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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Mar 02. 2022

Cressy house를 추억하며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무렵 내 인내심의 한계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마다 여행을 즐겨 왔는데 코로나 이후 가까운 시드니 동생네 집도 못 가고 있었다. 아직 내가 사는 퀸즐랜드(Queensland)는 그나마 하루 확진자가 두 자리를 넘어가지는 않고 있어 주말이면 가까운 산에도 올라가고, 근처 바닷가에도 갔지만 어딘가 멀리 훌쩍 떠나는 여행이 무척 고파 있었다. 그러던 중 그동안 가보지 못한 호주의 섬 ‘태즈매니아(Tasmania)’를 가보기로 했다. 태즈매니아는 확진자 수가 연일 ‘0’ 명을 기록하는 코로나 청정 지역이라 비교적 여행하기 안전했고, 퀸즐랜드 주민들은 태즈매니아 방문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멀리 떠나는 여행이라선지 우리 가족은 모두 들떠 있었다.

 

 우리는 먼저 호수의 도시라 불리는 호바트(Hobart)에 짐을 풀었다. 하필 우리가 도착한 날은 11월 사상 70년 만에 제일 추운 날을 기록하며 멀리 보이는 산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호주 본토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꽃들이며 나무들에 신기해하며 거리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눈이 내려 얼어버린 도로로 진입 금지였던 웰링턴 산(Mount Wellington)은 한낮이 되자 눈이 녹아 통제가 풀리게 되었다. 오후 늦게  산에 올라가 우린 퀸즐랜드에선 보지도 못한, 여름엔 더더욱 볼 수도 없는 눈 구경까지 할 수 있었다. 호주에서 처음 본 눈에 신난 두 아들과 남편은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고, 누군가 만들어 놓은 눈사람 옆에서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호바트에서의 3일을 뒤로하고 우리 가족은  론세스턴(Launceston)으로 향했다. 우리가 머무를 곳은 론세스턴에서 25분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크레시 하우스(Cressy House)라는 곳이었다. 지어진 지가 200년 가까이 된 곳이기도 하고, 팜스테이(farm stay)도 할 수 있는 곳이라 가는 내내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집주인이 알려준 주소에 도착했을 때 우린 어안이 벙벙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도 없이 펼쳐진 커다란 길과 길 양 옆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근엄하게 뻗어 있는 나무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숙소가 나오겠구나 생각되었다. 입구와 길 곳곳에는 ‘아이들과 동물들이 뛰어놀고 있으니 천천히 운전해 주세요’라는 푯말과 시속 20km로 달리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덕분에 우린 천천히 차를 움직여서 가는 길 내내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갈 수 있었다.

 

 크레시 하우스는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360도로 펼쳐진 녹음 가득한 풍광에 우린 넋을 잃고 말았다. 어느 유럽 시골 마을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 있는 집이 길 끝에 따뜻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닭과 꿩이 작은 헛간에서 뛰어나오고 오리들도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정겨운 돌담 옆에 심긴 커다란 레몬 나무에는 레몬이 주렁주렁 늘어져 있다. 문 앞에는 큼지막한 솔방울을 주어 담아 놓은 작은 손수레도 보인다. 동화 속 나라에 잠시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현관문을 열자 착각이 아니라 정말 동화 속 나라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들어 온 것 같았다. 집 안 가득한 백합의 향에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이다. 주인이 한 다발 꺾어 우릴 위해 담아 놓은 것이다. 소담스런  백합들이 놓인 식탁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사소한 그릇 하나에도, 창가에 놓인 소품들 하나에도 정성이 담겨 있었다.

오늘 아침에 닭장에서 가져온 달걀이라며 달걀 5개가 가지런히 담겨 있는 바구니 속에는 그 해 수확한 오렌지를 말렸다며, 말린 오렌지가 담긴 유리병도 들어 있었다. 티로 우려내어 마시라는 작은 쪽지와 함께 말이다. 농장에서 직접 양봉한 꿀도 앙증맞은 꿀병에 담겨 있었다. 갓 구운듯 한 커다란 사워도우 (sour dough)도 또 다른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농장에서 직접 만든 버터와 잼도 예쁜 그릇에 담겨 있었다. 동화 속 농장에 들어와 꿈같은 선물들을 받은 느낌이었다. 집 안 곳곳에서 주인의 향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멋스러운 리넨 재질의 이불 커버 하나에도 주인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고, 집 안에 비치된 샴푸와 비누는 모두 친환경 제품들이라 자연을 소중히 하는 사람 이리라 생각되었다.

