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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20. 2019

테오도라 #11 로마의 추억, 복대 내놔!

실제로 격은 1인 가족 고독사의 사회문제를 연재하다


추억

     

버스 안에서 유골함을 안고 가는 한 시간 내내 테오도라는 뜨거움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메시지를 전해오고 있었다. 그 메시지는 알 수 없는 애절함이었다. 억울함이었고 때로는 분노였다. 냉각을 거친 유골은 처음 안을 때는 분명 차가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뜨거워서 결국은 옆에 않은 친오빠가 잠깐 안아주기도 하였다. 채 1시간이 안 되는 이동 시간 동안에 오로지 그녀와의 추억만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별다른 추억이 없었다. 영국의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고 유럽 배낭여행을 하며 유럽 남자들, 특히 이태리 남자들이 잘생겼다고 한국에 가기 싫다고 한 기억이 났다.

     

주로 그녀가 젊고 아름다웠을 때였다. 인생의 덧없음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의 의미도 특별하게 다가왔지만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었다. 죽음이 끝인지 시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벽제의 추모공원에서 마지막 미사를 드리고 테오도라는 납골당에 영구 안치되었다. 평생 안치 계약서와 함께 계약서 작성을 하였다. 봉인 개방은 첫해는 년 4회, 두 번째부터는 년 2회 가능하다고 한다. 안치 후  마지막으로 간단한 묵념이 있었다. 이것으로 테오도라의 장례식은 완전히 끝났다. 허망한 마음을 뒤로하고 기다리고 있던 금색 버스에 다시 올랐다.

     

우리는 벽제 승화원 앞에서 내렸다. 나머지 일행은 다시 장례식장으로 향하였다. 거기에 차가 주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광주에 사는 여동생 내외와 함께 원당역으로 가서 전철을 타고 대곡역에서 경의 중앙선으로 환승하였다. 여동생 부부는 광주로 향하는 고속버스를 타려고 백석역으로 향하였다. 전철에서 자리를 잡고 앉기가 무섭게 피로가 몰려왔다.

 


복대 내놔!

     

경의 중앙선은 용문이나 덕소행이 아니었다. 서울역으로 가는 기차여서 중간에서 내려 다른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기차 안에서 문득 테오도라가 유럽여행을 할 때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벌써 10년도 넘었던 여행이었다. 유럽 여행은 친구들과 같이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녀는 친구와 오지 않았다. 같이 올 친구가 없었거나 일정이 맞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혼자 다니는 것이 편해서였을까? 어쨌든 그녀는 혼자서도 씩씩하고 용감하게 잘 다녔다. 쾌활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수줍어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수다도 떨고 커피도 마시며 술도 잘 마시는 아주 평범한 여자였다. 가끔은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상당히 현실적이었다. 우울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한 흔적도 보였다. 우울한 그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녀와 만나면 대화의 절반은 우울증 이야기였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우울증이었다. 하지만 우울증이 쉽지 않은 병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나였다. 별로 달갑지 않은 주제이기는 하지만 공통분모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그녀는 내가 이민 가기 전인 90년대 말에 한차례 자살 시도를 하였다. 남자문제로 괴로워하다가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자살을 시도한 후 너무 괴로우니까 나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사무실에서 근무 중이었다. 집주소를 물어서 119를 먼저 부른 후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서 위세척을 한 후 그녀는 다시 살아났다. 죽는다는 일이 얼마나 고단하고 괴로운 일인지 느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한 욕심은 버렸다며 여행도 하고 즐겁게 살 거라고 하였다.

     

이태리를 포함하여 유럽의 몇 나라를 배낭여행을 혼자서 하였다. 특히 이태리 민박집 골목에서 일어난 사건은 지금도 재미있는 추억이 되어 잊히지 않는다. 동양인, 특히 한국이나 일본 관광객들은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녔다. 물론 지금은 신용카드가 보편화되었다. 그래서 가끔은 소매치기나 동네의 잡범들이 박스 조각에 “복대 내놔”라는 한국말을 써서 지나가는 여자들이게 들이민다고 한다. 그 복대에는 여권과 지갑 등 주요 물품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동생은 복대를 차고 다니지 않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생은 활기차고 용기 있게 살아나가려고 노력하였고 실제로 그런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에 대한 회의가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삶도 중요하지만 보여주는 삶이 더 중요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답게 살고 자존감을 유지하며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쉽지 않다. 특히 직업 특성상 간호사는 더욱 힘들어했다. 아무튼 여동생에 대한 추억은 나의 이민으로 인해 거의 단절되어 버렸다. 내가 한국에 매년 한 번씩 왔다 가기는 하지만 만날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그만큼의 인식의 차이도 확연해지기 시작하였다.



