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와서 유독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표정이 무표정이거나 너무나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무표정한 사람들의 무리가 버스에 올라타고 지하철에 올라탄다. 병원에서든, 관공서에서는 문장은 최고의 격식을 갖추어 내 귀에 꽂히는데 그들의 표정은 그 친절한 문장을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눈에는 웃음기가 없는데 입꼬리만 올라간 다소 부조화스러운 표정으로 깍듯이 인사를 건네는 쇼핑몰의 직원들이 낯설었다.
호주에서는 길을 가다 환한 얼굴로 웃음을 건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사람에 대한 존중과 애정 어린 눈빛을 낯선 이들에게도 관대하게 베푸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웃음 하나에 하루가 즐거워지곤 했다. 그런 곳에 살다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무표정한 사람들의 무리 사이로 걸어야 했을 때, 주문제작 된 듯한 표정으로 나를 응대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내 마음은 다소 쓸쓸해지곤 했다.
신기한 것은 이런 한국에서 유독 '스마일'이란 단어를 간판이나 물건 곳곳에서 더 자주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웃음 부존재의 사회에서 웃음을 갈망하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 같아 한국에 오고 나서 '스마일'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복잡한 감정이 들게 되었다.
우스갯소리로 스마일즈(SMILES) 사이엔 1 마일(MILE)의 거리가 있다고 한다. 우리의 스마일엔 어쩜 그보다 더 먼 거리가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을 찍을 때 사진 찍는 사람이 Smile! 하고 주문을 건네면 내 스마일은 금세 인조 스마일이 되어버렸다. 그냥 내가 스마일인 표정일 때 사진을 찍어주면 좋으련마는 굳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전에 스마일이라는 주문을 던져 나의 기분이나 감정과 상관없이 지어진 나의 스마일은 진짜가 되지 못하고 억지가 되어버리곤 했다.
사람들은 스마일을 여기저기에서 강요하곤 하는데 심지어 내가 발매트로 쓰고 있는 수건에 조차 스마일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오랜만에 빨래한 발매트에 선명하게 새겨진 스마일이란 단어를 보고 잠시 '나 웃어야 하나'하는 생각에 잠겼다. 웃음조차 자연스럽게 뱉어지지 않아 굳이 이렇게 웃으라고 강요하는 세상에 사는 가 싶어 헛웃음이 났다.
웃음을 강요한다는 건, 웃음이 흔치 않다는 이야기이고 웃음이 흔치 않다는 건 살기가 빡빡하다는 이야기인데, 빡빡한 삶을 부드럽게 해 줄 무언가를 주는 대신, 과정은 생략한 '스마일'이라는 주문만 던지는 것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잘 나가는 표정관리사도 등장하고, 동안을 위해 스마일 근육을 키워야 한다는 성형외과 의사의 말들을 들으면 왠지 점점 주문제작된 인조 스마일들만 가득해진 세상에 사는 것 같아 마음이 쓸쓸해졌다.
목적을 위해서 표정을 짓는 것이 나에겐 슬픈 일이다.
사진에 잘 나오기 위해 웃음을 짓고, 면접에 성공하기 위해 웃음 띈 표정을 연습하고, 누군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거울을 보며 표정연습을 하는 모습들이 나에겐 진짜 스마일을 잃어버리는 것만 같아 슬퍼지곤 한다.
어렸을 때 즐겨보던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코미디 프로는 요즘의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일까?
'웃으면 복이 와요'는 웃으면 복이 오니 억지로라도 웃으라는 권고가 아니었다. 웃을 일들을 많이 많들어 자연스럽게 터진 웃음은 우리에게 행복감을 준다는 교훈의 의미로 받아들였었다. 코미디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줄 테니 많이 웃으시고 행복해지란 축복의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하다'라는 말은 억지로라도 웃으면 뇌가 착각을 하고 그것을 행복감으로 받아들이니 억지로라도 웃어 뇌를 속이면 결과물로 행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다소 조작적인 웃음과 행복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 같아 온전히 그 말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행복을 찾아 나서는 수많은 무리들이 억지웃음이라도 지어 행복을 쟁취하려는, 행복과 웃음이 부재한 세상에서 안간힘을 다해 행복을 찾아내려는 슬픈 웃음이 떠올라 마음이 쓸쓸했다.
표정을 주문한다는 것은, 남이 나에게 표정을 주문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친절한 행동이다. 뇌는 이미 어떤 상황에서 스마일 상태가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반응으로 나타나는 표정이 아니라 과정은 생략된 결과물인 표정만 주문한다는 것은 그의 뇌가 할 일을 빼앗아버리는 불친절한 행동이 아닐까. 억지로 웃으라고 하는 것이, 억지로 좋은 표정을 지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누군가의 얼굴과 감정에 무척이나 불친절한 행동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불친절한 행동을 남이 아닌 나 자신이 나에게 주문하고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감정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표정이 아닌, 목적을 가지고 주문제작하여 얼굴로 발현된 표정은 멋있어 보이는 그럴싸한 표정이라 하더라도 쓸쓸함이 묻어있다. 아무리 나의 뇌를 속일 수 있어도 그 웃음과 표정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나의 자아를 속일 순 없다. 더 이상 그 웃음은 진짜가 될 수 없다.
짝퉁이 난무하는 홍콩의 어느 시장에서 집어든 짝퉁 명품백처럼 억지로 생산해 낸 그 웃음에는 짝퉁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진짜 웃음은 자연스럽고, 오랜 향기를 품고 나온다. 내 속 깊은 곳에서 사랑과 친절과 정성이 넘쳐나 그 갖가지 향기가 혼합되어 웃음으로 꽃 핀다. 내가 행복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웃음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환경이 어떠하든 삶을 바라보는 나의 고귀한 시선과 다른 이를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이 저절로 묻어 나와 진짜 웃음을 짓게 된다. 연습해서 되는 게 아니라 나의 생각과 시선이 진정으로 따뜻해져야만 나오는 것이다.
웃음을 억지로 주문제작해야만 하는, 목적을 위해서 웃음을 생산해야만 하는 이 세상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우리들 중 분명 많은 사람들은 진심이 담긴 진짜 웃음을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 표정은 무덤덤해도 마음은 따뜻한 누군가의 영혼, 어느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친절을 만날 수 있도록 일 마일이 아니라 여러 마일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