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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Sep 07. 2019

공감 한잔 하실래요? #0 그놈의 사주팔자...  

공감능력을 상실한 사회는 아프고 외롭다


그날 저녁 후배와 미사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로 전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한국인 관광객들이 참사를 당해 생사조차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술을 마시는 내내 나의 공감능력에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의심을 하고 있었다.

     

나의 평일은 반복되는 단순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그렇다고 휴일에 특별한 삶이 있는 것도 아니다. 5월의 마지막 목요일 아침, 기상과 동시에 샤워를 마치고 동네의 카페로 출근을 하였다. 직장인과 비슷한 시간부터 카페에서 나만의 일을 한다. 그날도 이층에서 전자책을 읽고 있었다. 아직 창밖은 어둠이 내리지 않아서 해질 무렵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있었다. 이 커피숍은 내 전용 사무실로 이용하는 공간이어서 집처럼 편하다. 아니 좁고 답답한 집보다 더 편하다. 목요일 저녁 7시 반쯤이었을 것이다. 그만 집으로 갈까, 아니면 조금만 더 읽고 갈까를 고민하던 차에 미사리에 있는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20년 전 내가 만든 봉사활동 모임에서 만난 후배였다. 지금도 벧엘의 집에서 같이 활동하는 그 후배로부터 술 한 잔 하자는 전화였다.

     

석양 무렵, 걸려온 전화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몸은 즉각 반응을 하고 있었다. 여느 때는 다음날 일정도 살펴보고 몸 상태도 체크한 후 연락을 주겠다는 식으로 즉답을 피해왔다. 하지만 그 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누군가가 불러주기를 고대하고 있었음을 들켜버린 그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후배와는 그런 걸 따질 사이가 아니었기에 숨길 것도 숨길만한 것도 없다. 편한 관계의 설정을 두고 세월마저도 그 간극을 희미하게 풍화시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리려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혼자 사는 사람의 화려함 뒤에 드러낼 수 없는 진한 외로움을 알아주는 이 또한 혼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 주섬주섬 짐들을 챙겨서 매일 책가방처럼 매고 다시는 검은색 Backpack에 넣었다. 커피숍을 나서자 택시들이 줄지어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대쪽 택시 승차장에는 더 많은 택시들이 줄지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숍 바로 앞에도 택시 승차장이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줄지어서 기다리는 맨 앞의 택시로 가서 뒷좌석에 타고 인사를 하였다. 행선지를 말하자 기사님은 일단 출발한 후 한강의 어느 다리를 건널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 나의 예상과는 달리 택시는 암사대교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은 땅거미가 남아 있어서 밝음 반 어둠반의 애매한 시각이었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시간에 택시는 암사대교 위를 달리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였는지 막힘이 없었다. 문득 강동대교 옆에서 몇 달 전 추락한 소방헬기 생각이 뇌리를 빠르게 스쳐갔다. 그 시각 나는 자전거를 타고 그 옆 한강변을 지나고 있었다.

     

암사대교는 반쯤 비어있었다. 순간, 택시 안에서 나도 모르게 강 아래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어둠 직전의 검푸른 강물을 바라보며 하루 전날 들려온 헝가리 다뉴브 강의 비보를 생각하고 있었다. 순식간의 사고로 한국인이 탄 유람선이 전복되면서 많은 관광객이 희생되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가족들이어서 더 안타까웠다. 30명이 넘는 인원이 전원 한국인이었다. 단 두 명만 헝가리인 승무원이었다. 뉴스로 접한 다뉴브 강의 강물은 흙탕물을 머금은 채 잔뜩 성이 나 있었다. 반면, 한강물은 아무 말이 없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희생자가 죽어가면서 느꼈을 그 고통과 공포를 잠시라도 생각해 보지만 그 고통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서글퍼진다. 하필, 오늘 후배를 만나 술을 마시러 가는 나의 행위에 잠시 마음은 주춤거리지만 이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에 절망하고 만다. 기껏해야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라는 사실은 차라리 현실적이다. 잠시 생각에 젖어드는 사이, 택시는 벌써 다리를 건너 미사리의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통화 후, 생각보다 내가 너무 빨리 도착해서인지 후배는 한참 후에야 조금은 당황한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다산과 미사는 한강을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라서 다리 하나만 건너니 바로 약속 장소다. 이렇게 지척인데,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술 한 잔 하자는 제의를 매몰차게 거절해온 게 미안해진다. 그렇게 후배와 저녁 겸 한잔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알코올은 20년 이상의 세월을 환기시키며 분위기를 잔뜩 고조시키고 있었다. 흘러간 세월 속에는 즐거운 추억들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슬프고 아픈 추억들이 더 많았다. 이상하게도 아픈 추억들과 즐거운 추억들의 중간쯤 되는 두리뭉실한 기억은 없었다. 


