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발견하고 돌아보게 하는 봉사활동 이야기 #3
우리가 직면한 사회문제는 아주 많다. 이혼율이나 출생률 그리고 빈곤율과 분배의 정의 등도 문제지만 자살률도 심각한 상태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사연은 뉴스를 통해 많이 접하였다. 대부분이 사업실패나 경제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자신의 가족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가장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OECD 국가 중 1위를 고수하다 에스토니아의 OECD 가입으로 2위를 달리는 중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무한 경쟁 사회다. 아마존의 정글에서 동물들의 먹이사슬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오히려 더 치열할 수도 있다. 먹고 먹히는 것이 아마존의 세계다. 최상의 포식자인 악어도 재규어에게 잡아먹힌다. 최상위 포식자인 재규어는 무서울 게 없다. 다만 인간만이 최대의 적일 뿐이다.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의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왜 중산층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분배의 정의가 전혀 실현되지 못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화이트칼라나 블루칼라나 몸을 파는 노동자들일뿐이다. 이 노동자들에게는 직업이나 직장 또는 사업을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 누구나 재벌이 될 수도 있는 구조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극히 일부만 중산층 이상의 신분이 될 수 있다. 나머지는 그냥 서민이라고 불리는 일반 국민이다.
영국만 계급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한국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차이는 승자독식의 방식일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모든 문제는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선진국은 먹고살기 힘든 일반 서민들에게는 충분한 복지가 주어지고 파산한 사람들에게는 파산 신청을 할 수 있게 해서 자살을 예방한다. 선진국의 자살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와는 거리가 있다. 물론 경제문제로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완벽한 복지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생활에서 오는 삶의 무료와 무의미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나도 한때는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매일 자살을 생각하며 살았다. 자살할 이유나 동기는 없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늘 하루를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 준비를 하고 가계로 출근하면 직원들을 체크하고 내가 할 일을 하다 보면 점심시간이 된다. 12시부터 손님들은 길게 줄을 늘어선다. 점심 장사만 하기 때문에 영업시간도 오후 4시까지다. 매출의 90%는 12시부터 2시 사이에 발생한다.
모든 것이 원만하게 돌아갔고 돈의 갈증이라는 것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가 어려웠다. 매일 저녁은 펍이라는 영국의 선술집에 가서 생맥주를 마시는 걸로 대신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시간이 많고 한가해서 그러는 줄 알고 무리하게 가계에서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존 루이스라는 유명 백화점 지하에 초밥 바에 입점하여 운영하면서 나의 생활은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왜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우울감은 나를 좀먹고 있었다. 알바까지 포함하면 20명이 넘는 직원들을 관리해야 했다. 물론 나도 하나의 직원으로 가계와 백화점을 하루에도 수없이 오가기를 반복하며 노동에 매달렸다. 우울감이 심하게 몰려올 때는 바로 옆의 템스 강의 다리 위를 오가며 뛰어내릴까를 수도 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으려는 나를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뛰어내리지 못한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아들 때문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생각하면 결코 뛰어내려서는 안 되었다. 아들은 영국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데 형제자매도 없이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엄마가 있어도 독립을 하면 더 이상 엄마와 같이 살지 않고 서로 경제 문제를 공유하지 않는다. 대학을 가는 순간 영국의 아이들은 각자가 완전한 독립체가 된다. 대학도, 취업도, 결혼도, 육아도 알아서 한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대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개념 자체도 없다. 부모의 노후는 부모가 알아서 챙기고 나머지는 국가가 챙겨주기 때문이다.
아들이 항상 나를 살려주었지만 그 이면에는 봉사활동이 있었다. 봉사활동을 하며 만난 수많은 장애인들, 그중에서도 중증 복합장애인들을 생각하면 나는 모든 것을 갖춘 완전체였다. 그런 내가 우울 따위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그분들에 대한 모욕이고 모독이었다. 자신의 의지로는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장애인들도 삶을 이어간다. 그런데 나처럼 모든 것을 갖추고 거의 완벽한 조건의 인간이 왜 삶의 끈을 놓으려고 한단 말인가?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다.라고 니체는 역설하였다. 어떠한 고난과 난관이 와도 노래하고 춤추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로지 돈만을 생각하면 돈의 노예가 될 뿐이다. 자본가도 예외는 아니다. 자본가가 자본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자본이 자본가를 통제하게 되어 있고 실제로 그런 현상이 일반화되어 있다.
