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능력을 상실한 사회는 아프고 외롭다
나는 1주일에 세 번 이상을 1100번 버스를 탄다. 1100번 버스는 한 번에 강남을 관통하기 때문에 아주 편리하고 고마운 존재다. 가끔은 침을 흘리며 자다가 차산리 종점까지 가기도 한다. 차산리에서 다시 나오는 버스를 타고 다산동에서 내리지 못하고 다시 종점인 신사동 근처의 어디까지 간 아픈 경험도 있다. 버스 안에서 양쪽 종점을 찍을 정도로 자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런 날은 허망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잤다는 후련함으로 애써 위안을 삼는다.
버스만 타면 이상하리만큼 잠이 쏟아진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집에서는 잠을 자기 위해서는 정신과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어야만 잘 수 있다. 우울증과 숙면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내가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것에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1100번 버스를 타면 주로 잠을 잔다. 자지 않을 때는 창밖을 보는 편이다. 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1주일에 여덟 번쯤은 한강을 보게 된다. 내가 자꾸 한강을 보는 이유는 좋아하기 때문이다. 싫으면 굳이 볼 이유가 없어진다. 한강을 좋아하는 이유는 한강과의 어떤 인연이나 추억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볼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에 보는 한강과 출근 시간이 다소 지난 시각, 그리고 퇴근 시간의 의 한강의 모습은 확연히 느낌이 다르다. 그렇게 자주 접하면서 이제는 한강과 정이 들었다. 어떤 날은 길이 유난히 막히지만 빠른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도 한강과의 짝사랑 때문이다. 물론 잠을 잘 수 있다는 편안함도 있다.
사실, 오매불망 얼마나 그리워하던 한강이었는지 모른다. 오랜 이민생활에서 오는 향수병은 한강과 북한산을 늘 그립게 만들었다. 그래서 지난해 가을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자전거를 사서 한강변을 누비기 시작하였다. 허리가 아파서 오래 탈 수 없었지만 가끔은 무리를 해서라도 한강의 민낯을 보려고 애쓰기도 하였다. 집도 한강과 아주 가까운 곳에 얻었다. 그렇게 나는 한강과 소원해진 관계를 만회하며 친분을 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한국의 가을은 짧았고 겨울이 다가오는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그리고 겨울은 길었다. 다시 봄이 오면 자전거를 열심히 타리라는 희망은 계절이 바뀌면서 말 그대로 희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의 애마는 오늘도 그렇게 현관 안 계단 아래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주인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변심한 주인은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이렇듯 사람의 마음은 갈대 같아서 취미까지도 자주 바뀜을 당하고 만다. 물론 취미는 그동안 잠깐 쉬었던 축구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1100번 버스의 발견이었다. 1100번 버스를 몰랐을 때는 전철과 지하철을 이용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1100번 버스를 애용한다. 집에서 시내에 가장 빨리는 아니지만 가장 쉽게 접근하는 것이 바로 1100번 버스다. 거기에 한강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지금도 1100번 버스만 생각해도 가슴이 뛴다.
가슴이 뛴다는 사실은 좋아하는 대상이 생겼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고 가슴이 뛰는 일은 없다. 아무 때나 가슴은 뛰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사람도 아니고 한강이 될 줄은 몰랐다. 나에게 한강은 그러한 의미로 아주 조금씩 다가왔다. 자전거를 타며 보는 한강과 버스를 타고 보는 한강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자전거로 한강을 건널 때는 주로 잠수교나 잠실철교의 자전거 도로를 이용한다. 잠수교를 건널 때의 느낌은 한강과 하나가 된 것처럼 흥분이 된다. 바로 코앞에 강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 손을 뻗어보지는 않았지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다. 그리고 한강의 물비린내나 때론 별로 유쾌하지 않은 냄새와도 만날 수 있게 된다. 특히 한강변의 편의점에서 핫도그 하나와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먹으며 망중한을 즐길 때는 이태백이나 소통파가 부럽지 않다.
자전거 동호회의 많은 일행이 같은 유니폼을 입고 줄지어 내 앞을 지날 때는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낀다. 나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외로움이겠지만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봐서 동호회 사람들로부터 파생된 외로움일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선이 된 느낌의 기분은 갑자기 외톨이가 된 느낌으로 전락하고 만다. 내면의 가벼움과 생각 없음에 실망하지만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하면 금방 평정심을 되찾는다.
