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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23. 2019

하늘나라에서 좋은 친구는 사귀었니?

테오도라 #12. 너를 보내고 다시 100일을 맞이하며..

     


꽃들은 지고 여름이다

     


테오도라 야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지? 엊그제 네가 살던 상도동 집을 다녀왔단다. 텅 빈 공간에서 너의 흔적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남은 거라고는 하염없는 쓸쓸함뿐이었단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너를 다시 추억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개나리와 아카시아 꽃잎이 뭉그러지며 말라가고 푸른 잎이 진해질 무렵 너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5월의 장미가 몽글몽글한 작은 꽃망울을 만들어 갈 때쯤 너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숙제를 하나씩 남겨주고 떠나갔다. 기억나니? 오빠가 서초의 화장장에서 벽제의 추모공원까지 너의 납골함을 한 시간 동안 안고 갔단다. 그때 네가 뜨겁게 울며 설음과 분함을 말하는 걸 오빠는 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어. 아니 대답을 하면 너와 또다시 싸울까 봐 포기하고 말았다. 그냥 슬픈 척하는 편이 낳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벽제의 추모공원에 있는 천주 교실에 안치하고 나오는 것으로 장례절차는 마무리되었단다. 너를 두고 나오는 마음에는 미안함뿐이었단다. 그렇게 너는 휴식에 들어갔고 우리도 휴식을 위해 저녁도 먹지 않은 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네가 쉬게 될 추모공원은 새롭게 조성된 추모공원 이어서인지는 몰라도 건물 주변에는 예쁜 꽃들이 가득하였단다.


그중에서도 절정을 이루고 있는 꽃은 철쭉이었다. 철쭉이 그토록 진한 색상을 뿜어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단다. 향기는 약했지만 그 약한 향을 강한 색상으로 보완이라도 하려는 듯 그 철쭉의 향연을 잊을 수가 없다. 슬픈 사연들을 간직한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곳에서 그 꽃들은 너에게 활기를 주고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을 거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며 기다리고 있던 장례 버스에 올랐다. 그것으로 너의 장례식은 끝이 났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렇게 엊그제 갔던 일이 벌써 100일이 되어간다. 너의 49제 때에도 오빠는 가지 못했다. 아니 다시 너를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49일은 너에게는 긴 시간이었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사람이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존재를 잊기에는 49일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 마음에서 지우려고도 했단다. 커다란 지우개가 생각이 났단다. 초등학교 때 칠판을 지우던 그 지우개 같은 것으로 너를 지우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지우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결국 49제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계절은 벌써 여름의 정점에 와 있단다. 사람들은 휴가를 떠나느라 다들 분주한데 너는 오늘도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그곳에서 답답하겠구나! 네가 살아있었으면 같이 휴가를 떠나서 재미있게 놀다 올 수 있을 텐데 라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본다. 지금은 능소화가 지천이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백일홍도 벌써 한창이란다. 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네가 떠나던 날 본 철쭉이 나를 꽃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예쁜 꽃을 보면 네가 생각난다. 그렇다고 네가 꽃처럼 예뻐서가 아니다. 저 예쁜 꽃들도 며칠 지나지 않아서 시든다는 사실이 본능처럼 나를 슬프게 하는구나.

 

물론 백일홍이란 꽃은 100일 동안이나 피어있다고 한다. 하지만 100일마저도 결코 긴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꽃들의 운명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꽃만 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네가 떠나고 알았지. 어머니가 떠나셨을 때에도 선산 주변에 백일홍을 많이 심었단다. 물론 내가 직접 심은 것은 아니고 아버지를 졸라서 심게 하였지. 하지만 백일홍은 추위에 약해 겨울에 절반이 얼어 죽었더구나. 그때 살아남은 몇 그루의 백일홍 나무는 벌써 5년 동안이나 어머니 곁을 지켜주고 여름을 빛내고 있더구나.

     

