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능력을 상실한 사회는 아프고 외롭다
갑자기 성수대교 사건이 떠오르는 이유는 내가 늘 한강 다리를 건너 다닐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드는 이유를 분석하다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에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 48미터가 붕괴된 사고였다. 이 충격적인 사고로 출근하거나 등교 중인 직장인과 학생 49명이 한강으로 추락하였고 그중 32명이 사망하였다. 결과적으로 총체적인 부실공사가 낳은 참사라는 게 밝혀지면서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경악하였던 기억이 난다. 당시 시장이 바뀌고 모든 교량과 건축물에 대한 안전 점검이 강화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항상 소를 잃어야만 외양간을 고치는 좋지 않은 습성이 있다. 지금도 토요일 아침에 반포에 축구하러 갈 때는 가끔 성수대교를 건넌다. 아무 생각 없이 건너면 좋으려면 꼭 그날의 사고의 기억이 소환되곤 한다. 다시 건설해서 결코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다리일 거야 라며 스스로를 안심시키곤 한다. 기억이란 충격파가 강하면 강할수록 선명하고 오래가는 법이다. 평범한 일상들이 기억에 없는 것은 강력한 충격파를 뇌에 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성수대교는 붕괴된 지 3년 만에 새롭게 건설되었다. 아마 내 기억으로는 한국 최고의 건설사인 현대건설에 의해 건설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건설 관련 기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많은 법령들이 재정비되고 안전에 대한 대책들이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안전사고는 인재이든 자연재해든 끊임없이 터지고 또 터져 나왔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넘어가기에는 무언가 아쉬움이 항상 남았다. 그 근본적인 문제를 파헤쳐서 원인을 다 해결할 수는 없다. 특히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의 무력감은 이미 수차례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 건설사들이나 일반 시민들의 안전의식도 자본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알고도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일어난 사건 사고를 다 나열할 의도는 없다. 하지만 세월호 사고를 언급하지 않고는 이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아픈 기억이지만 그 끔찍했던 세월호 사고를 다시 떠올려야만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는 진도 해상에서 갑자기 침몰하였다. 전체 탑승자 476명 중 승객 304명이 사망하는 초대형 사고였다. 사고 원인은 과적과 무리한 선체 증축, 조타수의 운전 미숙 등이라고 발표되었지만 석연치 않아 여러 가지 다른 침몰설이 제기되었다.
2014년 4월 15일 인천 연안여객 터미널을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배였다. 거기에는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 2학년 학생 324명이 탑승해 학생들의 피해가 컸다. 그 큰 배가 서서히 가라앉는 장면은 전 세계인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전원 구조라는 오보와 304명의 희생자는 다시 전 세계인을 경악시키고도 남았다. 그보다 더 큰 경악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선실에서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이었다. 그리고 구조하려 대기하던 많은 구조대들이 구조를 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희생자 수가 클 수박에 없었던 무시무시한 안내 방송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특히 학생들은 세월호에 갇힌 채 서서히 바다에 수장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장면을 현장에서 지켜만 보고 있는 유족들이었다. 그다음이 TV를 통해 실시간 중계되는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간 국민들이었다. 이유를 막론하고 죽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죽어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은 또 하나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픔에 대한 공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단순한 교통사고에 너무 호들갑을 떤다는 사람들이 주는 충격은 크고도 깊었다.
세월호를 인양하지 않으려는 세력들도 많았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촛불시위와 투쟁으로 결국 세월호는 인양되었다. 사고가 난 지 몇 년 만이었다. 아무리 못 사는 후진국에서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바로 육지 근처의 바다에서 벌어졌다. 세월호가 크기는 하지만 인양하는데 몇 년씩 걸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우리 대한민국의 기술력을 탓하게 만들고 있는 웃지 못할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기술력이 없으면 미국 등 선진국의 기술력을 빌려오면 그만이다. 총체적 난국이었고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고스란히 세월호 사건에 함몰되어 있었다. 단순히 자본주의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물론 이번 사고에도 여러모로 자본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정치적인 문제가 더 결정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유족들과 대다수의 국민들이 분노하였던 것이다.
