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가을, 릴리에게
가을 햇살이 창으로 쏟아질 듯 몰려오면 난 햇살의 포로가 되어 그들이 퍼붓는 공격에 아무런 방어 없이 나를 내어준다. 가을날, 그들의 포로가 되어 끌려다니는 한참이 지나면 내 얼굴과 온몸은 바싹 말라 짭조름해진다.
며칠 햇살의 포로가 되어 짭조름해진 나를 위로라도 하듯, 밖은 비가 내리고 있다. 가을비다. 깊은 밤 이불속에서 가을비가 지붕과 유리창에 집단 착지하는 소리를 들으며 잤다. 소란스럽지 않은 스무스한 착지. 사탕을 물고 자는 것처럼 입 안이 달콤한 꿈을 꾼다. 밤새 내린 비는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고, 온 집은 가을비가 범벅이 된 채로 습한 숨을 내몰고 있다. 달콤했던 꿈은 사라지고 무겁고 습한 공기에 가을처럼 시무룩해졌다.
창 밖을 보니 검은 머리 작은 새가 마당에서 종종걸음을 친다.
비를 맞으면서도 꼬리를 흔드는 작은 새의 다리가 시큼하다.
이럴 땐 신나는 음악이라도 들으면 마음이 뽀송해 질까 해, 평소엔 듣지도 않는 음악을 틀었더니 노래가 맵다. 할로피뇨 한 움큼을 집어 먹은 것처럼 소리가 맵다. 매운 소리에 마음이 부대끼고, 입에서 날숨과 들숨들이 숨 가쁘게 반복된다. 비트 빠른 음악은 어지럼증이 날 만큼 맵다.
매운 기를 가실 마음을 축이기 위해 우유처럼 부드럽고 딸기처럼 달콤한 고양이를 찾아본다.
침대에 나 대신 누워 아침 쪽잠을 자는 고양이의 눈가를 만져본다.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진 고양이 눈 주위를 살살 만져본다. 눈가까지 덮은 보송한 털을 매만지고서야 매웠던 마음이 진정이 된다.
딸기우유를 마신 것처럼 마음이 자꾸만 뽀송해진다.
비 내리는 가을 아침 만지는 고양이 털은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햇살 냄새나는 빨래처럼 뽀송하다.
맵고 습한 공기가 감싸는 날은, 딸기 우유 같은 고양이 털을 만지며 마음을 뽀송하게 말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