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을 기웃기웃하며 맛있는 음식을 찾아 나서는 사람처럼 글집을 기웃기웃하며 맛있는 글을 찾는다. 정성 가득한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날이면 하루 종일 행복해지는 것처럼, 정성 가득한 맛있는 글 하나를 읽을 수 있는 날이면 하루가 내내 가슴 벅찬 날이다.
맛있는 음식은 오감을 온전히 자극하는 맛이다. 예쁘게 차려진 음식의 모습을 눈으로 먹고, 음식의 냄새를 코로 먹고, 씹힐 때 들리는 소리를 귀로 먹고, 입안에 닿는 감촉을 느끼며 먹고, 마지막으로 혀로 전해지는 맛으로 먹는다. 이 모든 다섯 가지 감각에서 즐거움이 터져야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있다.
맛있는 글도 오감을 자극한다. 읽으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을 눈으로 읽고, 글에서 풍기는 향기를 코로 읽고, 종이를 넘기며 글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귀로 읽고, 읽으며 전해지는 전율을 피부로 읽고, 마지막으로 읽으며 맛보는 글맛을 온몸으로 느낀다. 글 역시 이 모든 다섯 가지 감각에서 즐거움이 터져야 맛있는 글이 된다.
미식가인 나는 맛집을 찾기 힘든 호주에 살기에, 만족스러운 음식을 만나는 일도 드물다. 맛있다고 추천받은 식당을 가서도 영 내 기대에 못 미쳐 실망하며 돌아오곤 한다. 그렇게 음식점에서 채우지 못한 감각을 내가 직접 완성하기 위해 난 요리를 한다.
내가 미식가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엄마의 영향 때문이다. 자랄 때는 몰랐지만 엄마의 음식은 고급 한정식 집에서도 맛볼 수 없는 미슐렝 스타를 열 개는 더 받았을 법한 음식들임을 커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 집이 그토록 외식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외식을 해도 음식들이 맛이 없게 느껴졌던 이유도, 모두 엄마의 훌륭한 요리 솜씨 때문이었다. 어른이 되고 난 후, 한 끼에 십만 원을 훌쩍 넘는 한정식 집에서 음식을 먹어볼 기회도 있었지만, 고가의 한정식 집 음식은 엄마 음식의 반의 반도 되질 못했다.
엄마의 음식이야 말로 오감을 자극하면서도 정갈하고 깊은 맛의 음식이었다. 그런 엄마의 음식을 흉내도 못 내보지만, 난 근처에라도 머물기 위해 요리를 했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일도 재밌고 신나는 일이지만, 내 손으로 아름다운 음식을 만드는 일은 더없이 즐겁고 신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남기고 간 훌륭한 책들을 읽으며 난 엄마의 음식이 떠올랐다. 화려하지 않지만 내 눈을 사로잡는 음식의 고운 색감, 자극적인 향이 아니라 은은하면서도 조화롭게 어우러진 식재료 본연의 향, 입 안에 넣었을 때 들리는 재미난 음식들의 소리와 감촉, 혀 구석구석을 황홀하게 만드는 조화로운 맛. 좋은 책은 그런 오감의 자극을 적절하게 갖춘 엄마의 음식 같았다.
그런 글을 만난 날이면 하루 종일, 아니 한 달 내내 그런 글 때문에 행복했다. 꼬박꼬박 훌륭한 글을 내어주는 작가님들이 많은 탓에 난 맛난 글들을 많이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날은 내가 그런 글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훌륭한 엄마의 음식까진 못 가더라도 내가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었을 때 느껴지는 만족감과 행복감이 날 요리하게 만든 것처럼, 훌륭한 작가들의 글만큼은 아니더라도, 내가 정성 들여 글을 썼을 때 느끼는 만족감과 행복감은 날 글 쓰게 만든다.
내가 한 요리를 너무나 정확하게, 때로는 가혹하게 평가해 주는 미식가가 있는데, 바로 아들이다. 아들은 외할머니의 음식을 먹어보았기에 음식에 대한 기준이 무척 높다. 마치 본인이 미슐랭 심사원이라도 된 것처럼 나의 음식에 대해 많은 지적을 해주곤 한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그런 평가자가 있어 내 음식이 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들은 맛난 음식을 찾는 미식가이기도 하지만, 맛난 음악을 즐기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나는 요리를 하는 것처럼 글쓰기를 선택했지만, 아들은 음식을 즐기는 것처럼 음악을 쓰기로 했다. 그래서 아들은 요즘 기타를 치며 곡을 만들고 있다. 만든 곡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고, 우리 가족은 맛집에서 맛난 음식을 즐기듯, 아들이 들려주는 맛난 음악을 즐기고 있다.
아들은 대학을 가는 대신 기술과 노동을 선택했고, 그에 더해 지금 음악을 즐기고 있다. 개미와 베짱이 두 몫을 다 챙기고 있는 셈이다.
음악 역시 귀로만 듣는 것은 아니다. 음식이나, 글처럼 음악 역시 오감을 자극한다. 음악을 들으면 소설 속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기억에 묻혀 있던 향기가 떠오르고, 내 몸 구석구석을 떨게 만드는 촉감을 전해주며, 입안이 달달하거나 때론 쓰고, 그 모든 것을 전하는 소리를 귀에 담게 된다.
내가 맛있는 글을 먹고 싶은 것처럼, 남들도 내 글을 맛있게 먹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아들도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가 맛있게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아들은 흔한 대학생들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건축학개론' 책 대신 안전모와 공구들을 허리춤에 두르고 있다. 대학생 새내기들의 하얗고 맑은 얼굴 대신 하루 종일 고된 노동에 시꺼메진 얼굴이다. 말끔한 청바지에 티셔츠 대신 얼룩이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다. 하지만 아들은 내가 대학생 때 가지지 못했던 방황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작업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기타를 치며 자신을 들려주는 아들의 음악이 맛있다. 나도 아들의 음악처럼 맛있는 글을 쓰고 싶다. 맛있는 글이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