얼마 전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생생한 증언으로 세월호 출항 당일의 모습이 다시 나의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아픔이고 부끄러운 우리의 민낯은 화장을 한다고 결코 아름다워 지지 않는다. 얼마 전 우연히도 안산 단원 구에 갈 일이 있었다. 단원고등학교에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에 정문으로 향하였지만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학교 근처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 두 가지 사고의 공통점은 자본에 눈이 멀어 부실덩어리를 폭탄처럼 안고 살아야 하는 국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킨 점이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은 성수대교 붕괴와는 다른 복잡하고 미묘한 역학관계가 얽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국민들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아파하고 그래서 더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세월호 사고를 BBC를 통해 계속 접하면서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 안에 갇힌 채 죽기 직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남긴 휴대폰 메시지는 나를 절망케 하였다.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감에 미칠 것만 같았다. 정말 신이라는 존재가 있기나 한 것인지도 묻고 또 물었다.
신이 있다면 왜 이렇게 무고한 어린 생명들을 이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거두어갈 수 있단 말인지 이해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든 죄는 나를 포함한 어른들에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처절하고 비참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데려가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전지전능한 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이 또한 신의 뜻이라면 그러한 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배의 선수만을 육지로 내민 채 거꾸로 처박혀서 완전 침몰 직전인 배에 만약 내 아이가 갇혀있다고 가정을 해보면 해볼수록 이것은 현실의 일이 아니었다. 비현실 속의 추리 소설의 사건 사고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한국을 떠나 이민 와서 영국 런던에 정착한 일이 얼마나 다행인지 처음으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마음이 이토록 아프고 슬퍼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그해 4월 내내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종교와 문명의 발전은 그저 허상에 불과하였다. 모든 것이 자기 합리화에 급급하고 있었다. 단지 운이 없어서 당한 사고라고 치부하기에는 아이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어른의 답이었다. 사주팔자나 운명 때문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해 보였다. 구조를 안 했는지, 못했는지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저런 사고하나 처리하지 못하는 한국이 미웠고 싫어졌다. 아니 전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미국이 더 미워졌다. 미국의 수많은 잠수함들은 반드시 전쟁할 때만 사용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그저 한반도의 남쪽 바다에서 일어난 자그마한 사고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미국에 도움을 청해도 관여를 못할 만큼 정치적 역학관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면 더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꽃 같은 아이들은 물속에 수장되어야만 하였다. 그 모습은 생중계되고 있었다. 부모들이 느꼈던 그 순간들의 고통은 감히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을 것이다.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가고 있는 그 죽음들은 결국은 모두 억울한 것들이었다. 죽을 이유가 없는 죽음들이었다. 그래서 분노하고 경악하는 것이다.
이번 다뉴브 강의 유람선 사고나 세월호 사고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아주 저렴한 여행 경비를 위해 유람선이나 여객선을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누구도 저가 패키지여행을 또는 세월호라는 배를 이용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발적으로 자기 돈을 지불하고 이용한 서비스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해야만 하는 계층에 속하였다는 사실은 대안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부자여서 좋은 비행기나 호화 유람선을 탔더라면 이라는 가정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그리고 분노케 한다. 이제는 죽음도 경제력에 의해 노출될 확률이 높아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싸고 좋은 것은 없다. 싼 게 비지떡이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계층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비지떡인 줄 알면서도 그 서비스나 상품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 나는 그저 절망할 뿐이다. 신의 가호를 빌기에도 이미 지쳐버렸다. 사주팔자가 좋지 않아서라는 또는 운명이라는 무책임한 언어들에도 혐오감만 더해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절망하고 불안해한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약한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더욱 나약해지고 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의 나는 사랑을 잘 못하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래서 나의 사랑은 담을 넘지 못하는 짝사랑에서 멈추고 말았다. 첫 짝사랑은 중학교 2학년 때였었다. 그 여학생이 예뻐서가 아니라 남자 친구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 여학생을 좋아하게 되었다. 편지도 몇 번 써서 친구를 통해 보냈지만 답은 받지 못하였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짝사랑은 시골 마을에서 흩어져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지금은 그 여학생 얼굴조차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름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러한 짝 사랑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이루어졌지만 매번 효과나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나의 마음조차 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언젠가는 진짜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꽤나 진지한 다짐을 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럴만한 기회조차 맞지 못한 채 중고등학교 시절은 흘러가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짝사랑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예 쳐다보지 말자는 현실적인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가을 갑자기 나의 생활무대는 영국 런던에서 한국 서울로 바뀌어 있었다. 정확하게는 서울 외곽의 구리였다. 아니 구리보다 더 벗어난 남양주라는 곳이었다. 생활권은 구리였지만 행정구역상 다리 하나를 두고 남양주라 불리는 다산동이 나의 거쳐 가 되었다. 거기를 택한 이유는 마침 여동생 집도 가까이 있었지만 한강이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정하는 기준은 딱 한 가지였다. 여동생에게도 무조건 한강과 가까운 쪽으로 구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의 거처가 내 집이 되었다. 디스크 치료를 위해 한국에 갑자기 들어온 환자가 첫 번째 한일은 자전거를 구입하는 일이었다. 영국에서 타던 자전거와 같은 모델의 자전거를 중고로 구입하였다. 그것도 김포의 들판에 있는 중고 사이트 매장에서였다. 나는 한강변에서 매일 자전거를 타며 고양이 과 동물들이 소변으로 영역 표시를 하듯이 나의 역역을 점차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허리였다. 오전에는 자전거를 타고 오후에는 병원 치료를 매일 받았다. 저녁에는 글을 읽었다. 이렇게 단순한 생활은 몇 달간 지속되었다.
