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앞에서 갑이었던 내가 을로 전락해 있을 즈음, 남편이 서울에 다녀와서는 한숨을 쉬며 나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남편은 서울에 병원 볼 일이 있어 버스를 타고 서울에 다녀왔다.
한국의 대중교통은 아마 세계 최고 수준이 아닐까 한다. 시간의 정확성과 합리적인 요금, 그리고 어디든 대중교통으로 웬만큼 다 갈 수 있다는 접근성까지 이 정도의 대중교통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찾기 힘들다.
내가 살던 호주를 말하자면 그야말로 정시에 버스가 온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심지어 스쿨버스마저도 3,40분가량이 늦어 아들 녀석은 학교에 지각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리고 버스가 있다 해도 내가 살던 골드 코스트는 1시간에 한 대 꼴로 버스가 왔고, 그마저도 너무 돌아가기에, 차로 10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은 가야 한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대부분 자가운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빈약한 대중교통 시설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요금은 무지하게 비싸다. 트램이나 기차, 버스비는 한국 요금의 두 세 배가 넘는다.
그래서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버스 하나로 오만 곳을 돌아다닐 수 있어 너무나 감격했고, 버스 요금이 호주에 비해 너무나 저렴해 또 한 번 더 감격했다. 네이버 맵에서 알려주는 시간표대로 정확하게 버스가 도착하는 것에 너무나 놀랐고, 아무리 막히는 정체 상황에서도 버스 전용차로로 쌩쌩 달릴 수 있어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버스를 타는 날이면 난 어김없이 다리와 허벅지에 멍이 들었다. 나의 균형감각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자리를 잡고 앉거나 무언가를 잡고 서기 전에 버스가 갑자기 출발해 휘청거리다가 여기저기 부딪혔기 때문이다. 나 같은 젊은 사람들도 이렇게 힘든데 노인분들은 어떻게 버스를 타실지 걱정이 되었다.
나의 걱정은 현실로 나타났고 남편의 한숨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남편이 탄 버스에 어느 할머니가 타셨는데, 할머니가 타시자마자 버스가 출발하는 바람에 균형을 못 잡으신 할머니는 옆 좌석에 부딪히고 말았고 간신히 균형을 잡고서 노약자석에 앉으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버스가 신호대기에 정차하자 할머니께서 운전자에게 가시더니 음료수 한 병을 건네시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90 넘은 노인이 버스 타지 말아야 하는데, 기사님 미안해요. 내가 보통은 택시를 타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게 됐어요. 늙으면 버스는 타지 말아야 하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남편은 울컥했다고 했고, 듣는 나도 울컥했다. 그래도 운전기사님이 좋으신 분이었는지 할머니께 미안해하지 마시라며 다독여 주셨고, 버스가 제시간에 출발하고 도착해야 해서 천천히 갈 수 없으니 안전하게 타셔야 한다 일러주셨다고 했다.
90이 넘은 노인도 대중교통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지만, 그분이 안전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내가 편리하게 이용한, 제시간에 도착하는 버스는 누군가에겐 안전하게 타기 힘든 도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제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기사님들은 서둘러 출발해야 하고, 승객들이 안전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지 미처 확인할 여유가 없을 수 있다. 편리함과 정확성의 뒷면에는 안전하지 못하다는 불안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호주에서 버스가 제시간에 오지 않는 불편함 뒤에는 누구나 안전하게 탈 수 있다는 편안함이 뒷받침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타면 운전기사는 모든 승객에게 인사를 일일이 건네고, 인사뿐만 아니라 잡답까지 하기도 일수다.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승객들을 위해 유모차를 실어주는 일까지 버스 기사들이 하고 있으니, 버스가 제시간에 도착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하게 승객이 자리 잡은 후에 버스가 출발하고 운전기사는 출발 전에 항상 그것을 체크한다. 그렇기에 호주에서 버스를 탈 때 급정차나 급출발 때문에 휘청인 기억은 없다. 느려서 속 터진 적은 있어도, 휘청이다 부딪혀 몸에 멍 터진 적은 없다.
모두를 만족시키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 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제시간에 도착하는 버스를 타는 것이 더 중요한지, 안전하게 탈 수 있는 버스가 더 중요한지는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
내가 버스를 타는 목적이 무엇인지, 급급하게 무언가를 쫓아가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버스를 타고 움직이는 것인지 나 자신에게 되물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