나는 지금 20년 만에 한국의 여름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밖에서는 10분만 있어도 온몸이 땀으로 젖어서 한국의 여름을 미워하고 있단다. 하지만 여름이 오히려 글을 쓰기에는 좋은 계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씨가 더우니까 하루 종일 카페에서 살다시피 한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지내다 보니 여름도 벌써 절반이 흘러갔다. 조금 지나면 가을이 오겠지! 사실은 벽제에 매주 한 번씩 가고 있는데도 너에게 한 번도 가지 못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북한산 자락의 어느 마을에 가서 하루를 보내고 온단다. 너를 보내고 나서 새롭게 시작한 취미생활 중 하나가 생겼어. 바로 도예란다. 이제 겨우 물레질을 배우는 초보과정이지만 언젠가는 예쁘고 근사한 백자를 만들려고 시작했단다. 오빠의 꿈은 나이가 들면 흰머리를 흩날리며 하얀 백자를 만드는 것이란다. 물론 산자락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 터를 잡을 생각이란다. 그렇게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쓰고 싶은 글도 많기 때문에 외로움도 우울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빠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써서 너랑 밥도 마시고 백주도 마셨더라면 하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너를 보러 갈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도예를 배우는 곳에서 10여분 거리인데도 너를 외면하고 있단다. 그것도 매주 너를 외면하는 것도 고통스럽구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좀 더 마음이 넉넉해지면 그때는 자주 찾아갈 생각이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오늘은 월요일이어서 춘천에 왔단다. 그리고 너에게 이렇게 장문의 편지를 쓰고 있단다. 한 장의 편지가 아니고 한 권의 편지를 쓰고 있단다. 지금까지 태어나서 한 장의 편지를 써본 기억도 없는데 한 권의 편지를 쓰는 이유는 너에 대한 애틋함과 미안함 그리고 사랑 때문이란다. 살아있을 때 조금만 더 자주 연락하고 같이 힘들어했더라면 이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단다. 사람의 도리라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사실도 네가 떠나고서야 느낄 수 있었다. 가족도 마찬가지고 친구도 마찬가지로 서로 간의 도리를 하며 산다는 일만큼 쉬우면서도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한 인간의 고뇌가 그 사람만의 고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의 모든 업보를 다 짊어지고 끙끙대며 살고 있는 거 같다.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를 아무리 주지시켜도 나의 의지대로 살아지지 않는 게 삶이고 인생이라는 사실이 나를 서글프게 한다.

     

     


그 방법밖에는 없었니?

     

며칠 전에 네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더구나! 이제야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하면서 퇴근 후 만나서 소주 한잔 하자고 해서 오빠 퇴근시간에 맞춰서 여의도로 갔다. 우리는 오빠의 단골집인 고에 가서 아귀찜을 시켜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네가 가장 싫어했던 네 친오빠는 너를 가장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장례식 때도 그렇고 가장 많이 눈물을 흘렸고 슬퍼했던 사람이었다. 네가 떠나간 뒤의 뒷정리와 처리들을 도맡아서 하였단다. 물론 장남이자 가장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생전에 했던 말을 믿었던 나는 충격이었다. 네 오빠가 냉정하고 단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단다. 물론 네가 떠나고서 말이다. 너와 소통의 문제와 계속되는 언어의 충돌이 빚어낸 안타가운 관계의 단절을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은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네 친오빠가 가장 슬피 울더구나. 네가 떠난 뒤에도 몇 번 만났지만 네 이야기만 나오면 벌써 눈시울이 붉어져서 나도 울컥하게 되곤 하였단다.

     

아귀찜 중자를 시켜 놓고 우리는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소맥이라는 것을 만들어 먹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네가 떠난 후 뒤처리 문제였고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일들이 있었다. 최종 부검 결과 사인불명으로 나왔던 너의 사망원인도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단다. 하지만 그것은 경찰이 수사과정에서 네가 사망 직전 몇 개월간의 약 처방을 받은 것을 추정해서 최종 판단을 내린 것이라서 유족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망 조서 작성 시 25년 전의 네가 시도했던 수면제 과다 복용 사실을 토대로 이번에도 그런 쪽으로 결론을 낸 것 같아 씁쓸하였지만 이젠 그런 걸 따져서 뭐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그게 사실이어도 너를 원망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난해 1월 초에 내가 잠깐 한국에 왔을 때 나는 너의 축 처진 어깨와 자신감을 잃어가는 표정과 말투에서 너의 짊어진 짐을 보았단다. 그때 너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는 반쯤은 포기한 인생을 사는 우울증 환자처럼 보였단다. 그래서 여러 가지 충고 아닌 충고도 하고 희망 어린 말들을 던졌지만 너의 가슴에 와 닿지 않고 허공에 흐트러졌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느끼고 있단다. 세상만사가 귀찮고 아무것도 가치를 둘 수 없는 허무주의자의 얼굴에서 오빠는 깊은 슬픔과 넓은 아픔을 보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단다. 몇 마디 충고를 던지는 것으로서 오빠의 도리를 다한 것처럼 하고 말았지. 진심으로 너의 아픔과 힘듦을 나눠서 짊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단다. 아니, 사실은 하긴 하였지만 그것은 각자의 몫에 불과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단다. 누구나 자기만의 짐을 지고 무거우면 덜어내고 가벼우면 더 올리는 과정이 삶이고 그런 삶이 모여서 하나의 인생이 완성되어가는 걸로 착각했단다. 그때 오빠는 서울에서의 체류 기간이 3일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있었단다. 한 사람의 삶의 등불이 지속될 수도 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오빠 나이쯤 되고 오빠처럼 그 고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꾸 부정하려 드는 일에 스스로 괴로웠단다. 그래서 네가 쉬고 있는 벽제 인근에 가면서도 너를 찾아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거라 생각된다. 오빠는 이처럼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란다. 너의 친오빠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니까 이제라도 오해를 풀기 바란다. 오히려 네가 믿고 의지했던 사촌오빠인 내가 정도 없고 냉정한 사람이란다. 그렇다고 너에게 용서까지 빌고 싶지는 않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네가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처럼 오빠의 한길도 안 되는 마음은 그렇게 이기적이고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단다.

