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향기 Apr 17. 2023

규칙보다는 원칙을 알려주는 엄마가 되고싶습니다

어쩌면 난 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나를 아무개의 딸, 아무개의 엄마, 아무개의 부인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내 이름 석 자로 불러 주면 더 좋았다. 내 이름 석자에 내 자아를 집약하고 싶었다. 물론 난 누군가의 엄마이고, 부인이고, 누군가의 딸이다. 하지만 난 그것마저도 내 이름에 모두 응집되어 있다고 생각했기에 내 이름으로 불리길 바랐다. 누군가의 엄마나, 부인이나 딸은 내 전체가 아니라 내 부분이라, 부분으로 불리기보다는 전체로 불리고 싶었다.


누군가가 우리 집에 잠깐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아들과 나의 관계를 지켜보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집은 모자 사이가 좀 남다르네요. 여느 집과는 많이 달라요. 엄마와 아들 관계 같지 않고, 꼭 누나 동생? 아니, 이모 조카 같아요."


어쩜 그녀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자아가 강한 탓에 난 그렇게 희생적인 엄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권위 있는 엄마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냥 서로를 존중하는 가족이란 공동체의 개인으로서 아들을 대했다.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아들은 내 소유가 아니라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내가 낳기만 했지, 이 세상으로 초대받은 손님으로 잠시 내게 머물다 갈 인격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모습이 아들의 모습 속에 나타나고, 나랑 참 많이도 닮은 구석에 여전히 매번 놀라기는 한다. 하지만 엄연히 아들은 나와는 다른 인격체라 내가 그의 인생에 큰 간섭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이 한 사람으로서 인생을 아름답게 꾸리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좋은 영향력을 다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나의 삶을 잘 꾸려보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만 했을 뿐, 그의 인생을 주조(Mold)하려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너무 방관자처럼 니 알아 살아라는 식으로 내팽개친 건 아니다. 난 아들이 규칙보다는 원칙에 고착하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규칙은 아이를 통제하지만 원칙은 아이에게 자중심을 준다. 인생을 살면서 문제가 생겼을 때 꼭 따라야 할 원칙들을 찾아보고 그 원칙에 고착하기 위해 내 삶을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할지를 스스로 고민하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자아가 강한 엄마를 둔 탓에 아들은 자아를 키워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난 내 자아가 중요한 만큼 아이의 자아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생의 중요한 원칙들을 가르치는 데 더 힘을 쏟았다. 규칙을 일일이 나열하는 부모보다는 원칙을 알려주고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아들의 자아를 존중하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과 그런 부모가 실제로 되는 현실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었다. 사실 이거 하지 마, 저거 하지 마, 하면서 지시하는 훈육은 너무나 쉽다. 하지만 자녀의 어떤 행동을 보고 '하지 마' 대신 인생의 어떤 원칙 때문에 그것이 바른 행동이 아닌가를 아이와 같이 고민해 보는 것은 부모로서 많은 인내심을 요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난 조급증과 파르르 끓는 감정을 잘 억제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아직도 그런 상황이 오면 심호흡을 세 번, 아니 열 번은 넘게 하다 과호흡이 와 쓰러질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다행히 남편이 나와는 달리 좀 무던하고 점잖은 사람이라 나처럼 가쁘게 심호흡을 하지 않고도 아이를 잘 훈육해 주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먼 나는 가쁜 심호흡 후에야, 가끔은, 아니 자주 파르르 감정을 분출시키고 나서야 아이와 함께 원칙을 찾아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 나약한(?) 엄마를 보면서 아들은 그래도 좀 고마워하지 않았을까? 참 많이도 애쓴다(ㅎㅎ)며 알아주진 않았을까?

감정 조절을 잘하지 못하는 엄마가 저리도 인생의 원칙을 알려주려 애쓰니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아들은 약간의 감동을 먹는 듯했다.


아들이 유치원을 다닐 때였다. 아이의 가방 속에는 못 보던 장난감이 들어있었다. 딱 봐도 남의 장난감을 몰래 들고 온 것이었다. 마음속은 이미 아이에게

'너 어디서 이거 들고 왔어? 다른 애 꺼 훔쳐온 거야? 훔치는 거 나쁜 거랬지!'를 외치고 있었지만 파르르 떨리는 심장을 다잡으며 심호흡을 한 스무 번은 했다. 그리고 남편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시뮬레이션을 하며 아이에게 말을 했다.

"못 보던 장난감인 것 같은데, 이게 왜 니 가방에 있는 거야?"

아이는 내 눈치를 보더니

"친구가 줬어요." 한다. 눈빛이 꼭 도둑놈 제 발 저린 눈빛이다.

"그래? 그 친구가 왜 너한테 선물을 줬을까? 그 친구 이름이 뭐야? 엄마가 내일 가서 고맙다고 말이라도 해야겠다."

라고 하자, 제발 유치원에 오지 말라며 매달린다.

"왜? 엄마가 고맙다고 말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

아이는 그제야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몰래 들고 온 것이라 이실직고를 했다.

이때 '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라는 규칙을 알려주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구나,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그 친구가 자기가 소중하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없어진 걸 알고 어떨 것 같아?"

"속상해요. 흐흑.."

"그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속상하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그럼 이 장난감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내일 돌려줄 거예요."

"그래, 그리고 어떤 말을 해 주면 좋을지 잘 생각해서 네 마음을 친구한테 잘 말해줘."


가뿐 숨을 참아내느라 힘들었지만, 난 이렇게 아이를 가르쳤을 때 나 자신이 뿌듯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나도 불완전한 인간이자 부모라 처음엔 시행착오를 많이도 겪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규칙이 아닌 원칙을 가르쳐 주는 부모가 되고 싶은 나의 마음과 그런 부모가 되어가는 현실의 간극은 각고의 노력 끝에 몇 미리는 단축되어 가고 있었다. 자아가 강한 나는 아이의 자아도 나의 자아만큼 존중해 주고 싶어 파닥거리는 나의 본성을 가끔은 억누르며 아이의 자아를 보호해 주곤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부 좀 해라' 보다 '공부는 왜 하는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