추억은 흑 아니면 백으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다른 원색들은 왜 추억에서 사라져 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인간 뇌구조의 역학관계상 그렇게만 기억될 리는 없을 것이다. 자극적이거나 선명하지 않은 추억들은 세월의 길이만큼 점점 무디어져 가서 희석되거나 증류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음날이 금요일이어서 우리는 2차에서 간단하게 생맥주 한잔씩을 더하고 일어섰다. 아주 약한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 비라고 불리기에는 애매한 빗방울들이었다. 어제 다뉴브 강에서 사고를 당해 죽어간 자들의 눈물처럼 느껴져서인지 나는 그 눈물방울들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을 길에서 서성이다가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다시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한강을 내려다보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 취기가 오른 술기운에도 나는 한강을 마치 범죄자처럼 강렬하게 째려보고 있었다. 택시의 뒷좌석은 포근하고 안락하였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 동안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어 졌다. 세월호 사건도 그렇고 이번 다뉴브 강 사건에도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인간이란 존재의 나약함과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 앞에서 자꾸 작아지는 인간의 모습에 신이란 존재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어이없는 사고를 접할 때마다 운명이란 것이 예정된 것인지도 혼란스러워진다. 단 한 번의 치명적인 사고는 운이라는 것이 없어서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여행 계획은 몇 번 변경이 되었다는 뉴스를 접하였다. 동유럽 저가 여행을 판매하는 여행사는 20명 이상이 되어야 패키지여행을 출발시키기 때문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원래 일정과는 다른 일정을 강요받다시피 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필 그날이 비극적인 마지막 날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여행사 관계자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강요를 하지는 않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저가라는 달콤함에 그 바뀐 일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항상 운이 좋아서 내일을 맞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그런지에 강한 의문이 들지만 그 또한 증명할 길이 없다. 패키지여행이 돈이 없는 사람들만의 여행 방식은 아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패키지여행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 와중에도 술을 마시고 내 할 일을 하는 나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도 한강 다리를 두 번이나 통과하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일까?


세월호가 출발했던 인천 연안여객 터미널 대합실

     

한강에게 물어보지만 강물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자기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이 주제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간 시점도 잠실대교의 1100번 버스 안에서였다. 삶과 죽음보다는 그것들과 연관된 운이나 운명에 초점을 맞춰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요즘 유튜브를 통해 사주팔자를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것이 정말 있기나 한지 궁금해진다. 사주팔자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날 그 시각에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 되고 만다. 세월호 사고 때 죽어간 단원고 학생들이 모두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도 너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사회계층과 계급이라는 안타까움이 숨겨져 있다. 내가 더욱 가슴 아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는 학교, 취업, 결혼은 물론 죽음까지도 양극화의 패러다임 안에서 피해를 보는 자와 혜택을 보는 자로 나뉜다는 점이다.

     

세월호가 출발했던 인천 연안여객 터미널 대합실


얼마 전 이른 아침에 무인도 체험을 위해 인천 연안여객터미널 대합실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세월호 이야기는 아직도 내 귓가를 맴돌고 있다. 사고 당일 날도 그 할아버지는 배가 출항하는 현장인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 있었다고 한다. 거기서 만난 수많은 학생들 중 한 명을 유독 잊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날 이른 아침 배를 기다리는 단원고 학생들 중 한 명과 내가 만난 할아버지 사이의 대화는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 학생은 용돈을 3만 원밖에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물가가 비싼 제주도에서 3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그날 아침을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마치 내가 사고 현장의 다뉴브 강의 다리를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듯이 말이다. 28년 전 대학생 시절 나는 그 다리 위에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지에서는 도나우 강이라고 불린다. 


그렇게 공간 속에 시간이 함몰되어 가고 있었다. 아니 시간 속에 공간이 함몰되어가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삶과 죽음에도 계층 간 불평등이 초래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조차도 사주팔자에 나와 있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모든 것은 “운명”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난 전직 대통령의 사례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오늘도 1100번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만약 이 다리가 붕괴되어 버스가 한강으로 추락한다면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답을 나는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강은 오늘도 입을 다문 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나약한 인간인 너 같은 존재가 감히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일종의 경고성 침묵이었다. 한강은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침묵할 수 없다. 살아있는 자로서, 살아남은 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안타까워하는 공감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오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는 잠실대교 위를 거북이처럼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다소 시사적이거나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어서 망설이기도 하였지만 살아남은 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글로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이 글이 나올 수 있도록 지구 반대편에서 응원해주고 있는 가족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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