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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Jun 07. 2022

호주에서 영어 이름 없이 한국 이름으로만 살면,

한국을 떠나 외국 땅에 살면서 힘든 일 중 하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누군가에게 내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선 이름 석자가 아니었더라도 '이 과장, 박 과장', '이 선생, 박 선생', 혹은 '아무개의 엄마'라고 불릴 텐데, 외국에선 이름을 알려주는 것과 이름을 기억하는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제일 처음 하는 말은 내 이름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 후 대화의 시작은, "I'm XX, What's your name?" 이 된다.


이럴 때 내 한국 이름을 단번에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발음을 암만 천천히 해도 스펠링 좀 알려달라고 했고, 스펠링을 알려줘도 내 이름과는 다른 이름을 말하기가 일쑤였다. 특히 내 이름에 들어가는 'Eun'을 발음하기 힘들어했다. 아무리 '은'이라고 알려줘도 '윤'이라고 했다. 북한의 '김정은'까지 들먹여가며 'Kim Jung Eun'  할 때 '은'이라고 설명을 해 줘도 따라 하기 힘들어했다. 영어 이름은 없냐고 불만스럽게 물어오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한국 이름을 그대로 쓰지 않고 영어 이름을 쓰는구나 싶었다.


첨엔 나도 다들 그러길래 생각 없이 영어 이름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영어 이름으로 누군가가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 불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정체성이 흔들렸다. 뭔가 슬펐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닌데, 왜 난 내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지 뭔가 억울했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내 이름까지 바꾸는 것이 과연 타인을 위한 배려인지, 나에 대한 무례함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난 더 이상 내 영어 이름을 쓰지 않기로 했다. 원래 법적 이름은 한국 이름 그대로 변한 적도 없고, 만든 영어 이름이야 내가 안 쓰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다시 내 한국 이름을 알려줬다. 그리고 이미 내 영어 이름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그 영어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한국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고 알려주었다.


이렇게 한국 이름을 사용하고 나서 명확히 달라진 게 있다면 '인간관계'이다. 정말 나에게 관심이 있고, 애정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내 이름을 익혔고, 나를 만날 때 서투르더라도 내 이름을 불러줬다. 하지만 나에게 관심이나 애정 따윈 없는, 스쳐가는 얄팍한 관계만 유지하게 되는 사람은 내 이름이 너무 어렵다며 제대로 불러주지도 않았고 기억도 당연히 못했다.


한 호주인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니 이름까지 바꿀 필요는 없어. 너의 진짜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로 한 건 정말 잘한 일이야. 널 사랑하는 사람만 니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거야."


그 친구 말이 맞았다. 인간관계는 그렇게 추려졌다.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과 불러주지 않는 사람으로 말이다.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사람과는 더 깊은 인간관계를 이어나가기가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인간 관계도 정리되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다는 것이 이렇게나 중요한 일인지 외국에 살면서 배우게 되었다.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리지 못하고 '아무개의 엄마' 혹은 '아무개의 딸' 혹은 이름이 아닌 호칭으로만 불리게 된 수많은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와 아줌마, 아가씨와 청년, 학생들이 아직 많다. 누가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우리는 의미 있는 누군가가 될 수 있다.


내 이름을 익히기 위해 꼬이는 발음으로도 열심히 노력해 준 고마운 친구들이 있어 난 의미 있는 누군가가 되었다.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나의 가족들,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 고맙다.


감히 부를 수 없는 이름이란 없다. 신들도 다 이름이 있고, 하느님도 이름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겐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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