반면 버스를 타고 한강을 감상하는 기분은 안락하고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마치 관광객이 되어 한강의 속살을 훔쳐보는 그런 기분 때문이지 몰라도 나는 1100번 버스 안에서 커튼을 절반만 열고 그렇게 한강을 훔쳐보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금요일 저녁에 퇴근 시간과 맞물리면서 포스코 빌딩 앞에서 기다리는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7시가 넘어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역시 커튼은 반쯤만 열고 반쯤은 닫아 두었다.
잠실역을 지나면 잠실대교로 진입한다. 이때부터 창밖을 내다보며 한강을 바라본다. 많은 생각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정리되기도 하는 편안한 시간이다. 내릴 때까지 잠깐의 구속은 즐겁기만 하다.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이기도 하다. 짝사랑하는 이도 만나고 생각도 정리하고 그래도 여유가 나면 글을 읽는다. 그러다 가끔씩 상상의 나래를 펼 때는 오싹할 정도로 끔찍한 생각이 든다. 그 상상은 바로 다리가 붕괴되어 내가 타고 있는 버스가 한강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얼마든지 발생 가능한 사고다. 실제로 성수대교가 붕괴되어 등교하던 여학생들이 희생된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얼마 전 이태리 제노바 고속도로의 다리가 붕괴되어 그 끝 난간에 걸쳐있던 트럭이 화재가 된 적이 있었다. 그 다리는 나와 아들이 붕괴되기 1주일 전에 지나갔던 다리였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불안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럴 수도 있다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실제로 사고로 이어질 확률도 낮지 않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자보험을 드는 것이다. 그날도 나는 다리가 붕괴되어 내가 타고 있던 버스가 강물로 추락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버스는 겨우 잠실대교 북단에 이르렀다. 그날따라 거북이보다 느리고 겨우 잠실대교를 통과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에어컨이 작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났다. 오래 전의 성수대교 붕괴 현장이 TV로 중계되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1100번 버스는 겨우 잠실대교 북단에 이르렀다. 잠실대교는 양방향 모두 정체가 심하였다. 커다란 화물트럭이나 레미콘 차량들도 보였다. 버스도 많았지만 대부분 승용차들이었다. 그렇게 잠실대교는 많은 차량들과 그 속에 탑재된 화물과 사람들의 무게까지 견디며 신음하고 있었다. 나는 한순간도 한강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한강은 푸른 물결을 자랑하며 예전의 냄새나는 한강이 아니었다. 한나라의 수도를 관통하는 강이 이처럼 큰 강은 우리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외국인들도 한강의 크기에 놀라곤 한다. 이렇게 작은 나라에 이렇게 큰 강이 흐를 수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것도 서울이라는 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으며 숨통을 트이게 해 준다. 한강이 없는 서울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왜 우리의 역사가 한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발전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잠실대교를 엉금엉금 기던 1100번 버스는 잠실대교 북단 끝에서 우회전을 시작하였다. 강변북로로 진입한 버스는 제법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우측 편에는 한강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워커힐을 지나자 하남의 미사리와 멀리 덕소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암사대교를 지나자 새로운 다리가 하나 건설 중이다. 새로운 고속도로를 위한 다리였다. 지난해 가을 자전거를 타며 공사 진척 상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러다가는 한강이 다리로 덮일 기세였기 때문이다. 한강변의 나무들은 진초록을 유감없이 뿜어내며 6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나무들의 가지 끝에 달리 이파리들은 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바람의 새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잠잠하고 조용하던 한강은 갑자기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하류에서 상류로 불기 때문에 물살이 거꾸로 흐르는 착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템스 강에서도 자주 보았던 장면이었다.
