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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Sep 07. 2019

영국으로 이사 왔어요 #13 저랑 이민 가실래요?

나의 20년간의 영국 여행기


방학을 필리핀에서 보낸 이야기

     

시골이 고향이어서 학생 때는 하숙을 하거나 고시원 신세를 져야 했다. 여름엔 너무 덥고 겨울엔 너무 추운 한국 날씨에 좁은 하숙방이나 고시원에서 지내는 생활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에어컨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방학이 시작되기 무섭게 한국을 탈출할 친구들을 4명 정도 모아 필리핀으로 떠나곤 하였다. 당시 하숙비가 합방은 20만 원 독방은 30만 원 정도였다. 제기시장에 있는 하숙집에서 익수라는 후배와 2인 1실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두 달이면 40만 원의 하숙비가 들어간다. 두 달 동안 굳이 비싼 하숙비를 지불하며 한국에 있어야 할 필요성이 없었다. 어차피 공부라고는 영어공부가 대부분이었다. 그럴 바에야 그 돈으로 체류할 수 있는 나라를 찾기 시작하였다. 

     

나와 친구들은 필리핀이 물가도 싸고 영어권이기 때문에 영어도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을 활용해 보기로 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났다. 당시 비자는 최초 입국 시 21일을 주는데 더 체류하고 싶으면 여행사를 통해 연장할 수 있었다. 네 명이 마닐라에 도착 후 가장 먼저 한일은 집을 렌트하려고 돌아다니는 일이었다. 마닐라 외곽의 작은 동네에서 우리가 살집을 찾았다. 집안에는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 등이 있었다. 저택은 아니었지만 작은 집이 아니었다. 한 달 렌트비를 물어보니 미화로 100달러라고 해서 바로 계약을 하였다. 당시 1달러는 800원이 약간 안 되었다. 그러니까 8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방 4개짜리 저택(?)에서 살았던 것이다. 친구들은 밤마다 파티를 벌였고 좋은 음식과 비싼 술을 마시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만끽하였다. 마닐라의 대중교통 수단인 찌푸니도 타지 않고 비싼 에어컨 버스를 타고 다녔다. 물론 K라는 친구는 무역업에 관심이 많아 시장 조사도 하고 나름 열심히 필리핀 생활을 하였다.

     

나는 사업 아이템이나 시장 조사보다는 영어 공부에 집중하였다. 필리핀 최고의 대학이라는 UP 기숙사에 튜터 모집 광고를 내고 면접을 통해 튜터를 선발하였다. 발음이 좋고 예쁜 여학생을 선발하였다. 32시간씩 2달간 개인 과외를 받았다. 한 달 비용은 3만 원 정도였는데 두 달 비용으로 통 크게 8만 원을 주었더니 고마워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그 돈으로 웨딩드레스도 사고 결혼 준비를 한다며 연신 고맙다고 하였다. 이름은 루미 나리야스였고 한국 남자와 결혼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지금쯤 한국에서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추억의 필리핀 방학 멤버들은 지금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서울에서 모여서 당시의 추억들을 회상하며 술잔을 기울인다. 물론 지금의 필리핀 물가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 비해 물가가 싼 나라는 얼마든지 많다. 이를 적극 활용한다면 다양한 문화 체험과 언어 습득을 통해 자연스럽게 경험을 쌓아나갈 수 있다. 물론 한국의 찌는 듯한 여름과 극한의 겨울을 피할 수 있는 혜택도 누릴 수 있다.

     



부모님 몰래 다녀왔던 영국 어학연수와 유럽 배낭여행

     

대학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던 것이 하나 있었다. 많은 형제 중 유일하게 나만 대학을 갔다. 학생 시절 비싼 학비와 하숙비까지 받아쓰는 생활 자체가 다른 형제들에게 미안하였다. 부모님보다 오히려 큰 형님이 많은 지원을 해주셨다. 그러한 상황에서 영국으로 영어 공부하러 간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께는 고시 공부하러 절에 들어간다고 속이고 그동안 과외와 막노동으로 번 돈을 가지고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당시에는 어학연수란 개념도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어렵게 무일푼으로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떠난 이유는 영어공부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유럽 배낭여행이 더 큰 목적이었다.

     

무작정 유럽의 모든 도시들을 여행하고 싶었다. 아니 세상을 배우고 싶었고 나도 한국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도 살 수 있을지를 스스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어학연수 후에도 나의 영어는 생각만큼 유창하게 발전하지 않았다. 배낭여행 후에도 특별하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에 가든 사람 사는 세상은 비슷하고 어느 나라에서든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후에 이민도 부모님 몰래 떠났다. 결국은 몇 년 후에 상황 설명을 하며 말씀드리긴 하였지만...., 언제든 내 인생의 항로는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 무모님께 말씀드리면 반대가 심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교묘하게 부모님을 속이고 잠깐 MBA 유학처럼 위장하여 떠났던 것이다.

