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처럼 덥지 않은 여름은 호주에 온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현란한 크리스마스 장식의 불빛들만큼이나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의 더위 때문에 고생이었는데 올여름은 선들바람이 시원할 정도로 쾌적한 날씨이다. 매년 크리스마스 휴가에 그랬듯이 더위를 벗어날 캠핑 계획을 오래전부터 세워놓고 계곡을 끼고 있는 캠핑사이트를 예약해 두었다. 막상 와보니 날씨가 덥지 않아 차가운 계곡 물에 몸을 담그기가 뭔가 싱거운 감이 없지 않지만 여전히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맑은 청록 빛깔의 물에 몸을 담그는 일은 애어른 할 것 없이 신나는 일이다. 두 아들과 남편은 일찌감치 계곡에 몸을 담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다. 물장난 치는 아들과 남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난 이미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온몸이 시원해진다.
첨벙첨벙 재미난 소리를 뒤로하고, 난 소복소복 쌓여 있는 개미 무덤들을 지나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준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이렇게 멍 때리기 좋은 환경에 놓이게 되면 바쁜 일상에선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숲을 가득 채우는 맑은 새소리는 소음에 시달리던 내 머리를 시원하게 씻겨 준다. 캠핑 의자에 앉아 가만히 숲 구경을 하고 있노라니 큼지막한 민들레 홀씨가 발레리나의 착지처럼 우아하면서도 확고하게 땅에 내려선다. 흐트러짐 없이 꼿꼿이 서 있다. 신기할 따름이다. 저 가볍고 나약해 보이는 생명이 주는 엄청난 확고함에 숙연해진다.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보여준 민들레 홀씨의 확고함에 생명의 신성함이 느껴질 정도다. 우린 민들레 홀씨만큼이라도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돌보고 있는지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고개를 들어 하늘에 드리운 동글동글한 나뭇잎을 보고 있으니 나뭇잎 모양을 따라 내 모난 마음도 둥글둥글 해 지는 것 같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자니 한 나무에서 난 잎도 다 다른 잎이란 걸 알아차리게 된다. 잎 색도 다 제 각각인 푸른색이다. 이런 나뭇잎을 무심히 ‘녹색’ 이라고만 한다면 나뭇잎들이 섭섭해할 듯하다. 더 들여다보니 벌레 먹은 구멍이 뽕뽕 뚫어져 있어 그 작은 구멍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마치 나뭇잎에 은빛 가루를 뿌려 놓은 듯하다. 나뭇잎에게는 그 구멍이 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나가는 행인의 눈엔 멀리서 보니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사는 모습도 이러하지 않을까? 내가 입은 해에 골몰하지 말고 여유롭게 그 해 조차도 포용할 수 있다면 우릴 바라보는 그 누군가는 우리를 아름답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해를 입은 그 구멍으로 아름다운 빛이 들어올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어느새 해가 지고 하나 둘씩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한다. 각자의 캠핑 자리마다 모닥불을 피울 수 있게 되어 있어 가족끼리 오붓하게 불놀이를 할 수 있다. 산 속이라 여기저기서 땔감이 될만한 가지들을 주워 모아 불을 붙인다. 매캐한 장작 연기에 눈이 맵고 코가 매워도 나무 타는 냄새는 늘 우리를 향수에 젖게 한다. 타는 불을 바라보며 한여름 밤의 온기를 느끼고 있으니 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바싹 마른 가지들은 보잘것 없이 버려져 있었지만 그것들을 모아 불을 피우니 온기도 나눠 주고 추억도 꺼내 주고, 불이 사그라들 즈음에는 숯 가운데서 피어나는 불꽃들이 마치 어둠 속 보석이 숨쉬는 것 같다. 사람도 이 불타는 나뭇가지 같지 않을까? 돈이 많아도 마음까지 풍요롭게 할 수는 없고, 돈이 없어도 마음마저 가난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큰 집을 가졌다고 누구나 반길 수 있는 집이 되는 것은 아니고, 초라한 집을 가졌어도 누구나 묶고 갈 수 있는 집이 될 수 있는 법. 초라한 내 인생에도 꺼내 볼 불빛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보게 된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 되었다. 오랜만의 캠핑이라 들뜬 우리는 이내 잠을 청하지 못하고 새벽이 되도록 별구경을 한다. 오래도록 별구경을 하다 보면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보았던 은하수도 보게 되고, 별똥별도 보게 된다. 다시 그때의 아이가 된 것 마냥 마음이 설렌다. 별구경을 하며 노닥거리다 잠을 청하러 텐트로 돌아오는데 이게 웬일인가. 반딧불이 하나가 우리 텐트 바로 옆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어찌 된 영문이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한 마리가 별똥별 하나가 바닥에 내려앉은 것처럼 에메랄드 색 빛을 내고 있었다. 날아가지도 못하고 풀밭에 앉아 빛만 발하고 있었다. 사진으로 담아두고 싶었지만 카메라 불빛에 반딧불이가 놀랄까 봐 숨 죽이며 눈으로만 바라보았다. 사그라들었다 피어올랐다 하는 너울지는 불꽃처럼 반딧불이는 자신의 빛을 우리에게도 나누어주고 있었다.
우리 각자는 얼마나 아름다운 빛을 다른 이와 나누고 있을까? 반딧불이가 주는 보물까지 마음에 담고서야 나는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자연을 가까이하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내가 몰랐던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 비밀을 하나하나 보물 찾듯 알아가는 이 인생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