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다 보니 예전엔 즐겨 입던 옷들에 더 이상 손이 가지 않는다. 예전에는 허리가 잘록하고 내 몸에 딱 맞는 옷들을 즐겼는데 이제는 품이 넉넉하고 내 몸이 편히 들어가는 옷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색상과 디자인이 우선이었다면 이제는 재질이 우선이다. 아무리 예쁘고 내 맘에 쏙 드는 색상의 옷이라도 재질이 천연 섬유가 아니면 입지 않는다.
단순히 나이 든 체형을 커버해 줄 펑퍼짐한 옷을 찾거나 색상과 디자인에 괘념치 않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나를 드러내 줄 옷을 찾았다면 이제는 나를 담아 줄 옷을 찾게 된다. 이젠 나를 편하게 담을 수 있는 옷들이 좋다. 옷에 나를 맞추지 않아도 나를 넉넉히 담아줄 수 있는 옷.
내 피부가 닿는 모든 섬유에 대해서 어느 순간 마음이 쓰였다. 내 방을 더 아름답게 빛내줄 침구류 보다는 덮고 있을 때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침구류를 찾게 되었다. 부엌에 걸어 둘 작은 행주 하나도 요즘 유행하는 극세사 재질보다는 내 손에 편히 감길 천연 섬유를 찾게 되었다.
내 손길이 닿는, 내 몸이 닿는 모든 곳에 편안한 쉼이 머물길 바랐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내가 만난 것이 ‘리넨(linen)’이다.
여름이 긴 호주에 살다 보니 입었을 때 시원한 청량감이 느껴지는 옷이 좋았다. 내 삶에 청량감을 줄 수 있는 섬유가 바로 리넨이었다. 닿았을 때 시원한 느낌도 좋고, 입었을 때 바람이 솔솔 통하는 느낌도 좋았다. 이렇게 만난 리넨은 이제 내 삶 구석구석을 자리하고 있다. 내가 입는 옷, 내가 덮는 이불, 앞치마, 키친타월까지 리넨은 이제 뗄레야 뗄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리넨은 나를 잘 담아주는 편한 친구이다. 무더운 날 리넨에 나를 담고 휴식을 한다. 시원하고 까슬하면서도 부드러운 촉감이 나를 편안하게 감싸주면 무더위도 잊은 듯 잠을 청할 수 있다. 남편의 팔베개 부럽지 않은 편안함을 준다.
리넨이 만드는 여유롭고 자유로운 실루엣은 내가 감추고 싶은 부분도 우아하게 감춰준다. 군살만 가려주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지지 못한 실루엣을 만들어 내준다. 내 부족한 부분을 가려주고 모자람을 채워주는 고마운 친구다.
사람도 리넨 같은 사람이 좋다. 만나면 휴식이 되는 그런 사람. 내 삶에 청량감을 더해주고, 나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말없이 내 곁에 조용히 다가와 내 부족한 부분을 가려주기도 하고,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기도 한다. 그런 친구가 내게 주어진다면 인생의 큰 선물을 받게 된 것이다.
리넨을 좋아하다 보니 리넨이 가진 매력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었다. 마치 친구를 새로 사귀면서 그 친구의 새로운 매력에 듬뿍 빠지게 되는 과정 같았다. 그리고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리넨을 닮아가고 싶었다. 리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리넨의 매력은 빈티지함이다. 아무리 새것이라도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아마 인류가 가지게 된 가장 오래된 옷감 중 하나라서 그런 것 같다. 난 이런 빈티지한 멋을 좋아한다. 시골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처음 만나도 익숙한 느낌을 주는 그런 빈티지함이 좋다. 이런 빈티지함 때문에 리넨은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왠지 정겹고, 시골스럽지만 나름의 멋이 있는 사람들처럼.
리넨은 구김이 잘 가는 섬유지만 또 그게 매력이다. 구깃구깃한 구김이라기보다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구김이다. 리넨에 이런 구김이 없다면 아쉬울 것이다. 너무 반듯하게 구김 하나 없는 리넨은 왠지 어색하다. 그래서 차라리 구김이 좀 간 리넨이 더 멋스럽다. 내 얼굴에도 어느새 주름이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내 얼굴의 주름을 억지로 없앨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주름이 자리 잡도록 하고 싶다. 주름까지도 매력이 될 수 있는 그런 리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리넨의 또 다른 매력은 색감이다. 염색이 잘 먹지 않는 편이라 선명한 색을 내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리넨은 톤 다운된 색감이 많다. 그래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염색이 잘 되지 않는 만큼 오염도 잘 되지 않아, 오래 써도 때가 타지 않는 것도 리넨의 매력이다. 사람도 남에게 쉽게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지키는 리넨 같은 사람이 좋다.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힐 수 있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강직하게 지키는 린넨 같은 사람이 좋다.
리넨의 또 다른 재미난 매력은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리넨은 면보다 훨씬 질기고, 오래가는 섬유이다. 내구성이 면보다 훨씬 좋기 때문에 오래 입어도 늘 처음 같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가정에서는 리넨 천을 가보로 후대에 물려주는 일이 낯설지 않다고 한다. 놀라운 건, 면은 3-5년을 사용하면 마모 감을 보이지만 리넨은 3년 이상 사용해야 그 진가를 발휘한다고 한다. 세탁을 하면 할수록 더 부드러워지고, 사용하면 할수록 더 유연 해지는 것이 리넨의 매력이다. 까칠하던 나도 세월이 지나 리넨처럼 부드러워졌을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오래도록 같이 있어도 처음처럼 한결같고,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더해지는, 부드럽지만 단단함이 함께하는 리넨 같은 사람이 좋다.
리넨은 단지 필요에 의해 사용하는 옷감이 아니다.
나에게 편한 휴식 같은 친구가 되어주고, 나에게 사람됨을 가르쳐 주고,
나를 감사함으로 채워주는 친구 같은 존재이다.
나를 편히 담아주고 내가 닮아가고 싶은 그런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