거의 매일같이 한강으로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한강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하게 사랑에 빠진 나는 그렇게 한강과 짝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한국의 가을은 맑고 청명하지만은 않았다. 어떤 날은 유난히 미세먼지가 많았고 눈이 따가울 정도로 심각하였다. 하지만 마스크를 해본 기억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구간은 구리 시민공원이었다. 그쪽에는 코스모스 축제를 할 정도로 코스모스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한국의 코스모스는 가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한강변의 바람과 따가운 햇볕은 코스모스를 더욱 아름답게 피워내고 있었다. 9월에 핀 코스모스는 11월이 지나도록 오래 버텨 주었다. 자기들이 백일홍도 아닌데 이렇게 오래까지 남아주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볼 때마다 즐거웠다. 어릴 적 동심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매개체 역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항상 구리 구간은 무조건 일단정지였다. 잠시 쉬면서 코스모스 물결에 빨려들며 옛 추억에 사로잡히는 그 맛은 나의 아픈 마음을 치유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위안이 되었다. 어렸을 때는 내가 사는 시골의 도로들이 모두 비포장 도로였다. 바로 집 앞의 신작로라 불리는 큰길에는 시내버스는 없었고 완행버스와 직행버스 두 가지가 다녔다. 생각해보니 완행버스가 지금의 시내버스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는 하천만 건너면 바로였기 때문에 걸어 다녔다. 하지만 중학교는 면사무소가 있는 소재지에 있었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물론 검정 교복에 교모까지 쓰고 다녔다. 일본식 검정 교복의 마지막 세대였다. 중학교는 집에서 십리 정도 되는 거리였다. 남자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여자들은 버스를 타고 다녔다. 생각해보니 여동생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그 시절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비가 올 때였고 또 하나는 버스가 지나갈 때였다. 버스가 신작로를 지나가면 하얀 먼지가 대단하였다. 그 시절에는 버스 외에는 차라는 것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신작로를 다니는 것은 버스 아니면 자전거였다. 가을의 신작로 길가에는 어김없이 코스모스로 가득하였다. 가끔은 자전거가 펑크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때에는 자전거를 끌고 툴툴대며 걸어가다가 심심풀이로 코스모스 꽃을 따서 장난을 치던 기억도 있다. 그 시절엔 코스모스가 지천이었기 때문이었다. 코스모스는 가을에 피지 않았다. 이미 여름의 끝자락부터 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을에는 만개하였다.
중학교 시절의 가을에 보던 코스모스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한강변에도 여기저기 많이 피어있었다. 9월 말이었는데도 활짝 피어 있었다. 사람들은 코스모스 밭에 들어가 사진들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바로 건너편에는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는 재미는 쏠쏠하였다. 매일 같이 한강과 짝사랑을 나누면서 그렇게 가을은 깊어만 갔다. 하지만 그 짝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겨울이 오면서 나는 한강에 나가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한강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특히 역풍이 부는 날에는 자전거를 타기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더 이상 한강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외롭고 힘든 고비들을 겨우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가 바뀌고 1100번 버스를 알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강남을 전철을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는 수고로움 없이 버스로 직접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보지 못한 한강을 다시 마주하게 된 기쁨을 누리고 있다. 한강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사이 내가 주로 이용하는 자전거 코스 옆의 한강에서 소방헬기가 추락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