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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Sep 18. 2019

공감 한잔 하실래요? #3 죽음에도 빈부격차가!

공감능력을 상실한 사회는 아프고 외롭다.


5화. 사람답게 산다는 것   


부다페스트 유람선 사고를 접한 것은 사고 발생 다음 주 수요일이었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우리 인간들이 한 일은 거의 없다. 호재를 만난 언론들의 호들갑과 말만 요란할 뿐이다. 실종자 수색에 난항을 겪는 이유들만 뉴스를 타고 전해 질 뿐이었다. 그 넓고 깊고 길기까지 한 강에서 실종된 시신을 발견하기란 바다에서 시신을 찾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나는 매일 관심을 가지고 뉴스를 신경 써서 체크하지만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않았다. 한강에 비해 그리 넓지도 그다지 크지도 않은 강에서 단지 물살이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기술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인양 작업을 위해서는 유속이 느려지길 기다리는 듯하였다.      


사고가 발생한 다음날인 목요일 저녁에는 미사리에서 술을 마셨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가능하면 술자리는 피하려 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전화가 온 것이었다. 마침 그날따라 기분도 우울하고 술 생각이 나고 있었다. 나는 부다페스트 사고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내가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비난받거나 나쁜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하필 분위기가 이런 날에 술을 마시고 희희낙락한다는 사실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죽은 자를 애도하며 산자의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은 복잡해하였지만 현실의 삶 또한 중요하였다.   


술 약속이 있는 미사리를 향하는 택시 안에서였다. 그것도 한강 다리를 지나면서 내가 생각한 공감이라는 것은 다소 엉뚱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지나고 있는 이 암사대교 상판이 무너져 내린다면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수영을 전혀 못하는 나는 익사하고 말 것이다. 택시에 구명조끼를 갖출 확률은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도 생뚱맞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택시 안에 구명조끼를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기사님은 황당하다는 듯이 어이없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해 주었다. 그럼 만일 사고가 나서 택시가 한강에 추락하면 어떡하실래요?라는 질문으로 그 어이없음을 희석해보려 하였다. 기사님은 그럴 확률은 절대 없을 거라며 또다시 웃으신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짧게 한 단어를 내뱉으신다.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아무튼 나는 약속 장소에 무사히 도착하였고 후배와 본격적으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미사리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동생 같은 후배였다. 우리의 인연은 20년도 넘게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난 후배였다. 그 시절은 절말 사는 맛이 있었다고 하였다. 나도 맞장구까지 쳐가며 전적으로 동감하였다. 그 시절에도 사람답게 사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부침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어쨌든 우리의 힘으로 하나씩 이루어 나가는 일들은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우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봉사모임은 나의 이민으로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제라도 다시 시작해서 그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를 하고 싶어 졌다.      


자존감이나 나답게 사는 방법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세상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한 시대적 조류는 결혼이나 출산까지도 기피하게 만드는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답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황당한 죽음을 피하는 것도 아주 중요해지고 말았다. 일단 내가 생존해 있어야 자존감도 지키고 사람답게 사는 법을 연구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사람답게 죽을 권리를 주장할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후배는 술자리 내내 그 시절의 추억들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펼쳐놓기 시작하였다. 아름답고 기분 좋은 추억도 있었지만 가슴 아프고 아련한 추억들이 더 많았다.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람답게 사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후배 이야기를 경청하는 내내 내가 스스로 질문해 보지만 답이 쉽사리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생각대로는 아니었지만 자본주의의 무서운 부작용들은 부의 엄청난 불평등을 가져오고 말았다. 그래서 더욱 사람답게 사는 일이 중요해지고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튼 나나 후배에게 사람답게 사는 것은 여전히 같은 것이었다. 바로 교감신경의 합집합을 통해 공감이라는 교집합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봉사모임을 다시 만들고 봉사활동을 재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 총대를 매고 길을 만들면 따라오는 사람들은 늘어나게 된다. 첫눈이 내렸을 때 아무도 밟지 않는 눈길을 걸어가는 그런 기분이었다. 전문 산악인들에게도 누군가가 먼저 걸어간 길이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중요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한국경제는 어렵다고 하는데 일부 부유층들은 더욱 저 잘살고 가난한 저소득층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경제가 어려우면 다 같이 어려워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서민층만 점점 어렵고 힘들어진다. 그래서 서민들이 택할 수 있는 소비의 질은 점점 낮아지고 떨어지고 있다. 중산층이 붕괴된지는 벌써 오래전 이야기다. 아니, 중산층이 존재하기나 했는지도 의문이다. 그 결과가 세월호 사고였고, 부다페스트 유람선 사고다. 동유럽의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이 배를 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처럼 빈부격차는 여러 곳에서 죽음마저도 공평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사람답게 사는 것에는 사람답게 죽는 일도 추가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비극적인 죽음을 피하려고 집에만 쳐 박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불 밖은 위험하지만 이불속에서 나와야만 삶은 지속되기 때문이다.          


