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와 20년 째 데이트 중

by 나무향기

한 남자와 산 지도 20년이 되었다. 이 남자를 처음 만난 곳은 서울대입구역. 우린 007 소개팅을 했다. 서로의 인상착의도 잘 모른 채 그냥 알아보기. 목소리만 듣고 약속을 잡은 터라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못 알아보면 인연이 아닌 게지 생각했다. 늘 사람이 북적이는 서울대입구역에서 난 용케도 그 남자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잠자코 있었다. 그가 날 알아볼지가 궁금해서 멀리서 그의 동태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내 쪽으로 걸어온다. 날 알아본 것이다. 점점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온다. 선한 눈매에 다부진 입.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조심스러우면서도 활기차다.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넨다.

“혹시 ***씨 시죠?”

“네 ^^.”

일단은 합격이다. 날 알아봤으니까. 난 제법 외모에 신경을 쓰고 나왔는데, 이 남자, 무척이나 털털한 것 같다. 아는지, 모르는지, 점퍼 뒤쪽이 좀 찢어졌는데 그걸 그냥 입고 나온 것 같다. 뭐, 남자는 좀 털털해도 괜찮다. 패스. 한참 두리번거리더니 가까이 눈길이 닿는 찻집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이 분, 주도면밀하진 못한 것 같다. 나 같으면 서울대입구역 근방을 좀 조사하고 나왔을 것 같은데 그냥 와서 우연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 같다.


다행히 찻집엔 사람이 별로 없다. 조용히 이야기 나누기 좋은 곳인 것 같다. 마주 앉아 얼굴을 정면으로 보니, 이 분, 웃을 때 이가 무척 가지런하다. 내가 자기 이만 바라보는 걸 눈치라도 챈 듯,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린다. 아뿔싸. 얼굴의 모든 곳에 시선 처리를 균등히 해야겠다 생각하고 다시 시선을 눈으로 돌렸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좋아하는 것이나, 관심 있는 분야가 비슷하다. 말이 끊기지 않고 계속 잘 흘러간다. 생각보다 뭔가가 잘 통한다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난데없이 자기 몸에 난 흉터를 보여주고, 흉터의 역사를 설명해 준다. 이건 뭔 상황인가? 당황스러울 즈음 자기 몸에 난 흠부터 알려줘야 맞을 것 같아서 그런다고 한다. 굉장히 정직하신 분 같다. 자신의 치부를 아낌없이 초면에 드러내야 자신의 정직성의 잣대에 맞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신의 단점을 하나하나 열거하신다. 고해성사도 아닌데, 굳이 초면에 이렇게까지? 하고 생각할 즈음 자신의 단점에 대한 브리핑을 끝내신 것 같다.


이 분, 이제껏 내가 보던 남자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학교에서 주로 보던 남학생들은 다들 자기가 얼마나 난 분이신지를 어필하려고 퍽이나 애를 쓰던데, 이 분은 그 반대다. 콘 아이스크림을 혀로 돌리는 시간과 각도를 공대적 입장에서 해석하면 무슨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공대생, 이런 행동은 헌법 제 몇 조, 몇 항에 근거해 볼 때 이러이러하다고 설명하는 법대생, 길을 걸어가면서도 작곡의 영감을 얻어 무슨 곡을 작곡했다는 작곡과생... 이런 남자들만 보다가 자신의 치부를 자랑인 냥 초면에 드러내시는 이 분을 보니 신선했다. 무척 인상적이었다.


추운 겨울, 한 달 간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그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락을 좋아하신다는 그를 위해 나는 마이클 런스 투 락 CD를 선물했다. 그 CD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에 눈물이 나더라며 메일을 보내왔다. 이 분, 눈물 흘리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였다.


우린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장거리 연애를 했고, 1월에 만나 그 해 12월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한 지 20년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혼자 살아온 햇수가 결혼해서 같이 산 햇수보다 많아선 지 나는 이 남자가 늘 새롭다. 하긴 어제의 나도 오늘의 나와 다른데, 늘 새로울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할 수 있다. 아직도 내가 몰랐던 이 사람의 새로운 점들을 늘 발견하고, 내가 몰랐던 사소한 추억들이 우리의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되곤 한다.


우린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데이트를 한다. 데이트 시간을 따로 정해 두고, 아이들 없는 둘 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데이트라고 하면 뭔가 낭만적인 설렘이 연상되지만, 나에게 데이트는 그 사람을 진지하게 더 알아가는 시간이다. 남편과 데이트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낭만적이기보다, 이 사람을 더 이해해 가기 위한 흥미 있는 시간이다. 아직 더 알아 갈 게 많은 사람이라 우리에겐 이 시간이 꼭 필요하다. 같이 트래킹을 하거나, 동네 맛집을 찾거나,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며 서로를 알아 간다. 좋은 경험을 공유함과 동시에 그런 속에서 서로의 새로움을 찾아 간다. 알아 가는 시간에 꼭 서로의 좋은 점만 발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럴 때도 어떻게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지 의논하곤 한다. 남편은 말 수가 별로 없지만, 나와는 얘기가 무척 잘 이어진다.

서로 너무 비슷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서로 달라서 좋은 것도 아니다. 비슷한 건 공유하고, 다름은 인정하는 법을 서로를 통해 배워나갈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데이트는 나에게 그런 시간이고, 그래서 즐거운 시간이다.


오늘도 우린 땀을 뻘뻘 흘리며 짧은 산행 데이트를 즐겼다. 서로 다른 것을 어떻게 인정해 줄지는 아직도 배워가는 중이다. 그래서 이 남자와의 데이트는 아직도 설렌다. 서로를 더 알아 갈 수 있고, 서로를 인정해 줄 방법을 계속 찾고 있어 설레는 일이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적재의 "별 보러 가자"를 같이 들었다. 같이 살아도 서로의 생각이 문득 나고, 같이 살아도 별 보러 가자 데이트를 신청할 수 있는, 이런 남자가 옆에 있어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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