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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Apr 19. 2023

공부를 하는 이유

'아름답다'라는 말에는 '좋다', '예쁘다', '대단하다', '훌륭하다'를 능하가는 무언가 감격스러운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아름다움은 날 눈물나게 하고, 벅차오르게 하고, 삶을 숭고하게 만든다.


지금 내가 학생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누군가를 이기는 쾌감을 얻기 위해서'라는 부끄러운 이유 말고,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서 공부하고 싶다. 난 그런 이유를 갖지 못했기에 많은 아름다움을 놓치고 살았지만, 가끔은 어떤 아름다움들과 마주칠 기회를 가진 적도 있었다.


국어 시간에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맑고 깨끗한 소년의 마음과 만나는 아름다움을 맛보았고, 수학 문제와 씨름하며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수의 질서를 찾았을 때 수학의 아름다움을 맛보았다. 음악 시간에 가곡을 들으면서 인간의 목소리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꼈고, 잘하지도 못하는 체육 시간에 공을 내 몸의 일부처럼 다루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꼈다.


인생은 아름다움을 찾고 누리는 여정이 아닐까. 매 순간 우리는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그런 아름다움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아름다움을 수집하며 살아가고 있다. 죽음까지도 아름답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우린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에 이끌린다. 그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마다 달라서 어떤 사람은 그것이 노래가 되고, 춤이 되고, 누구에게는 수학이나 과학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하늘의 별이 되기도 하고 삶의 이치가 되기도 한다. 그런 아름다움에 우열은 없다. 모두가 아름다움 그 자체인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그런 아름다움을 찾을 때마다 느낄 수 있다. 그런 아름다움을 자주 찾고 있다면 난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런 작은 아름다움도 찾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의 행복도 그만큼 나에게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움은 찬란한 빛 가운데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두운 암흑 속에서도 진주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아니, 어쩌면 암흑 속에서 더 아름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트루키예에 지진이 나서 건물이 붕괴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은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조하기 위해 땀 흘리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손과 발은 참으로 아름답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많은 민간인이 죽어가는 상황은 아름답지 않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인종을 불문하고 그들을 도우려는 인간애는 아름답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아름답지 않아도 그 속에서 얼마든지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공부도 그런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우리가 처한 교육 환경이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환경이라 하더라도 우린 그 가운데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아이돌 댄스를 같이 추면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급식 시간에 맛있는 점심을 나눠먹으며 음식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다.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수업 시간 외에도 우린 학교에서 많은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수업시간에 딴 생각하며 바라본 창 밖의 풍경에서도, 하굣길에 정답게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친구들의 모습에서도, 쉬는 시간에 엎드려 곤히 자고 있는 누군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 위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그런 사소한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있다면, 우린 학교에서 이미 많은 걸 배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부를 해야만 배우는 것은 아니니까. 공부를 하지 않아도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아직 학교에 많다.


난 아들이 공부를 잘하길 바라지 않았다. 단지 인생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며 살 줄 아는 사람으로 커 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들은 나를 빼다 박아 많은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들은 승부욕이 강한 아이였다. 어릴 때 나처럼 지기 싫어 공부하는 꼴이 나를 꼭 닮아 있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많이 안타까워 어린 시절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타고난 승부욕은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쉽게 꺾이지 않았다. 공부에 대한 경쟁적 분위기가 거의 없다시피 하는 이 호주에서, 아들은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열심히 했다. 


아들이 그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아시안으로서 느끼는 열등의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힘으로도, 피지컬로도 당해낼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공부로 승부하겠다는 아이처럼 보였다. 대놓고 심한 인종차별을 받지는 않았지만 암암리에 아시안을 무시하는 호주 땅에서 아이는 자신을 세워보려 그런 전략을 세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식으로 자신을 세우려던 전략은 자신을 무너지게 한다. 아들은 자신이 왜 사는 건지, 왜 공부하는 건지, 무엇이 하고 싶은 건지 도통 모르겠다고 혼란스러워했다. 그냥 호주 아이들을 이기고 싶은 그 마음 하나뿐, 자신에겐 꿈도, 하고 싶은 일들도, 방향도 목적도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아이의 혼란을 정리해 줄 수 있는 능력자가 되지 못했기에, 그런 혼란마저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했기에, 난 아이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당장 나의 꿈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보라 닦달하지 않았다. 나도 그 나이에 꿈이 없었고, 좋아하는 것이 없었기에 나도 그랬다며 위로해 주었다. 내가 닦달하지 않아도 아이는 꿈을 찾게 될 것이었다. 그 꿈을 언제 찾을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었고, 내가 아이의 손에 꿈을 쥐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아이와 자주 여행을 하며 작은 일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단한 꿈이 아니라도 작은 일상에서 가슴이 뛰고, 두근거리고, 설레는 경험을 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단한 성과물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사소한 아름다움을 찾아가기 위해 공부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공부하는 아이가 되어주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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