해야 하니 업무 방향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시작하자는 것인데 그게 왜 기분이 나쁜 거지? 그 현업이 진상도 아니고 갑질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기분이 나쁘다는 것인지. 따지는 것도 아니고 확인차 물어보는 게 왜? 도대체 왜??
이전 회사에서 현업과 직접 소통하면서 1:1로 업무 진행을 해봤기 때문에 그것이 별것 아닌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오히려 현업이 말한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뻔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기도 하다. 트집을 잡는 것도 아니고 애매한 부분을 확인해달라는 것인데 도대체 왜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우리는 전문가로 일을 하러 들어온 사람들이지 그들의 머슴도 나이고, 죄를 짓고 벌을 받으러 온 사람들도 아니다.
아, 사람들은 다들 자신을 기준으로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는가! 저 사람들은 매사에 상대방이 그렇게 물으면 기분이 나쁘거나, 따질 때 그런 식으로 물어보는 척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시안을 디자인하고 현업이 가이드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모르기에 수정해달라고 할 것 같은 부분이 있었다. ‘이러이러한 의도와 가이드 때문에 이렇게 디자인했다’라고 설명을 작성해 함께 전달했는데 팀장은 그 설명은 싹 삭제해 버리고 이미지만 현업에 보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현업은 그 부분의 수정을 요청해 왔다.
“팀장님, 이거 가이드 때문에 이렇게 디자인 한건데... 설명도 같이 보내주시지 그러셨어요.”
“우리가 따지고 들며 싸울 필요는 없어”
응???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오로지 시안만 생각하고 현업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을 붙인 것뿐인데 그게 왜 따진다는 것인가? 가이드를 봐도 내가 몇십번은 더 봤는데.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가이드라는 것이 왜 있는 건데...
사실 애초에 현업이 준 기획서는 카피 문구 규칙, 배너 글자 수, 콘텐츠 구성 등 가이드를 벗어난 내용이었다. 기획자인 팀장에게 기획서를 가이드에 맞춰서 줄 것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기획서마저도 엉터리라서 가이드를 뒤지고 뒤지면서 끼워맞춰 디자인하느라 내가 얼마나 죽을 똥을 쌌는데! 따진다면 내가 현업이랑 팀장에 따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디자인 설명을 붙인 것이 따지고 드는 것이라니... 현업이 죽으라면 죽을 건가? 본인이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다 받아주는 요청에 디자이너가 왜 피해를 받아야 하는가.
가이드는 무시하고 현업의 수정요청을 그대로 적용하라고 했다. 결국 나는 현업이 요청한 내용의 시안 하나와 가이드를 적용한 시안을 추가로 제작해서 넘겨주었지만, 현업은 본인 요청을 적용한 시안을 채택했다. UX 팀에 마지막에 검수받을 텐데 분명 가이드를 벗어났다고 수정하라고 할 것이 10,000% 뻔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틀린 작업을 해야 하는 나는 내내 부글부글 끌어올라 얼굴은 달아오르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UX 팀에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버젓이 가이드에 나와 있는 것도 지키지 않은 이상한 디자이너로 생각할 것 아닌가!!!
예상대로 UX 팀에서는 PPT에 수정 내용과 기분 나쁜 코멘트까지 덧붙여 메일을 보내왔다.
‘작업자가 가이드 숙지가 안 된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작업하셨던 디자이너분께 물어봐서 작업 진행해 주세요.’
지난번에 작업했던 디자이너? 아이고... 그거 다 내가 한 거 다 이놈아!!! 속이 터진다 터져... 나는 제대로 한 시안을 보냈지만, 팀장도, 현업도 무시해 버렸다고!!!
그리하여 나는 가이드도 숙지 안 된 기본도 안된 디자이너가 되어버렸다. 이 억울함을 누가 풀어줄 수 있단 말인가. 현업과 기획자와 UX 팀 사이에서 새우등이 터지고 있는 나를 누가 구제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어디선가 우연히 봤던 ‘퇴사하고 싶은 순간들’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후지게 느껴질 때'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런 순간이 너무나도 많다. 저러면서 나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받아 갈 것 아닌가! 이 바닥에서 저렇게 경력 쌓으며 벌어먹고 살아왔다는 것 아닌가. 억울하다 억울해...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운이 좋게 일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해 왔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