                                                                            

                                                         

6화. 안타까운 사고소식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강이 주는 느낌은 사고나 무서운 느낌보다는 아름답고 보기 좋다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 못하다. 어렸을 때 몇 백 미터를 불어난 하천 물에 떠내려가면서 그 짧은 시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 앞에서 삶과 죽음은 이렇게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았다. 어린 초등학생이 홍수에 떠내려가면서 어떤 멋지고 거창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고 판단되지는 않는다. 단지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작용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다 보니 천변의 철망들을 움켜쥐고 기어 올라올 수 있었다. 제방 위의 길로 나를 쫒아 내려오던 마을의 형과 누나들은 내 손을 잡고 끌어올려 주었다. 나는 울음조차 터트리지 않고 다시 씩씩하게 학교로 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물이 어느 정도 줄어들어 수위가 낮아져야 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책가방도 신발도 없이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 젖은 옷 때문에 추위가 몰려오지는 않았다. 한여름의 더위는 젖은 옷을 금세 말려가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사정 이야기를 듣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다. 다만, 양호실로 데려가 빨간약을 바르게 하고 상처를 소독해 주도록 양호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하는 게 전부였다. 죽음의 문 앞에까지 다녀온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그날 무슨 수업을 어떻게 받았는지 기억에 나지 않는다. 떠내려간 책가방으로 인해 점심시간에 도시락이 없어서 점심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굶지는 않았던 거 같다.      


아주 가끔은 한강물을 보면서 부질없는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특히 1100번 버스에서 그 생각은 빈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때 내가 불어난 물에 하천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동진강으로 빨려갔더라면 시신조차 찾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 말이다. 그 시절에는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질병이나 사고로도 많이 죽었지만 평균 수명이 짧아서 노화로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어렸을 때 남자의 평균 수명은 60세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만 60세가 되는 해에는 환갑잔치를 거하게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마을에서는 죽음이 일상이었고 꽃상여가 자주 산으로 향하였다. 그 시절은 화장이 아닌 매장 문화여서 장례식도 지금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마을 잔치처럼 크고 성대하였다. 망자의 마지막 길을 외롭지 않게 해 주려는 성의 표시였고 죽은 자에 대한 산자들의 교감이자 의무이기도 하였다.      


현대에 들어 어떤 사고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점은 인간의 무력감이다. 특히 이번 헝가리 유람선 참사는 나의 어린 시절에 겪은 고통을 고스란히 다시 겪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라우마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찰과상이란 상처만 치료하면 끝이었다. 상처라도 치료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근처에 병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리치료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치료기법이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고통을 같이 나누려 하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나 스스로가 그런 고통을 다시 접하지 않는 방법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면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합리적인 사람인지, 아니면 정말 이기적인 사람인지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려면 이번 사고가 일어난 원인 분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송의 뉴스에서는 여러 번 저가 패키지여행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가 패키지여행에 대한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친절하게도 분석해주고 있었다. 아무 일이 없을 땐 10년 동안이나 아무 문제제기도 하지 않던 전문가라는 교수님들이 나와서 침이 튀도록 문제점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어디에서 무얼 하시다가 막상 사고가 터지니까 나오셔서 전문가 행세를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이번 사고가 그분들과는 무관하다.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책임질 일은 전혀 없다. 하지만 지식인이나 전문가 집단의 최소한의 양심적 책임에서까지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단언컨대, 나는 평생 패키지 상품 여행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의 여행 스타일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패키지 상품 여행은 해본 적이 없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패키지 상품으로 동유럽이나 동남아를 많이 다녀오고 있었다. 심지어 친구나 가족 친지 중에도 많았다. 부다페스트에서 필수 코스가 다뉴브 강의 유람선 여행이라는 것이다. 몇 번씩 다녀온 사람들도 주위에 있었다. 그분들의 여행 스타일까지 탓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돈이 부족한데 여행은 하고 싶은 분들이 그것도 카드 장기 할부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패키지 상품은 반드시 여행사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 일정 인원이 차야만 출발이 가능하기 때문에 몇 달 전부터 팀을 구성하게 된다. 돈 많은 사람들이 이 상품을 구매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가족 단위의 여행에서 이런 참변을 당할 경우 남은 자들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는다.   

   

나는 90년대 초반에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기지처럼 여러 번 사용하였다. 물론 배낭여행이었고 혼자였다. 서쪽의 유럽 여행을 하다가 가끔은 동유럽으로 넘어온다. 그 이유는 서유럽에 비해 싼 물가 때문이었다. 특히 헝가리에는 맛있고 싼 음식점이 많았다. 그래서 부다페스트에 오면 며칠씩 머무르면서 몸보신(?)을 하고 다시 서유럽으로 넘어가곤 하였다. 유럽에서 한 달 이상의 배낭여행을 하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그 이후로는 헝가리를 따로 다녀온 적이 없다. 프라하 등 다른 쟁쟁한 도시들이 있기 때문에 부다페스트는 상대적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하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도시임에는 틀림없다. 이번 사고로 침몰한 배가 가라앉아 있는 다리는 몇 번 거닐었던 친숙한 이미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어서 놀라웠다. 물론 유럽의 다리 건축 양식이 비슷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거닐던 다리 밑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해 많은 한국인들이 사망하였다. 종교나 신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사고다. 언제 어디서든 그리고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비극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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