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이 체질인 남자

현대판 개미와 베짱이

by 나무향기

남편은 베짱이다. 배짱은 없는데 인생이 베짱이다. 난 베짱이와 결혼했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사람은 오래 겪어봐야 안다. 남편은 남에게 빌어먹지 않을 만큼만 벌어 베짱이처럼 사는 사람이다. 회사에서 높은 연봉을 제시해도, 더 높은 자리로 올려주겠다고 해도 모두 거절했다. 돈을 많이 받으면 회사는 자길 그만큼 부려먹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딱 베짱이로 살 만큼만 벌기로 했다고 한다.


베짱이 부인은 개미가 되어야 한다. 똑같이 베짱이로 살면 손가락 빨까 걱정되어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알뜰살뜰 절약하고 절약해 차곡차곡 모아 왔다. 베짱이 옆에 사는 개미도 좋은 점이 있다. 베짱이의 노래를 들을 수 있고, 베짱이가 놀 때 가끔 붙어 놀 수 있다. 난 원래 개미 족속인데, 베짱이 옆에 붙어살다 보니 개미 반, 베짱이 반인 인생이 되었다.


베짱이가 그러하듯, 남편은 음악을 좋아한다. 바이올린을 켜진 않지만 매일 기타를 친다. 청혼하던 날도 기타를 쳐 주었는데, 그 기타 소리를 이렇게 주구장창 매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퇴근 후에도 기타를 치고, 노는 날에도 기타를 치고, 아주 기타 소리에 인이 박혀 버렸다. 기타 치고, 산과 바다로 놀러 가고, 맛있는 거 먹고, 탁구를 치는 게 그의 낙인 것 같다.


'난 왜 이렇게 노는 게 좋지? 난 한량이 체질인가 봐. 헤헤헤.'


좋겠다. 한량이 체질이라. 하긴 돈도 많고 시간 많아도 놀 줄 모르는 사람도 많고, 쓸 줄 모르는 사람도 많다. 다행이다. 적은 돈으로 잘 노는 것도 기술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했던가? 한량이 체질인 아버지 밑에 자란 나의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취직을 했다. 한국에선 대학 안 가면 난리가 나는 줄 아는데, 다행히 호주는 난리 안 난다. 아들은 꽤나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호주 수능을 치고서 점수를 잘 받아 전액 장학금을 제시한 대학도 있었다. 녀석의 성적이면 좋은 대학 의과 대학 진학도 문제가 없었는데 녀석은 대학에 가지 않았다. 공부가 체질이 아니라고 한다. 체질은 아니라도 재능은 있어 대학생을 과외하기도 했다. 한국 엄마들 사이에서 잘 가르치는 과외 선생으로 입소문이 나 러브콜이 쇄도했지만, 취업 후 하던 과외마저 모두 끊었다.


아들도 쓸 만큼의 돈만 벌어 아빠처럼 한량으로 살 길 바라는 것 같다.


'엄마, 일은 일이에요. 아무리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도 직업이 되면 더 이상 좋아할 수만은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하면 되고, 난 맘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데 취직할 거예요.'


너무 일찍 한량의 맛을 알아버렸다.


둘째는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녀석도 노는 걸 좋아하니 이쯤 되면 한량 패밀리로 불려도 좋을 듯하다. 내 생애 돈으로 호강하는 일은 글렀다. 내가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수 없고, 때론 불편을 감수해 가며 살아야 하지만 한량의 삶이 나쁘지만은 않다. 적은 돈으로도 생을 즐기기엔 충분하다. 욕심부리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소박한 한량의 인생도 즐겁다.


유일한 개미인 나는 점점 베짱이화 되어가고 있다. 그들의 노랫소리에 즐거워하고, 베짱이들과 함께 산과 바다로 놀러 다니기도 한다. 한량이 체질인 그들은 개미가 삶을 쉬엄쉬엄 살아 가게 도와 주고 있다.


<사진 출처: merinda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