한강 다리나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는 사람들과 각종 방법으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진 완전한 사람들이다.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이다. 단지 일시적으로 돈 문제에 시달리거나 우울로 삶의 끈을 놓아버리는 일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분들이 나처럼 봉사활동을 다녔더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산 신청하고 시골의 폐가에 가서 사는 한이 있더라도 삶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삶을 중단한다는 것은 돈이든 우울이든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합리화될 수 없다.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 싶다면 중증 복합장애인들이 기거하고 있는 시설 단체에 매달 한번 씩이라도 가서 봉사활동을 하길 바란다. 그분들의 놀라운 삶을 직접 보고 느껴보길 바란다. 삶이란 대단한 것도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밀어내 나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힘일 뿐이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물을 밀어내야 한다.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아스팔트 바닥을 밀어내야 한다. 비행기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강력한 공기의 저항을 밀어내야 한다. 이처럼 삶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무언가를 밀어내야만 한다.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인생일 뿐이다.
부귀영화나 권력과 명예 또는 자본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을 밀어내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때 필요한 것이 자존감이다. 자꾸 화려했던 과거를 돌이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존감은 바닥을 치게 되어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자존감이다. 그것을 느껴보고 싶다면 봉사활동을 권한다. 혼자여도 좋고 단체에 가입해서 해도 좋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분들의 삶을 보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고 사치를 부리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정치인이나 재벌보다는 그 중증 복합장애인들을 더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분들이 가르쳐준 것들이 진정한 인간 본연의 자세였다. 어떠한 고난이나 악조건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밀어내는 일은 위대하기까지 한 행위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만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 사람이었구나! 를 느끼면 느낄수록 그분들께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 내가 무언가를 베풀려고 왔다는 생각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배우고 간다는 생각으로 바뀌면서 나의 자존감은 높아져갔다. 그래서 이제는 어떠한 고난이나 역경에도 흔들릴지언정 삶의 끈을 놓겠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은 하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번쯤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던 문제가 바로 자신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점이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신을 필요로 하거나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곳은커녕 자신의 존재 자체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모두가 바쁘고 세상 또한 정신없이 돌아간다.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을 위해 그리고 왜 태어났을까? 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취업의 예를 들어보겠다. 보통 지방대 출신의 경우 취직을 위해 지원서를 100군데 이상 넣어보지만 면접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서류 전형에서 지방대라는 이유로 아예 탈락시킨다는 것이다.
그 방안으로 나온 것이 블라인드 면접이라는 것이다. 몇몇 기업은 이 블라인드 면접을 시행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기존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인 서울, 인 서울을 외치며 서울 소재 대학을 가려고 목숨 걸고 공부한다. 하지만 고작 20% 정도만 서울 소재 대학을 갈 수 있다고 한다. 나머지 80%는 지방의 대학을 가야 한다. 물론 지방에도 좋은 대학이 많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울로 몰리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영국에서 너무 오래 살아서일 것이다. 영국 최고의 명문대는 모두 지방에 있다. 그 유명한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대학도 런던이 아닌 지방 도시에 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서울에 목숨을 거는지 이해할 수 없다. 대학을 나온 나머지 80%는 원하는 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에 지원해야 하고 연봉 차이로 인한 불이익은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가 커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대를 다니려는 학생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80%는 현실이고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교육제도다. 지방대생을 위한 특혜를 준다는 기업도 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지원하고 싶은 청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경우에는 대학 진학률이 우리처럼 높지 않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배관공이나 전기공 또는 목수 같은 전문 직업들이 대학 졸업생이 취직해서 받는 급여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도 마찬가지다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고 직업학교를 나오는 것이 훨씬 빠르다. 그리고 실무위주의 현실적인 교육을 해주는 직업학교가 훨씬 선호도도 높고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택시 운전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서 최고의 직장 중의 하나가 블랙캡 기사이다. 전직 변호사나 대기업 임원들도 은퇴 후 블랙캡 기사에 도전한다. 우버 때문에 소동이 일긴 하였지만 블랙캡 기사는 영국에서 최고의 직업 중 하나로 불린다. 예전에는 꿈의 직업이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우버의 출현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일반 직장인의 몇 배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블랙 캡이란 우리의 모범택시 개념과 유사하다. 하지만 그 시스템은 우리와는 너무도 다르다. 블랙캡 기사가 되려면 3년 동안의 피 말리는 현장 실습 위주의 교육이 실시된다. 언뜻 보아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이 나온 세상에서 3년 동안의 교육이라니! 그것도 지도책을 펴놓고 내비게이션 없이 최단거리로 손님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훈련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영국이라는 나라 전체의 시스템을 놓고 보면 이해가 간다.
영국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것은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제대로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공사 든 서두르는 법이 없다. 그리고 변화도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다. 남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다. 겨울에도 반팔 반바지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여름에도 가죽 재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웃통 벗고 출근하는 직장인도 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직장으로 들어갈 때는 옷을 입는다.
