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고양이의 수염과 나비의 더듬이가 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나의 안테나는 때론 나를 힘들게 한다. 모든 소리를 감지하는 일은 때론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지지직거리는 라디오의 주파수를 잘 맞춰보려고 톱니바퀴 모양의 주파수 바퀴를 손으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안테나를 삼단 사단으로 늘여가며 라디오 소리를 들으려 애썼던 시절이 있었다. 늘어진 안테나 길이만큼 주파수는 쉽게 맞춰졌고, 좀 더 분명한 라디오 소리를 들을 수 있어 기뻐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안테나를 늘이지 않고도 알아서 주파수를 잡아주고, 노력해 들으려 하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너무나 분명한 소리들이 한꺼번에 들려 머리가 복잡해지기까지 한다. 내가 굳이 보고, 듣지 않아도 될 일들이 여기저기서 넘쳐나고 들려온다.
예술가들은 섬세한 감정만큼이나 예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난 예술가도 아니지만 감정이 섬세한 편이라 그만큼 예민하기도 하고, 그래서 상처도 잘 받는다. 다른 사람이 무심히 던진 한마디가 나에게 화살처럼 박혀버려 힘들 때가 종종 있다. 누가 날 '개복치'라고 알려줬다. 예민한 이 물고기는 조그마한 상처나 빛, 수질에 너무 예민해서 스트레스를 잘 받는 물고기이다. 내가 그런 개복치라니...
개복치이니만큼 난 고양이수염과 나비의 더듬이 같은 나의 안테나가 있다. 소위 말하는 '촉'이라는 게 있어 날 불편하게 하는 상황이 너무 잘 감지된다. 무디면 좋겠는데 내 더듬이가 자꾸 뻗친다. 뻗친 더듬이의 길이만큼 타인의 감정이 잘 감지되는 것은 좋다기보다 슬프다. 슬프다기보다 복잡하다.
사람은 참 솔직한 창조물이라, 말을 아무리 매끄럽게 해도 그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이 아니면 어디서든 오류가 발생한다. 오류가 없이 완벽히 연기해 내었다고 할 때라도 상대방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뿐이지 눈썹의 올라간 각도나 안면 근육의 불균형, 무의식 중에 하는 손짓과 몸짓을 통해 오류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 오류를 못 보고 지나치는 일반인도 있지만, 나같이 예민한 사람들은 손쉽게 그 오류를 인지할 수 있다.
모른 척 넘어가는 게 난 너무 힘들다. 아는데 모른 척하려고 하니 내 몸에 오류가 날 때도 많다. 그래서 어떨 땐 이 더듬이들을 모조리 떼어버리고 싶지만, 내가 장착한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작동하는 더듬이들이라 감지 버튼의 강제 종료가 힘들다.
그렇다고 내가 뭐 독심술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인간인데 어찌 상대방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만은, 적어도 오류가 난 상대의 모습은 인지할 수 있다. 이런 오류를 인지하고 감지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나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굳이 몰라도 될 상대의 감정을 읽어내는 더듬이를 잡아떼고 싶을 때가 있다. 모르고 지나칠 수 있었으면 좋을 것을 괜히 알게 되어 나만 힘들다. 마치 연일 생중계가 되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이 너무 고스란히 매체들을 통해 전달되어 더 이상 보기 힘든 고통스러운 심정과 비슷할 것 같다. 굳이 몰라도 될 비인간적인 일들의 세세한 부면까지 알아버려 감정적으로 지치게 되는 상황과 비슷하다.
물론 사람을 대할 때 늘 더듬이를 내세우고 분석 모드로 돌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굳이 안테나를 세우지 않고서도 감지되는 것은 내가 막을 도리가 없다.
이런 안테나는 불편하기도 하지만 때론 좋은 점도 있다. 상대의 감정을 더 분명히 들을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초코파이의 정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안테나가 그쪽으로만 발달하면 좋겠는데 수고스럽게도 나의 안테나는 모든 상황에서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더듬이를 잡아 떼내고 싶을 때가 있다.
떼지 못할 것이라면 더듬이를 더 이상 세우지 말고 낮춰야 하는데 아직 난 그게 어렵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좋은 면을 보려고 노력하는 훈련은 아직도 나에게 어려운 수행이다.
개복치가 예민해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힘든 도전이다.
#동물학대 아님 주의 #사람도 더듬이 있다 #불쌍한 개복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