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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Jun 05. 2023

시금치를 무치는 마음으로

호주는 한국처럼 마트만 가면 시금치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가 되면 겨우 마트 매대에서 드물게 시금치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 겨울에 만날 수 있는 해풍 맞은 달근한 시금치를 맛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겨울 품은 시금치를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시금치를 고르는 일도 신중히 한다. 줄기가 가늘고 길쭉한 잉글리시 스피니치는 단 맛이 덜하다. 아시안들이 재배한 시금치는 줄기가 통통하고 짧다. 그런 시금치라야 그나마 한국 시금치처럼 달근한 맛을 볼 수 있다.


그런 시금치를 사 왔다면 이젠 흙을 털고 잘 씻어야 한다. 흙 묻은 채로 씻으면 씻는 물이 흙탕물이 되기에 우선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낸다. 털어낼 때 시금치가 다치지 않게 아주 살살 털어야만 한다. 여린 잎이 혹여나 상하지 않을까 조심조심 턴다. 흙을 털어낸 시금치는 다듬는다. 아주 상해 못 먹게 된 잎만 뜯어내고, 뿌리 부분의 잔뿌리만 제거한다. 그런 시금치는 물에 담가 씻어내는데, 씻을 때도 흙을 털 때처럼 잎들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씻어야 한다. 적어도 세 번은 그렇게 잘 씻어야 더 이상 눈에 보이는 흙이 나오지 않는다. 너무 완벽하게 씻으려 하기보단 잎이 다치지 않게 적당히만 씻는다. 어차피 데쳐 낼 때 또 한 번 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잘 씻은 시금치는 채반에 건져두고 데칠 물을 안친다. 물이 끓으면 소금과 함께 씻어둔 시금치를 넣는다. 누구는 30초, 누구는 45초를 데치라고 하지만, 정해진 시간은 시금치에 따라 다르다. 시금치가 얼마나 여린지, 통통한 지에 따라 데치는 시간이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너무 물러지지 않게 시금치 특유의 질감을 살릴 수 있을 만큼만 데쳐내야 한다. 너무 무르지 않게 잘 데쳐낸 시금치는 찬 물에 헹군다. 남은 열로 시금치가 더 익는 걸 막기 위해서이다. 파란 물결치는 시금치를 찬물에 잘 헹구었다면 이젠 시금치를 짜야한다.


시금치를 너무 꽉 짠다면 시금치에 들어있던 좋은 영양소마저 빠져나가 버리기에 적당한 압력으로 짜내야 한다. 물이 너무 흥건해서도 안되는데, 시금치의 맛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적당히, 시금치에 묻은 물을 짜내었다면 이젠 소금과 마늘 참기름을 넣고 무칠 차례다. 예전엔 양념이 손에 묻는 게 싫어 젓가락으로 살살 저어주며 무쳤다. 하지만 이젠 손에 양념이 묻는 것에 괘념치 않은 아줌마가 되었기에 맨손으로 무친다. 손에서 얼마만큼의 맛이 더해질 진 알 수 없지만, 맨손으로 무친 시금치 무침이 맛이 더 좋은 것 같다.


별 것 아닌 반찬 같지만, 이 시금치 무침 하나를 준비하기 위해선 모든 과정마다 나의 마음을 써야 하고, 정성을 보태야 한다. 그렇게 해서 깨소금을 살짝 뿌린 시금치 무침이 밥상에 올라오면 두 아들은 게눈 감추듯 시금치나물을 먹어치운다. 그래도 호주에선 귀한 한국 반찬이기에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먹게 된다.


시금치를 무치며 불현듯 아이를 대하는 나를 돌이켜 보게 되었다.

상 위에 올라온 시금치 무침은 일일이 다듬고, 흙을 털어 씻어내고, 살짝 데쳐 손으로 꼭 짜 손맛을 더한 다음에야 가족들의 입에 들어갈 수 있다. 많은 수고로움과 과정이 있기에 가족들의 입에 맛있게 들어갈 수 있다. 한 가지 반찬에도 이런 사사로운 과정들이 필요한데, 자녀를 키우는 일은 내가 세심하게 더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난 그러질 못했다.


시금치와 내가 만난 것은 겨울에나 잠깐 이루어지는 귀한 만남인데, 아이와 내가 만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귀한 만남이다. 하지만 난 그 귀한 만남을 오래도록 짐처럼 느껴왔다. 시금치를 무칠 때는 묻은 흙을 털고, 씻을 때 조심스럽게 여린 잎이 상하지 않게 했음에도, 아이의 여린 잎이 상하지 않게는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다.

시금치는 물러지지 않게 살짝만 데쳐 적당한 압력으로 물기를 짜 냈지만, 아이를 징계하거나 훈육할 때 과연 나는 적당한 압력으로 아이의 때를 걷어낼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사실 시금치나물도 처음부터 잘 무쳐낸 것은 아니다. 곤죽이 되도록 너무 데쳐 버려 죽이 된 시금치 무침을 먹어야 할 때도 있었고, 물을 덜 짜 물기 흥건한 시금치 무침을 먹은 적도 많다. 적당히 간을 해야 했지만 소금을 너무 많이 쳐버려 짜디짠 시금치 무침을 무칠 때도 있었다.

아이를 대하는 나의 모습이 서툴게 만든 시금치 무침과 비슷했다.


시금치를 제법 잘 무쳐낼 수 있게 되자, 늦게나마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깨닫게 되었다. 아이가 자신만의 단단함과 풍미를 가지고 자랄 수 있도록 난 세심한 정성을 쏟아야 했고 마음을 써야 했다. 아이의 땟국물을 씻어낼 때도 다치지 않게 살살, 아이가 자신의 맛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의 몫이었다. 시금치를 무치면서 아이를 대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난 살림을 하며 아이를 살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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