영국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 이유는 우리 사회의 모순들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는 아니다. 단지 그 모순으로 인해 피해를 보고 힘들어하는 사람들, 즉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위해서다. 우리 인간은 거의 대부분이 한두 가지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성을 타고났다. 이는 자기 계발이 아닌 자기 발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할 일 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다. 생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포기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탑골공원에 가보면 수많은 노인들이 무리를 지어 바둑이나 장기를 두며 시간을 보낸다. 물론 그분들은 스스로 시간을 즐긴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시니어들도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다. 단순히 육체노동만을 생각하다 보면 한계를 이미 넘어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할 수 있는 취미도 차고 넘친다. 세상에 바둑이나 장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어느 분야에 소질이 있고 무엇을 잘하는지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한정된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시간이다. 그 시간을 적극 활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말 할 일이 없다면 봉사활동을 한번 해보기를 권장한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들에게는 많은 손길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정말 완벽한 사람이고 자신의 의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도 “살아서 뭐해 “ 또는 ”내가 왜 사는 거지”라는 의문을 자주 품었었다. 그 의문 속에서 방황하고 괴로워하였다. 하지만 내가 시도해본 일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일들은 시도 초자하지 않고 포기하였다. 그러면서 마치 실패자나 인생의 낙오자처럼 생각하며 행동하게 된다. 잘 나가던 유명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인생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
바다에 나가봐도 마찬가지다. 바다는 고요해 보이지만 배를 타고 조금만 항구를 벗어나면 바다가 얼마나 열심히 활동하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바다는 한시도 그냥 있지 않는다. 항상 바람과 협력하여 파도를 생산해 낸다. 그 파도는 바닷물을 이리저리 옮기는 역할을 한다. 바닷물이 고인물이 되지 못하도록 한시도 쉬지 않는다. 때로는 태풍으로 바닷물 속까지 뒤집어 놓는다. 바닷물이 항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닷물이 짠 것도 있지만 파도의 역할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도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빠져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매사에 열심히 그리고 정신없이 살라는 말이 아니다. 시간을 아껴가며 초인처럼 살라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에서는 벗어나라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봉사활동을 권하는 것이다. 그분들을 위한 봉사가 아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봉사이다. 그것은 체험해본 사람이 아니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우울과 고독은 개념이 다르다. 고독은 자발적인 우울이다. 반면 우울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여러 이유로 찾아온다. 증세가 심해지면 우울증이라는 병으로 발전된다. 그 우울증도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나의 경우, 고독은 사치였다. 고독할 틈이 없었다. 우울이란 먹구름이 항상 고독을 덮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한국에 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우울증도 많이 좋아졌다. 그중 하나가 축구였고 또 하나는 글쓰기였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우울증은 어느 정도 잡혀나갔다. 거기에 더해 봉사활동은 우울증에 망치질을 하였다. 놀이 공원이나 오락실 옆에 있던 두더지를 뿅뿅이 망치로 치고 또 쳐도 계속 두더지는 올라온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 말이다.
우울증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두들겨 처도 이리저리 고개를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심신은 지쳐갔고 알 수 없는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누군가가 필요하지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마셔도 그 친구들은 그 누군가가 아니었다. 거의 질병처럼 파고들어오는 것이 외로움이었다. 우울증과 외로움의 관계가 궁금하기도 하였다. 봉사를 갈 때마다 느끼는 점은 저분들은 얼마나 외로울까? 또는 얼마나 우울하고 고독할까?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의 말씀은 그분들은 행복하게 잘 지낸다는 것이다. 우울하거나 외롭지 않다는 것이다.
20여 년 전 여주 라파엘의 집에서 소화 테레사 선생님도 같은 말씀을 해 주셨다. 그분들이 인지 능력이 없어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오해라는 것이다. 그분들도 똑같이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성적인 욕구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다만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게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의 예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사실에 그 당시에는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그런 증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20년 인생의 굴곡을 온몸으로 감내하면서 수많은 감정의 기복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울이라는 감정이 가장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다. 여러 복잡한 외부 요인으로 인해 심한 심리적 압박을 느낄 때에는 어김없이 우울감이 찾아왔다.
