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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Mar 21. 2022

호주에 살면 엥겔지수가 높아지는 이유

추억을 사고, 향수(鄕愁)를 사다



독일의 통계학자 엥겔은 연구를 통해 가계 소득이 높아질수록 식료품비의 비중이 감소한다는 가계 소비의 특징을 발견했고, 가계의 생활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엥겔지수‘를 사용하였다.

엥겔지수란 일정 기간 가계 소비지출 총액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이다. 이 통계학적 분석은 어디에서나 유효한 걸까?


몇 년 동안 가계부 앱을 깔고, 가계부를 열심히 썼다. 처음 가계부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전 시간 직장을 다니던 남편이 갑자기 일주일에 이틀을 일하기로 하고 일을 줄였기 때문이었다. 수입이 거의 반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좀 더 현명한 지출을 위해 가계부를 쓰기로 했다. 지출 항목을 적어나가다 보니 뜨끔하고, 아차 하는 순간이 오게 되고, 그런 충동구매로 인한 지출은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줄어든 수입 내에서 계획된 소비를 하고, 외식은 한동안 하지도 않았다. 정말 기분을 내기 위해 외식을 할 때도 가격이 착한 식당을 고르고 골라 외식을 했다. 마트 전단지를 열심히 공부해 가며 반값 할인 상품이 아니면 사지도 않았고,  포인트와 쿠폰을 모으는 데는 달인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이런 생활이 힘들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빠에게서 투철한 절약 정신을 가르침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아빠는 화장실 갈 때 휴지는 두 칸 이상 쓰지 못하게 하셨었고, 사용하지 않으면서 불을 켜 놓으면 매로 맞았다. 사용하던 물건들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사용해야 해서 내 필통은 늘 몽당연필에 볼펜대 꽂은 연필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아껴서 사는 게 힘들기보다는 뭔가 당연한 일이었고 지지리 궁상이라기보다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적은 수입으로도 잘 살 수 있다는 뿌듯함이 더  컸기 때문이다. 2년 정도를 이렇게 살다가 남편은 다시 일주일에 삼 일로 일을 늘였다.


 수입은 늘어났지만 지출 습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계부를 보다 보니 국민학교 사회시간에 배운 엥겔지수가 생각났다. 우리 집 생활 수준은 엥겔지수로 어떻게 평가받을지 궁금해졌다. 지난 몇 년 간의 엥겔지수를  살펴봤더니 수입은 늘어났는데 엥겔지수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높아졌다. 남편과 나는 먹는 데만큼은 아끼지 말자는 주의라 수입이 늘어나니 좋은 식재료를 구입하는데 지갑을 쉽게 연 것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하지만 수입 상승을 놓고 보지 않고서도 엥겔지수는 매우 높았다. 지출 항목 중에서 우리 집은 식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단연 높았다.

왜 그럴까?

이유는 단 하나, 내가 호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호주에 살면 왜 엥겔지수가 높은지 궁금할 것이다. 조금은 서글프기도 한 이유인데, 호주에선 먹는 게 매우 중요하다. 나 같은 한국사람들에겐 말이다. 사시사철이 따뜻한 기후다 보니 옷도 여러 벌 필요가 없다. 한국처럼 다른 사람도 의식할 필요 없고, 다들 제 멋에 사는 사람들이라 화장도 잘 안 한다. 가끔 선크림 바르고 다니는 게 다일 정도다. 문화생활을 즐겨보려 해도 제대로 된 공연을 찾기란 힘들다. 이렇다 보니,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해서 살게 되고, 먹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돈을 쓸 곳이 먹는 데 밖에 없다. 마치 삼시 세끼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자연과 어우러져 단순하게 생활하다 보니 먹는 게 정말 중요해지고, 타지에 살다 보니 더더욱 한국의 맛을 그리워하며 비싸도 한국 식재료를 구입하게 되었다. 아줌마들 카페에 한국 식품들 공구가 뜨는 날이면 댓글이 몇 백 개가 달리고, 어떨 땐 합격자가 발표되기도 한다. 공구 쟁탈전에서 합격자와 불합격자가 존재할 정도로 한국 식품 구입에 모두들 열을 올린다. 이렇게 비행기 타고 건너온 좋은 한국 식자재들은 비싸지만, 비싸도 구매할 수밖에 없다.


외국에 살면서도 외국 입맛이 되지 못하고, 한국 입맛을 고수한 까닭에 엥겔지수가 높은 것이다. 엥겔지수가 가계의 생활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라는 엥겔의 분석은 호주에서만은 아닌 것 같다. 호주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한국 식품을 산다기보다 향수(鄕愁)를 사고 있고,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입맛을 사고 있고, 그리운 가족과 먹던 추억을 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단순히 식품비 항목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도 올라온 공구 글엔 이런 문구가 있다.

"어린 시절 한때 쥐포의 노예로 살았을 정도로 쥐포를 좋아했었는데.. 그때 먹던 그런 쥐포 맛이에요. 도톰도톰한 쥐포예요."


"어릴 적 리어카에서 많이 본 이젠 추억이 된 서울 극장 앞 주전부리 장족이에요!"


"자극적이지는 않으나 자꾸 생각나는 소스 맛이에요. 엄마가 해주셨던 홈메이드 건강 떡볶이의 추억이 돋으실 거예요."


적어도 호주에서 만큼은 지출 항목에 ‘추억 항목‘을 추가해야 할 듯하다. 나는 호주에서 추억을 사고, 추억을 먹는, 향수(鄕愁)를 사고, 향수를 먹는, 엥겔지수 높은 한국인 가정에 살고 있다.


<사진: scih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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