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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Mar 18. 2022

호주에서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은? 짜장면


 

호주에서 산 지 15년이 되었다. 결혼해서 사이판에서 4년 반을 살고 호주로 왔으니, 이민생활이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20년 차 이민자라고 하지만 아직 내 인생의 반 이상은 한국 몫이라, 난 여전히 한국이 그립다. 남편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이판으로 이민을 간 사람이라 이미 자신의 생애 반 이상을 해외에서 살았다. 그러면 이제 해외 생활이 편하기도 하련마는 남편은 늘 한국을 그리워한다. 집에선 늘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끓여 먹고, ‘한국인의 밥상’, ‘한국 기행’ 같은 프로를 즐겨 보며 한국의 향수를 달래곤 한다.

 

아무리 달래어도 늘 생각나고, 채워지지 않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짜장면이다. 내가 사는 골드코스트는 호주에서도 시골에 가까운 곳이라 제대로 된 짜장면 집이 없다. 일부러 차를 타고 한 시간을 운전해 브리즈번까지 가서 짜장면을 사 먹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먹는 짜장면 맛의 반에도 못 미친다. 그래서 급기야는 유튜브를 열심히 뒤져서 간짜장이며 짜장 만드는 비법을 섭렵해 집에서 짜장면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이렇게 한 달에 두어 번은 짜장면을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서 시켜먹는 짜장면 맛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릴 때 아빠가 시켜주신 짜장면은 내 인생 최애 음식이었다. 전화로 짜장면을 주문하고, 철가방 아저씨가 오기 전까지 느끼는 설렘은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설렘보다 더 했던 것 같다. 흰 반점이 두둑이 박힌 옥색의 짜장면 그릇에 담겨온 반질반질 윤이 나는 짜장면은 너무나 신비로운 음식이었다. 철가방에서 비밀스럽게 나온 짜장면이 상 위에 올려지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곤 했다.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나무젓가락을 조심스럽게 떼어 짜장면을 비빌 때 느끼는 쾌감은 시험을 백 점 맞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기쁨이었다.

 

이런 짜장면을 20년째 그리워하고 있다. 단순히 내가 예전에 먹던 짜장면 맛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을 떠나 살면서 타지에서는 채울 수 없는 맛에 대한 욕구불만 때문인 걸까?


나의 ‘고향의 봄’에는 짜장면이 나온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가 아니고 ‘그 속에서 먹던 짜장면이 그립습니다.’이다. 짜장면을 두고서 ‘고향의 봄’ 생각이 난 걸 보니 마치 ‘고향의 봄’을 그리워한 홍난파 선생님처럼 봄과 같던 어린 시절 짜장면과 함께 했던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 주말이 되면 아빠는 가끔씩 짜장면을 시켜주셨다. 그렇게 짜장면을 먹는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시켜 먹는 짜장면 한 그릇이면 그동안 감당해야 했던 부족함들이 모두 채워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곤 했다. 동생과 다투고도 금방 화해를 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 야단맞은 일들도 말끔히 잊혀졌다. 끓여 놓은 죽에 무말랭이 김치만 먹고 지낸 며칠도 짜장면 한 그릇으로 충분히 보상되었다. 짜장면은 날 행복하게 해 주고, 내 부족함을 채워주는 신기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해버렸다. 이제는 먹을 게 남아도는 세상이 되었다. 음식 쓰레기가 넘쳐나고, 먹을 게 너무 넘쳐 먹기도 전에 배부른 세상이 되어버렸다. 배고팠던 시절 부족한 내 마음의 빈구석을 채워준 짜장면 같은 음식이 이제 더는 없는 것 같다. 한 그릇만 먹어도 모든 게 풍족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음식이 이제 더는 없는 것 같다. 짜장면 한 그릇에 행복했던 그때처럼, 짜장면을 먹으면 그때 느낀 행복이 다시 찾아올 것만 같은 기대 때문에 짜장면을 더, 더 고파 하는 것 같다.

 

결핍은 갈구를 낳고, 갈구는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추억을 소환한다. 진정한 짜장면 맛에 대한 결핍이 짜장면에 대한 갈구를 만들고, 그 갈구 때문에 짜장면을 즐겨 먹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고, 그 그리움은 부족함 속에서도 풍족했던 내 추억들을 소환해 주었다.

결국 결핍은 아름다움을 낳았다. 짜장면이 내 아름다운 추억들을 소환해 주었으니 말이다.

 

올해 말쯤에는 다시 한국을 갈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 가면 내가 그리워했던, 짜장면을 만나 보리라. 짜장면을 만나면 소중히, 아껴 먹어 보리라.

 

<사지 출처: planerat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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