그 우울감과의 싸움은 모 아니면 도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싸움이었다. 정말 힘들 때에는 예전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만난 수많은 인연을 생각하곤 하였다. 그중 유독 생각나는 사람이 벧엘의 집의 현철 씨와 라파엘의 집의 낙중 씨였다. 특히 낙중 씨는 중증 복합장애인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쾌활한 성격이었다. 우울하거나 고독하다는 인상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항상 긍정적이고 활달한 성격 그 자체였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더듬어서 인식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더듬어보면 대략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덕분에 여성 회원들이 힘들었다. 낙중 씨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남자 여자를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모두 더듬어본다. 한두 번 당한 여성 회원들은 요령이 생겨서 낙중 씨의 더듬이에도 슬기롭게 응해준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맞출 때에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소녀 같은 감성을 표출하곤 하였다. 물론 그 시절엔 모두 젊은 청춘들이었다. 그 유명한 신의 손을 작년 가을에 다시 만났다. 지난해 가을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여주 라파엘의 집에 들르게 되었다. 물론 어떠한 사전 연락도 없었다. 20년 만에 찾은 라파엘의 집은 그대로였다. 여주 신륵사를 지나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너무나도 외딴곳이었다. 당시에는 버스를 대절해서 다녔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 외딴곳이었는지 잘 몰랐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몇 개의 골프장이 생겼고 농촌 마을들은 그대로였다. 벧엘과는 달리 아직 여주의 시골마을들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라파엘의 집 입구 오르막부터 주차장까지는 단풍이 절정을 이루었다. 양쪽으로 화려한 단풍은 레드카펫 인양 나를 환영해 주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짧은 오르막을 오르자마자 하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 님이 손짓하면 나를 반겨 주었다. 나도 당연히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고 나서 주차를 하였다. 주차장에는 낙엽이 쌓여서 주차 라인을 인식할 수 없었다. 마리아 님(예수님일 수도 있음)도 20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계셨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세상을 향해 알 수 없는 손짓을 하고 계셨다.
정문 앞의 벤치들에는 가을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고 정적만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예전의 라파엘 같으면 시끌벅적하고 정신이 없을 텐데 봉사자도 보이지 않았다. 정문으로 들어가서 신발을 벗고 복도에 올라설 때까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정면의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텅 비어있었다. 왼쪽 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젊은 여직원과 남자 직원 두 명이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원장실도 텅 비어있었다. 건물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모두 바뀌었다.
내가 만나 뵙고 싶었던 소화 테레사 선생님도 없었다. 직원들께 방문 목적을 이야기하기 전에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무례를 사과하였다. 그리고 나의 신분과 방문 목적을 설명하였다. 나는 원장실로 안내되어 티백으로 된 현미녹차를 한잔 대접받았다. 원장실에도 사무실에도 알 수 없는 침묵이 고독과 함께 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당시 총무님이셨던 분이 반갑게 달려와서 나를 맞아주셨다. 20년 만에 만난 총무님은 여전히 거기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나를 알아보는 분이 그래도 아직까지 라파엘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총무님은 그동안의 변천사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셨다. 한때는 150명을 넘던 큰 시설단체였는데 이제는 35명 이상을 수용하는 것이 사실상 힘들게 되었다는 설명 하나로 라파엘이 왜 이렇게 허전한 공간으로 변했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찾던 소화 테레사 선생님도 떠난 지 오래되었다고 하셨다. 연락처를 물었지만 알 수 없다고 하셨다. 아쉽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의 마음에서 존경하는 소화 테레사 선생님을 떠나보내드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에 손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원장님이 오셨다. 물론 원장님도 몇 번이나 바뀌어서 처음 뵙는 분이었다.
원장님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 오셨다. 그리고 악수를 해달라고 손을 내밀어 주셨다. 나는 두 손으로 원장님의 손을 잡고 내가 누구인지를 짧게 설명하였다. 안타깝게도 원장님은 앞을 못 보는 분이셨다. 20년 전의 라파엘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급하게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 재치고 원장실로 들어서더니 나를 더듬기 시작하였다. 나는 한눈에 낙중 아저씨라는 것을 알아챘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벧엘의 현철 씨처럼 노화도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나만 늙어버린 것이다. 그만큼 세상의 파고에 찌들 대로 찌들어버린 나였다. 잠깐 내 몸을 더듬어 만지더니 낙중 씨는 알 수 없는 함성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나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낙중 씨를 껴안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총무님이 내가 왔다고 귀 뜸을 해주신 모양이다. 그래서 그렇게 원장실로 달려왔던 것이다. 낙중 씨는 나에게 한참을 손짓 발짓해가며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10분 정도 지나자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원장실을 나갔다.
원장님과의 면담은 1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원장님은 생각보다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변화의 물결에 적응하고 계셨다. 참고로 여주 라파엘의 집은 서울시립시설단체다. 서울시의 예산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시설단체다. 여기에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 서울시가 지방자치단체에 있는 시설에까지 도움을 주는지 말이다. 원장님의 말씀으로는 원래 서울시에 있어야 할 시설단체인데 혐오시설로 여주의 산속까지 밀려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서울시내에서는 봉사활동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개별적인 독거노인 봉사활동은 있었다. 벧엘의 집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의 산속에 있다. 덕분에 모두 경치나 공기는 좋다고 한다. 원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제는 봉사자들이 원생들의 방에 들어가 목욕이나 청소 심지어 같이 대화하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동안 너무도 많은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도 한다.
인권보호 차원에서 출입을 제한하다 보니 봉사를 오는 개인이나 단체가 거의 끊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들이 와도 그다지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원장님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듣고 배우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라파엘을 나오면서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