     

     



직장시절 휴가 때마다 시장조사

     

대학 졸업 후 운이 좋게도 정부 산하기관에 취직하였고 정시 퇴근에 휴가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휴가 때마다 LA나 시드니 같은 한인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답사 휴가를 떠났다. 나의 미래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나름 철저하게 시장조사도 하고 현지 교민들과의 대화도 많이 나누어 보았다. 특히 LA를 여러 번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무래도 미국이 이민자에게 관대하였고 영주권 받기도 어렵지 않았다. 시드니의 경우에는 호주라는 나라만 컸지 시장 자체는 아주 작았다. 그만큼 기회도 적어 보였다. 반면 LA는 한인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마치 한국에 있는 느낌이었다. 여기도 내가 원하는 지역이 아닌 것 같았다.

     



젊은 날의 기백

     

직장시절 한인 타운 실태조사차 미국 LA에 친구들이랑 같이 간 적이 있었다. 말이 실태 조사였지 자기 사업을 하는 K라는 친구의 음향 박람회에 따라간 것이었다. 이 친구의 누나가 LA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누나 집에서 숙소를 해결할 수 있어서였다. 우리는 LA 외각에 위치한 친구 누나 집의 캐러반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생각보다 안락하고 편하였다. 미국에 갈 때마다 느꼈던 점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밤중 술을 마시고 타운센터의 번화가를 걸어도 아무도 시비를 걸거나 위협하지 않았다.

     

귀국 전날 친구 누나와 매형이 운영하는 LA 외곽에 위치한 코닥, 후지  필름 회사를 방문하였다.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초대 이유를 설명하시며 나에게 중간 관리자로 근무할 수 있냐고 물으셨다. 물론 바로 영주권을 주는 조건이었다. 나도 친구들도 귀가 번쩍 띄는 제의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즉답을 피하고 한국에 돌아가서 심사숙고 후 답변드리겠다고 하고 귀국하였다. 그런데 같이 같던 친구가 그 자리가 탐이 난다고 하였다. 본인이 가고 싶다고 하여서 그러라고 하고 그 제의를 친구에게 넘겨줬다.

     

결과적으로 몇 년 후에 디지털카메라가 나오면서 그 회사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영주권을 바로 받으면서 손쉽게 미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는 좋은 제의를 거절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내 손으로 직접 이루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몇 년 후에 디지털카메라가 나오리라는 선견지명 따위가 나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결혼이라는 마지막 관문과 봉사활동

     

이민을 가기 위한 가장 큰 난관은 나라를 정하지 못하거나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당시 결혼을 하지 못한 노총각이란 딱지였다. 부모님은 줄기차게 결혼을 독촉하셨고 직접 선을 볼 수 있는 자리도 여러 차례 마련하셨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제법 우명한 중매쟁이셨다. 그런 어머니의 타는 속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결혼을 하는 것이라고 누차 강조하셨다. 어학연수처럼 이민도 부모님을 속이고 몰래 가야 하는데, 결혼도 하지 않고 가려니 부모님께 너무 죄송하였다. 나는 방법들을 궁리하기 시작하였다.

     

결혼이라는 게 어디 서두른다고 되는 일인가? 하지만 나의 마음은 급하기만 하였다. 서로 마음이 맞아서 몇 번 만나는 사이가 되면 내 마음은 조급해졌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는 말이 당시의 나의 상황이었다. 결혼을 논할 단계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는 직진을 하곤 하였다. 혹시 저랑 결혼하게 되면 이민을 같이 갈 수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을 먼저 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결혼이 전제가 되어야겠지만 아가씨들은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나의 결혼 후 이민 제의에 단호하게 No라고 대답하였다. 아가씨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심지어 잠깐 사귀었던 아가씨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만나거나 사귀었던 대부분의 아가씨들이 선생님이나 공무원이었다. 그녀들에게는, 미래와 신세계에 대한 개척의지와 도전정신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를 믿고 이민을 간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도 안정된 직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민을 간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이 몰려왔다.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어라도 해야만 했다. 곧바로 다음 카페에 사회봉사클럽이라는 봉사활동 모임을 만들었고 나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바쳐서 모임을 키워나갔다. 그 모임은 빠르게 성장하였다. 수도권 중심이었던 봉사활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였다. 몇 만 명이 넘는 조직을 운영하면서 나의 관심은 온통 같이 이민 갈 배우자를 찾는 것이었다. 물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봉사활동은 주로 주말에 이루어졌다. 때문에 결혼식 등의 경조사에 참여하는 일은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봉사활동에 몰입하였다. 회원 중 70% 이상이 여성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아가씨들이었지만 나는 같이 이민을 갈 수 있는 적절한 배우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의 만남을 거치면서 알게 된 사실들이 놀라웠다. 해외연수는 물론 해외봉사활동도 몇 년을 하였고 배낭여행 경험도 나보다 많았던 것이다. 만난 지 몇 달 만에 결혼을 하고 그토록 꿈에 그리던 이민을 떠날 수 있었다. 내가 봉사활동 모임을 만들고 운영한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였다. 일단 착한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이고 내가 모임의 장이 되면 회원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불순한 의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착한 일도 하면서 착한 여자와 결혼도 하자는 취지였다. 그 불순한 나의 의도를 회원들이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그 모임을 그토록 빨리 그리고 크게 키워나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나의 작전은 성공을 하였고 나는 좋은 일도 하면서 결혼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곧바로 이민도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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