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핀(Phosphene)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어느 날이었다. 엄마한테 억울하게 매를 맞은 난, 속상해서 이불을 덮어쓰고 베개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우는 소리가 나면 또 맞을 게 뻔해, 베개에 파묻힐 울음을 쏟아내었다. 눈물은 베개가 다 닦아주었고, 남은 눈물을 짜내듯 두 눈을 꾹꾹 눌렀다. 그때, 뜻밖에도 감은 내 눈앞에는 커다란 우주가, 오로라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우주가 펼쳐졌다. 너울거리는 섬광, 반짝이는 갖가지 색의 별들, 형체를 알 수 없는 떠도는 모양들... 너무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울고 있는 나를 위해 누군가가 보내준 위로의 선물 같았다. 우주선을 타지 않고서도 눈앞에 우주가 펼쳐지는 이 신기한 경험에 어린 나는 내 눈 안에 우주가 담긴 것이라 오랫동안 믿었었다.
이런 신기한 경험 이후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난 다시 이불속 암흑을 찾았다. 그 암흑 속에서 내 두 눈을 누르면 어김없이 눈앞에는 우주가 펼쳐졌고, 그 우주는 늘 나를 위로해 주었다. 마치 위로 버튼이라도 켜듯 두 눈을 누르고 눈 속의 우주와 마주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내 눈 속 우주를 따라갔다. 눈동자를 굴리면 별빛도, 섬광도, 알 수 없는 기하학적 형체들도 계속해서 변해 갔고, 마치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여행하듯 이름 모를 별들과 빛들과 신비한 무늬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그런 우주여행 속에서 내 모든 고민들을 지울 수 있었다.
눈 안에 나만의 우주를 갖고 있다는 것은 신비스러운 비밀이었다. 두 살 어린 동생에게만은 이 비밀을 털어놓았다. “비밀인데, 내 눈 안에 우주 있다.” 혹시 동생도 눈 안에 우주를 갖고 있냐고 물어봤지만, 무심한 동생은 아무것도 안 보이고, 눈을 감으면 깜깜하기만 하다고 했다. 어리숙한 동생의 대답에 나는 나만 이런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줄 오랫동안 착각하며 살았다. 시간이 지나 그것이 '포스핀(phosphene) 현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나게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나만 가진 놀라운 재능인 줄 알았는데, 누구나 겪는 현상이라는 걸 알고 몹시 실망했다. 그래도 어렸을 적 이불속에서 눈 안의 우주를 보고 위로를 받았던 그 시간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젠 더 이상 속상하거나 괴로울 때 이불 속에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눈 안의 우주를 찾지 않는다. 나의 위로 버튼이던 두 눈을 누르면 눈만 아프다. 어렸을 땐 그리도 잘 보이던 우주가 이젠 보이기도 전에 통증으로 다가와 눈을 누르는 일은 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직 깨끗하고 맑은 밤하늘을 늘 감상할 수 있는 이곳 호주에선 마음만 먹으면 밖으로 나가 언제든지 별구경을 할 수 있다. 어릴 적 내 눈 안에서 보았던 우주만큼은 아닐지라도, 아름다운 별들이 소복소복 박힌 밤하늘을 즐길 수 있다.
그래도 별구경을 제대로 하고 싶을 땐, 동네 산에 올라가 별구경을 한다. 사람도 없고, 사람이 만든 불빛도 없고, 신이 선물한 달도 없는 밤에,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을 구경하는 일은 나이가 들어버린 나에게 또 다른 위로가 된다. 오로라가 나타나길 소망하며, 떨어지는 별똥별도 구경하며, 까만 밤하늘의 우주를 즐기는 것이 나의 위로가 되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까만 하늘 위, 하얗게만 보였던 별들도 다 제각각의 색을 지닌 별들임을 알게 된다. 오래도록 보고 있으면, 어떤 별은 주황빛이고, 어떤 별은 초록빛이고, 어떤 별은 붉은빛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어떤 별은 꺼질듯한 빛이고, 어떤 별은 그 수천 배는 밝아 보이는 빛을 간직한 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하나하나의 별들에 집중하다 보면 내가 가진 근심과 내가 가진 불안들이 다 사라지고, 별을 눈에 담는 순간의 희열만 남게 된다. 어릴 적 내 눈 안의 우주 속 별들이나, 지금 내가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들이나 똑같이 아름답고, 위로가 되는 존재들이다.
사람도 그런 별과 같은 존재이다. 굳이 두 눈을 누르지 않아도, 굳이 산에 올라가 밤하늘의 별들을 찾지 않아도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별을 찾고, 아름다움을 찾고, 위로를 찾을 수 있다. 나의 우주는 멀리 있지 않았다. 내 눈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우주처럼 나의 우주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 있었다. 각자가 서로 다른 색으로 서로 다른 빛으로 존재하고 있어도, 우리 모두는 빛을 내는 별들인 것이었다. 별들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우주에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그 우주를 보지 못하고, 그 별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위로의 별들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내 곁의 사람들이 나의 우주 속, 나를 위로해 줄 별들이다.
밤하늘의 별을 세듯, 내 주위 소중한 이들을 세어 본다.
밤하늘의 별들을 마주하듯, 내 주위 소중한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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