퇴로 없는 퇴로

     

흔히들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이 되면 남자는 후기 청년기, 여자는 갱년기의 형태로 생체 리듬 자체가 달라진다. 호르몬의 변화가 주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무시해 버린다. 설사 알아도 대단한 것도 아닌데 하며 잊어버리기 일쑤다. 여자들은 남성 호르몬이 많아지면서 점점 강해지고 반대로 남자들은 여성 호르몬이 분배되면서 많이 약해진다고 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자들은 강해지면서 주도권을 차지한다. 남자들은 이 시기에 정체성의 혼란이 오면서 제2의 중2병을 겪게 된다. 아내와 아이들과의 대화가 점점 단절되면서 인간으로서의 고립감은 극에 달한다. 퇴로가 막혀버린다는 느낌은 끔찍하였다. 막다른 골목에 달한 느낌으로 매일매일을 살아낸다는 것은 문재가 아닐 수 없었다.

     

여동생의 사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인을 언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대로 사인불명으로 끝난다면 그것도 문제이고 슬픈 일이다. 떠난 자는 그렇게 떠나갔다. 이제 남은 자들은 남은 자들의 몫을 해내며 살아내야 한다. 외로움의 크기만큼이나 멍들어버린 가슴을 부여잡고 있어 봐야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가족과 회사 등 특정 목표를 위하는 삶에서 한발 물러날 필요가 있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를 생각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어도 괜찮다. 나마저 외면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여건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먼저이다. 나를 토닥여주고 나답게 살 수 있도록 나에게 응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 접한 충격적인 여동생의 죽음은 나를 돌아보게 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후기 청년들이 겪는 그 힘든 고통과 방황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나도 아직 그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자신과의 대화도 하고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줄도 안다. 나를 토닥여주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이처럼 중요한 일인지도 새삼 깨닫게 된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나를 다독거리며 나답게 살라고 응원하고 격려해준다. 전혀 보이지 않았던 퇴로는 그렇게 열어가고 있다. 나답게 산다는 의미를 계속 단순화시키고 있다. 의미 없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의미 있는 사소하지 않은 일까지 모두가 나였다. 그 의미들을 인정하면서 또 다른 나의 생각들과 끊임없는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랑한다

     

알고 있니? 벌써 5월이야!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어. 그 강렬한 향기는 살아있음의 몸짓이야. 너에게 100일 동안이나 내일이 오지 못하게 해서 미안하다. 멈춰버린 시계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하늘나라에선 매일 빠짐없이 너의 몫의 내일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5월의 아카시아는 그 진하고 강한 향기를 여지없이 뿜어내고 있다. 주렁주렁 매달린 하얀 꽃들은 탐스러운 포도송이처럼 보인다. 그 향기가 테오도라의 몸에서 나왔던 악취를 빨아드려 중화시켜주기를 바라본다.

     

오후 한 시에 장례식장을 출발한 버스는 양재 IC에서 긴 정체로 비상등이 깜빡이는 소리만 요란하였다. 왼편에는 현대와 기아의 사옥이 쌍둥이 빌딩처럼 붙어있다. 기아빌딩 옥상에는 생뚱맞게도 태극기가 홀로 나부낀다. 애국심이 대단한 회사다. 버스는 청계산 터널 우측 편에 서울 추모공원으로 가는 터널로 진입한다. 상당히 긴 터널이다. 터널을 나오자 마침내 추모공원의 화장장이다. 이미 한 대가 와 있었다.

     

화장을 마치고 일부는 집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다시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벽제의 납골당으로 향한다. 기사의 바로 뒷좌석에 놓인 테오도라는 보자기에 싸여있다. 나는 항아리가 깨질까 봐 벽제까지 테오도라를 안고 갔다. 화장 후 냉각과정을 거쳐 차가웠던 테오도라는 다시 열을 발산하기 시작하였다. 항아리는 점점 뜨거워졌다. 버스는 서울을 남북으로 관통하려고 애쓴다. 강변북로에 접어들고 나서야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벽제에 도착해서야 동생은 다시 싸늘해졌다. 버스에서 한 시간 정도 뜨거운 온기로 체온처럼 내뿜던 그녀의 몸짓들의 언어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테오도라가 오빠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15개월 전 마지막으로 만나서 택시를 타고 떠나가던 그때 커피숍에서 껌을 뱉어내듯 내뱉던 그 언어 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언어들은 슬픔이었고 외로움이었고 우울이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붙잡아주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속죄하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떠나버렸구나! 2번 화로 7호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너는 그렇게 떠나버렸다. 남겨진 자들은 무언가를 붙들고 살아갈 힘을 찾아 나설 것이다. 5월의 아카시아는 너무나 강렬하기만 하다. 물론 그 향도 조만간 너처럼 스멀스멀 어디론가 세어나갈 거야. 그래서 더욱 아카시아 꽃과 향이 서러워 보이는구나! 그 하얀 꽃송이들을 너에게 전하고 싶다. 향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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