10분 정도를 더 달리자 버스는 토평 IC에 접근하고 있었다. 아직도 우측 창밖으로 흐르고 있는 한강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버스의 유리창이 통유리여서 창문을 열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오늘따라 한강의 어떤 소리든 들어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7시 40분이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갑자기 한강변의 가로등들이 일제히 점등되며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순간 오래전 가족 여행 때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의 크리스마스 장식 위에 걸려 있던 전등들이 일제히 점등되는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는 크리스마스 시즌이어서 6시가 채 안되어서 점등이 되었던 거 같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아내도 환상적이 모습에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아이가 어렸던 그때만 해도 가족 여행도 하고 외롭거나 우울하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먹고살기 바쁜 것도 이유였지만 아내와의 사이에도 그다지 이상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라고 나의 서열이 아들이나 단오보다 높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뚱보 고양이 단오 다음인 서열 4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서열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1100번 버스 안에는 서너 명의 승객이 서 있었다. 출퇴근 시간에는 서서 가야 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그래도 버스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만큼 강남권에 쉽게 접근하기 때문이었다. 왕숙천과 만나는 지점 직전의 창밖의 풍경은 미사리와 덕소의 아파트 군락이 대나무처럼 자라고 있었다. 아름다운 한강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시멘트 건물들이다. 하지만 자주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이제는 이러한 시멘트의 아파트와 빌딩들이 우리의 풍경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지점에서 한강은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집에 다 와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서서히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 이미 주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어둠이 내리는 창밖의 풍경에서 사라진 한강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한강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단지 아름다워서만은 아니다. 자연의 무서움에 자꾸 몸서리가 쳐지기 때문이다. 자연이 위대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나약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큰 사고가 터질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천편일률적인 것들이다. 자연을 파괴하고 삶의 일부로 살아가면서 정복자처럼 구는 인간의 오만에 대한 경고라는 말들이 그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왠지 썩 공감이 가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연이 주는 경고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이거나 덜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거부들도 자신들의 비행기나 요트를 타고 즐기다가 사고로 죽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번 헝가리 부다페스트 유람선 전복 사고는 아쉬움이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자의 선택은 각자가 알아서 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자본이 그 선택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를 결정해주는 중요하고 무서운 위력을 발휘한다. 자본이라는 위력에 의해 어떤 자는 최저 가중의 최저가인 패키지여행을 선택하는 것이다. 일정이나 날자가 변경되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관행처럼 진행되어온 일이라 내가 왈가왈부해도 의미 없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누구를 탓할 수가 없다. 오직 자신의 선택을 탓해야만 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1100번 버스는 수석동에 진입하였다. 오른쪽으로 건설 중인 다산 신도시 아파트의 일부 동에서는 벌써 불빛들이 세어 나오고 있다. 지난해 열심히 공사 중이던 아파트였는데 놀라운 속도가 아닐 수 없다. 금요일 퇴근길의 버스는 오늘도 무사히 한강을 건너 집으로 향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수영을 전혀 못한다. 어렸을 때 겁도 없이 저수지나 강에서 개구리 영법의 수영실력으로 수영하다가 두 번이나 익사할 뻔하였다. 또 한 번은 초등학교 때 학교를 가다가 불어난 하천 물에 휩쓸려 몇 백 미터를 떠내려가다 겨우 제방을 잡고 살아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다리가 놓여있지 않았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학교를 갈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렇게 물이 많지 않아 보여서 형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건너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다행히 형들은 수영을 잘해서 모두 빠져나왔지만 나만 계속 떠내려갔던 것이다. 흙탕물을 얼마나 먹었는지 배가 볼록했다. 나는 온몸에 찰과상을 입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방도 없이 학교로 항하였다. 그때 느꼈던 물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이런 사고가 날 때마다 그때의 고통이 떠오른다. 불어난 흙탕물에 떠내려가면서 순간 느꼈던 마음은 어떻게든 책가방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손에 책가방을 잡고 개구리 수영을 필사적으로 해보았다. 엄청난 물살의 속도와 깊이는 책가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을 먹기 시작하자 정신이 혼미해지며 일단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천변 제방으로만 가면 철망들을 붙들고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백 미터를 떠내려가다가 다행히 천변 제방의 철망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잃어버린 책가방과 운동화에 대한 미련은 남았지만 쫒아오던 형들의 손을 잡고 나는 학교로 향하였다.
마침내 버스는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하였다. 내 온몸에서 땀이 났는지 옷들이 축축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기사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잊지 않고 버스에서 내렸다. 입에 발린 감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껴서 하는 인사였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무슨 놀이를 하는지 시끌벅적하였다. 어렸을 때 내가 불어난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살아났을 때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