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부지런한 사람을 좋아한다. 쉽게 차를 타고 올라간 산에선 놓치는 게 너무 많다. 발길을 땅에 묻혀야지만 산의 향기를 오롯이 즐길 수 있다. 산에 여러 번 올랐다 해도 우린 아직 산이 지닌 향기를 다 맡았다 할 수 없다. 계절마다 시간마다 산은 다른 향기를 품고 있어 그 향을 온전히 맡으려면 산에서 산과 함께 벗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산은 그 자태만큼이나 넉넉하여 그를 찾는 이들에게 꼭 선물을 건네준다. 손에 작은 선물이라도 쥐어주는 것을 잊은 법이 없다. 이렇게 하여 내가 받은 선물은 수도 없이 많다. 어떤 선물들은 사진 속에, 어떤 선물들은 내 일기장 속에, 어떤 선물들은 내 기억 속에 고이고이 담아두었다.
산을 다녀온 날이면 내 몸에는 산의 향기가 짙게 남아 있다. 굳이 그 향들을 모아 병에 담아두지 않았어도 내 몸 곳곳은 산의 향기가 가득해진다. 자유로운 향이다. 억지로 모아 담아 두지 않아도 어느샌가 우리에게 다가와 쉬 내려앉는 자유로운 향기이다. 풀 냄새, 촉촉한 흙냄새, 나무 냄새가 서늘한 공기와 어우러진 그런 향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런 향기에 취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은 두둑해진다. 산처럼 푸근하게, 산처럼 넉넉하게 모든 이를 아우를 수 있는 두둑한 마음을 갖게 된다.
산길을 걸으면 난 보물 찾는 아이가 된다. 산은 말없이 구석구석 보물을 숨겨 놓고 있다가 자신을 밟고 스치는 사람에게 슬며시 보물들을 건네곤 한다. 그런 보물들을 받아 본 사람은 계속 산과 친구가 되어 또다시 산을 찾고, 또다시 보물을 찾게 된다.
가을 문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산에는 벌써 겨울을 담은 동백꽃이 피어 있다. 눈 속에서 어여쁘게 피어나는 동백꽃도 아름답지만, 뜻하지 않게 여름 끝자락에 피어난 동백을 보니 애처롭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때를 못 맞추고 먼저 달려 나온 동백 꽃망울이 귀엽기만 하다. 저 산 밑은 아직 여름을 보내느라 바빠 있지만, 이 산속은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다. 공기가 제법 쌀쌀하고, 나뭇잎도 무거워져 있다.
그래도 겨울 꽃은 너무 이른 감이 있다. 이 아이는 왜 때를 맞추지 못하고 이렇게 피어 있을까? 빨리 나와 뭔가 하고픈 말이라도 있었던 걸까? 동백꽃을 손에 쥐어 보니 피어난 어린 꽃잎이 달을 채우지 못하고 나온 아기 마냥 어려 있다. 자그만 꽃잎이 손에 담기도 애처롭다. 그래도 동백의 아름다움만은 여전하다.
동백꽃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지난겨울 산에 왔을 때 겨울나무들 사이에서 고고하게 노란 단풍을 간직하며 서 있던 느티나무가 생각난다. 다른 나무들은 가을의 한가운데서 단풍을 뽐내며 절정을 장식하고는 이제는 조용히 휴식하고 있는데, 그 작은 느티나무 한 그루만은 뒤늦게 단풍으로 물들어 조용히 겨울을 빛내고 있었다. 때늦은 단풍을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비록 시간은 늦어졌지만, 자신의 할 일을 다 이룬 나무가 애처로우면서도 대견해 보였다. 다른 나무들이 앞다투어 단풍으로 자신을 장식할 때, 저 나무는 묵묵히 자신만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속도에 충실히 하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완성해 왔으리라 생각하니 작은 나무지만 대단해 보였다.
때 이른 동백꽃도, 때늦은 느티나무도 모두가 말하는 ‘때’를 놓치고 있었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은 잃지 않았다. 동백꽃은 조금은 애처로워 보이고, 조금은 덜 찬 듯 보여도 여전히 아름다운 산이 준 선물이다. 느티나무가 뒤늦은 듯 보이고, 뒤쳐진 듯 보여도 여전히 아름다운 산의 선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때’를 잘 타야 하는가? 난 그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가?
산은 내게 말한다. ‘때’가 중요하진 않다고. 우리가 이루는 ‘아름다움’이 중요한 거라고.
너무 이르게 펼쳐 보여, 어설프고, 부족해도 여전히 너는 아름답다고.
너무 뒤늦게 펼쳐 보여, 어색하고, 부끄러워도 여전히 너는 아름답다고.
아름다움을 언제 펼치는 가는 중요하지 않다. 펼칠 아름다움이 내게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내게도 피어날 꽃이 있고, 내게도 아름답게 물들 단풍이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
산의 넉넉한 향기 가득한 선물을 마음에 담고 보니, 때를 맞추지 못한 나에게도, 때를 놓친 다른 누군가에게도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된다. 오늘도 산은 내게 나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눈길을 선물로 주었다.
부지런히 내 발길이 산에 닿으면 또 다른 아름다움과 다시 마주하리라.
또다시 산길을 걸어본다.
<사진:나무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