 

짐을 풀고 농장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모든 것이 노란색으로 물들고, 햇살을 받은 커다란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남편과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었다. 두 아들은 닭장 구경도 하고 매일 달걀을 꺼내어 먹으라는 주인의 말을 듣고 달걀 찾기에 여념이 없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조그만 비석이 세워져 있다. 무덤이었다. 출생하고 사망한 연도를 보니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인데 30대에 요절한 것이었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도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슬프게 다가왔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일찍 잠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자기가 살던 땅에 묻힐 수 있어서 행복했으리라 생각되었다.

 

무덤을 지나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니 말 두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우리가 다가가도 낯설어하지 않고 풀을 뜯는다. 당근을 몹시도 좋아한다고 주인이 팁을 주었기에 당근을 한 봉지 사서 주니 정말 우적우적 잘도 먹는다. 말이 당근을 씹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새소리와 어우러지는 당근 씹는 소리가 마냥 즐겁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몸을 녹였다. 그때 침대 한편에 놓인 예쁜 책들에 눈이 갔다. 머무르며 둘러보면 좋을 곳들과 하면 좋을 경험들을 잔뜩 써 놓은 책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머무는 동안은 우리가 농장의 주인이니 농장 구석구석을 즐기라고 했다. 농장에 있는 모든 과일 나무의 열매는 다 따서 먹어도 좋다고 했다. 혹시나 사고로 집안의 용품이나 집기들이 망가져도, 괜찮으니 걱정 말고 알려만 달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무척 놀랐다. 여행을 다니면, 특히 이런 숙소에 묵게 되면 반드시 보증금을 지불한다. 그 보증금은 머무르는 사람이 망가트릴지도 모를 집안 살림과 훔쳐갈지도 모를 물건들에 대한 보증금이다. 보통은 20만 원가량의 보증금을 지불해야 숙소를 예약할 수 있었는데, 이곳 크레시 하우스에는 그런 보증금이 없었다. 사람을 믿고, 일어날 수도 있는 사고에도 여유롭게 대처하는 주인의 사람됨이 느껴졌다.

 

이 즈음이 되니 정말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주인은 자신을 3대가 함께하는 농장을 돌보고 , 살림을 하는데 여념이 없는 세 아이의 엄마라고 책자에 소개해 놓았는데 그런 평범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집안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주인은 어떤 마음으로 팜스테이를 하게 되었을까? 돈을 바라고 한 것 같지는 않았다. 1200헥타르에 가까운 이 땅에서 가축과 농작물을 키우며 버는 돈 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굳이 왜 팜스테이를 하는 것일까? 이런 낙원 같은 곳에서 3대가 모여 재미나게 살면 되는데 왜 굳이 외부인들을 이곳에 묵게 했을까?

 

생각을 해 보니 답은 하나였다. ‘사랑’과 ‘나눔’이었다. 좋은 것을 혼자만 가지고 즐기기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 ‘나눔’은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신이 즐기는 이 낙원과 같은 곳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품 하나하나가 마치 내가 아끼는 물건을 몽땅 가져다 놓은 듯 예쁜 것들이었고, 자신이 머물 집인 것처럼 집안을 예쁘게 꾸며 놓은 것이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묵고 가는 사람들의 실수에도 너그러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실은 둘째 녀석이 설거지를 하다 값비싸 보이는 샴페인 잔을 하나 깨뜨려 주인에게 연락했는데,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다만 가라며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고맙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크레시 하우스에서 머물렀던 시간들이 쉽게 잊히질 않았다. 그곳에서 즐겼던 아름다운 풍경과 새소리보다는 만나지도 못한 주인에게서 느낀 삶의 철학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가 내게 ‘사람들과 나누는 삶만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니 너도 그렇게 살길 바란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동화 속 낙원 같은 곳은 ‘나’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모두’를 위한 곳이었다. 좋은 것은 조금 남겨두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몽땅 꺼내어 베푸는 관대함을 나에게도 일깨워 주었다.

 

여행은 우리를 깨닫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살찌운다추억하면서 그곳에 다시 머물게 되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Cressy house를 추억하며 다시 한번 마음이 따뜻해 진다.

 

 <사진, 동영상: 나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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