     

7시가 조금 안되어서 만난 너의 친오빠와의 술자리는 11시가 넘어서까지 지속되었단다. 우리는 너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4시간 동안이나 했는데도 할 이야기가 더 남아서 2차로 호프집에 갔단다. 반도 먹지 못한 아귀찜은 그대로인데 11시가 영업 종료 시간이라고 해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단다. 아귀찜 집에서 술이 조금 오르자 너의 친오빠는 여러 번 눈물을 보였단다. 네가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했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너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을까? 물론 너에게 잘해주지 못한 회환 때문일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사랑 없이는 그런 눈물은 절대 나오지 않는 법이란다. 그만큼 너의 친오빠는 너를 사랑했어. 막내 여동생으로서 너에 대한 애틋함과 안쓰러움을 이야기할 때마다 동생은 안경을 벗고 휴지통의 휴지를 꺼내야만 했다. 그 동생은 나와는 3살 차이가 난다. 오래전 내가 잠깐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그 동생은 신림동의 고시촌에서 몇 년을 지낸 적이 있었다.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서였다. 나는 직장인으로서 월급을 받았기 때문에 고시원비와 약간의 용돈 정도를 매달 지원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사법고시의 벽을 넘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동생은 지금 만나도 참 애틋하고 안타깝다. 물론 최고의 직장 중에 하나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지만 인간의 꿈이 좌절되는 아픔은 타인이 느끼는 것의 몇 배쯤 되는 무게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 동생을 만나도 안쓰럽다. 물론 동생은 나를 더 안쓰럽게 여길 것이다. 그것이 공감이고 교감이다. 동정과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동정이 완전히 배제된 공감이나 교감은 성립하기 어렵다.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생맥주 한잔씩만 더 하고 술자리를 파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맥주 한잔을 다 마셔가는데도 동생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곤란한 듯이 말을 꺼냈다. 테오도라가 살던 집은 방이 3개에 화장실이 2개인 집인데 계약이 내년 5월까지라서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동생도 법적인 문제들을 충분히 검토해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세입자를 받아들였다가 그 집의 스토리를 알면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것이다. 이사를 나가겠다고 하면서 이사 들어온 비용과 나간 비용은 물론이고 부동산비 그리고 심지어 정신적인 손해배상까지 청구할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가 발생해도 건물주는 배상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를 먼저 해왔다는 것이다. 참으로 무섭고 비정한 건물주였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계약서가 우선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면서도 법이라는 것의 속성이 그런 모야이었다.

     

그래서 동생은 좁은 원룸에서 살지 말고 그리 이사해서 내년 5월까지 살아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일단 테오도라의 집을 방문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그 집에 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동생을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집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다. 하지만 그 집을 방문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망설이는 중이다. 내가 테오도라를 사랑하지 않았던 이기적인 사촌오빠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다시 나를 괴롭혔다. 우리는 그렇게 호프집을 나와서 각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택시는 강변북로를 다렸다. 한강변을 끼고 달리는 택시 안에서 100일 전에 장례버스를 타고 테오도라의 유골함을 안고 가던 뜨거운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택시 안에서 내가 안고 있는 것은 검은색 가방이었다. 그런데 뜨거움이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소름이 돋아서 얼른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 속에 혹시라도 그녀의 납골함이 들어있으리라는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가방 속에는 노트북이 켜져 있었다. 그래서 뜨거웠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노트북을 켠 적이 없었다. 노트북을 켜려면 누군가가 노트북을 벌리고 우측 상단의 동그란 스위치를 눌러야만 가능하다. 자동적으로 눌릴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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