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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May 20. 2022

호주-마트보다 철물점이 더 큰 나라

<어쩌면 인류의 불행은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하던 시간이 ‘효용’이란 이름으로 대체된 순간부터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이 댓글로 달아주신 말이다. 정말 뼛속까지 공감 가는 말이었다. 내가 '월든'을 성경 다음으로 좋아하는 이유도,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된 이유도, 내가 친환경적인 사람이 된 이유도 다 효용을 대체한 불행이 내 삶을 덮는 게 싫어서였으니까 말이다.


이런 면에서 호주는 그래도 나의 인생 철학과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호주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돈이 아니라 몸을 써야 하는 나라이다. 몸을 쓰는, 노동을 하는 것의 가치를 인식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사무직 종사자보다 힘쓰는 사람의 수입이 훨씬 높다. 배관공, 전기기술자, 건축하는 사람들 수입이 더 높다. 그래서 호주에서 잘 살려면 힘쓰는 법을 알아야 한다. 몸을 움직이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한다.


호주는 마트보다 철물점이 더 큰 나라이다.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신기하다. '버닝스(Bunnings)'로 불리는 이곳 철물점은 코스트코 정도의 큰 사이즈이다. 주말이면 그 철물점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다들 자기 집에 일어난 잡다구리 한 고장들을 손수 해결하기 때문이다. 마트는 5시에 문을 닫을지언정 이 철물점은 9시까지 영업을 한다. 사람을 쓰지 않고, 자신의 노동으로 일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세면대 배수관을 청소해 보겠다며 배수관을 분해하다 배수관이 부서졌다. 노후한 배수관이 문제였다. 배관공을 부르면 작은 트랩 하나 교체하는데 20만 원이다. 그래서 나는 버닝스로 달려갔다. 배수관 교체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는데 총 40불(35000원) 정도가 들었다. 교체는 물론 남편이 했다. 인건비가 비싸다 보니 배관공은 웬만해서는 부르지 않는다.


호주에선 조립된 가구를 팔지 않는다. 늘 조립은 가구를 산 주인의 몫이다. 물론 사람을 불러서 조립을 시킬 수 있지만 어마어마한 인건비 때문에 가구값보다 조립 비용이 더 많이 나올 때가 허다해 다들 스스로 조립을 한다. 돈이 많으나 적으나 이런 일은 스스로 해결하는 편이다.


가드닝도 직접 해야 하고, 급식도 없으니 도시락도 스스로 싸야 한다. 스쿨버스가 잘 없어 모든 부모들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야 한다. 심지어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도 계산할 때 내가 바코드를 찍어서 계산해야 한다. 주유소에서도 절대 주유해 주는 직원이 없다. 내가 직접 주유해야 한다. 빈부의 차이 없이 모두에게 노동의 수고가 주어진다. 사실 모든 걸 직접하기란 무척 수고스럽고 불편하다. 하지만 내가 힘든 만큼 남의 수고를 감사하게 되고, 내 힘으로 해낸다는 보람도 느낄 수 있다.


호주의 최저시급은 시간당 $20.33(약 18000원)이다. 편의점 알바를 해도 최소 18000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약 두 배이다. 노동의 가치를 알기에 제대로 된 값을 치러야 한다. 그래서 쉽게 사람을 써서 뭘 하지 못한다. 택배를 보내려고 해도 만 원 이상의 배송료를 지불해야 하고, 음식 배달도 마찬가지다. 돈으로 사람의 노동을 사기 위해선 많은 금액을 지불해야 하지만 그래서 노동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고, 내가 직접 노동하며 노동의 수고를 배우게 된다.


호주에 처음 와서 살게 된 한국 사람들은 호주의 일처리 방식이 답답하다고들 말한다. 한국보다 훨씬 더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국 분이 '한국 사람은 일머리가 좋은데, 호주 사람들은 일머리가 없다.'라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굳이 일머리 굴려 가며 효율적으로 일하기보다 쉬엄쉬엄 하는 게 호주 스타일이다. 효율적으로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해내는 한국 사람들이 더 현명한 건지, 주어진 시간에 할 일만 간신히 마치는 호주 사람이 더 현명한 건지, 아리송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호주는 노동을 해도 공장 기계 굴리듯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즐길 수 있을 만큼의 노동을 한다는 것이다.


호주엔 겨울이 오고 있다. 이제 다들 보온 물주머니를 준비할 계절이 되었다. 한국에선 그게 뭔가 하겠지만, 여기선 겨울에 필수 용품이다. 잘 때 보온 물주머니를 하나씩 안고 잔다. 난방이 잘 되지 않는 호주에선 이렇게 산다. 한국에선 아파트에서 겨울에도 반팔을 입는다고 하는데, 호주에선 겨울에 집에서 파카를 입고 다닌다. 불편하긴 해도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서 좋다. 다들 이렇게 불편하게 살아도 불평하지 않는다. 불편함이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주에 살면서야 배우게 되었다.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무언가를 해 내었을 때 느끼는 노동의 가치는 날 즐겁게 한다는 것, 누군가의 수고는 참으로 감사하고 제대로 그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 불편하게 살아도 그 불편함마저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하루 종일 조립해서 책상 하나를 완성해 냈을 때 아이와 내가 느낀 기쁨, 아침에 도시락 세 개를 싸며 느끼는 뿌듯한 마음, 겨울에 파카를 입고 펭귄처럼 거실을 걸어 다니며 차가운 공기를 즐기는 여유, 고장 난 수도를 직접 고쳤을 때 맛보는 성취감. 불편한 호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기분 좋은 느낌들이다.


호주는 불편해서 좋은 나라이다.



<사진: 우리집 물주머니, 사진 출처: 나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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