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발견하고 돌아보게 하는 봉사활동 이야기 #4
4화. 중증 복합장애인 이야기
장애인에게는 급수가 주어지고 장애인증이 지급된다. 여러 가지 복지혜택도 있다. 중증 복합장애인이란 장애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는 의미다. 예를 들면 기본적으로 정신지체나 뇌 병변 등의 심각한 질병에 기본적인 행위까지 못하는 것이다. 걷는 것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못하는 장애인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 여주의 라파엘의 집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20년 전에는 우리의 주요 활동이 원생들의 목욕이었다. 남자는 남자를 여자는 여자를 목욕시켜 주는 일이었다. 무거운 성인을 들어서 옮겨 목욕을 시키는 일은 중노동이었다. 욕실 바닥이 미끄러워 부상 위험도 도사리고 있어서 항상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주 팀은 봉사정신이 투철하고 힘 좀 쓰는 회원들이 참석하였다.
여주 가는 길은 멀었다. 일요일 아침 교대역 3번 출구에서 대기 중인 버스를 타고 여주까지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다시 그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 벌써 어두워진 저녁이었다. 버스도 물론 우리가 대절한 것이다. 하루 대절 비용도 상당하였는데 다행히 회원이 아는 관광버스회사를 이용해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여주 가는 길에서 사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희열을 느꼈다. 특히 봄과 가을에는 마치 소풍을 가는 것처럼 모두가 들떠서 준비해온 김밥을 먹으며 재잘거렸다. 라파엘의 집에 도착하면 각 방으로 인원배정을 하고 150명이 넘는 분들의 목욕을 시켜 드렸다. 물론 150명 모두는 아니고 그중 일부만 우리 담당이었고 나머지는 다른 종교 단체에서 온 봉사자들의 몫이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서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분이었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불행하거나 우울하다는 느낌은 한 번도 받지 못하였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혀 드리면 그 뽀송뽀송한 느낌에 함박웃음으로 고마움을 표현한다. 그러한 분들은 그래도 상태가 괜찮은 편이다. 표정도 자신의 의지로 짓지 못하는 분들은 고마움을 표시할 방법조차 없다. 그런 분들이 중증 복합장애인들이다.
낙중 씨처럼 자신의 발로 돌아다닐 수 있는 분들이나 아니면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볼 수 있는 분들은 그래도 상태가 괜찮은 분들이다. 낙중 씨는 라파엘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다. 마음이 너무 착하고 손재주도 좋아서 뭐든지 척척 만들어냈다. 특히 여자 회원들에게는 꽃반지나 종이시계를 만들어 주곤 하였다. 여자 회원들도 낙중 씨가 자신의 몸을 더듬는 행위의 의도를 알고 나서부터는 요령껏 대응하며 더욱 친밀해질 수 있었다. 낙중 씨는 몸을 더듬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인지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낙중 씨의 더듬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사람은 없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한두 번 당하면(?) 그 의도를 알고 요령껏 대처하게 된다. 낙중 씨를 보려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라파엘만 오는 여자 회원도 있었다. 그 여자 회원의 말은 일관되었다. 세상에서 저렇게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아직까지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그 말에 동감한다. 처음 시설을 방문하려고 오면서 느낀 점은 나와 같았다. 불행은 기본이고 매일 좌절과 절망 속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와는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매일 신세를 한탄하고 좌절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나와 일치하는 생각이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봉사활동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같은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맑고 깨끗하고 거기다가 순수하기까지 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삶을 이어나가는 곳이 바로 우리가 혐오시설로 여기는 그곳이다. 님비현상으로 도시에서는 버틸 재간이 없어서 모두 산속으로 밀려나버린 그들이지만 그들의 영혼만은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도시에 사는 일반 사람들의 영혼을 압도할 만큼 아름다운 영혼으로 살아가고 있다. 산속으로 밀려난 덕분에 우리의 왜곡된 시선으로 상처 받는 일도 줄었다.
유럽의 수도원들이나 한국의 절들이 산속 깊은 곳이나 절벽 근처에 있는 이유와는 다르다. 단지 님비현상으로 갈 곳을 잃어 밀려난 것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해 중증 장애인이 되는 일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들은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고 자신의 집 근처에는 절대로 혐오시설이 들어설 수 없다고 격렬하게 반대하던 사람들도 있다. 우리 인간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인 분들이 많지만 일부는 각종 사고로 중증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오랫동안 집권여당의 텃밭이었고 그 혜택을 누리던 경상북도 성주에서 때 아닌 데모가 있었다. 원인은 사드 배치 반대였다. 데모하던 대학생들은 무조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던 지역의 사람들이었다. 물론 순수한 농민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이 빨갱이처럼 데모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격렬한 데모에도 결국 사드는 배치되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민주화 운동은 절정으로 치달았고 경상도 지역에서는 데모하는 대학생들은 모두 빨갱이로 호도하고 있었다. 물론 죄 없는 농민들을 그렇게 쇄놰시킨 건 언론이었다. 그런 농민들에게 민주화를 위해 목숨까지 걸며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빨갱이라고 몰아 부친 것이다. 그런데 그 대학생들이 했던 짓을 농민들이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라는 대의명분과 님비현상이라는 명분 아닌 명분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 일이다. 그들이 주장한 빨갱이들의 데모는 그렇다 치고 국익을 위한 일에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었다는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분들이 처음부터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였다면 이러한 비판을 받을 일도 없고 받아서도 안 된다. 비단 성주뿐만 아니다. 재개발 재건축과 관련해서 전국적으로 이러한 시위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생존권을 지키려는 투쟁과 님비현상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물론 성주를 단순한 님비 현상으로 볼 수는 없다. 전자파로 인한 주민 피해와 국익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자꾸 들춰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장애인 시설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점은 장애인 시설이야말로 도시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분들에게는 응급한 일이 수시로 발생하는데 안타깝게도 큰 병원과는 멀어도 너무 먼 산속에 처박혀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의를 논하고 도덕성을 논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다는 아니라는 점을 다시 부각하고 싶다. 수많은 국민들은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러한 도덕성을 갖춘 정치인이나 공무원은 가뭄에 콩 나듯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럴까? 항상 궁금하였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바로 나를 포함한 국민들이었다. 나부터 도덕성을 놓고 신상 털기를 하면 범죄까지는 아니지만 여러 문제가 발견된다. 하물며 돈 좀 있고 건물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구멍가게나 식당들도 매출 신고를 100% 정확하게 하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는 카드 사용률이 아주 높아져서 어쩔 수 없이 신고가 되어버렸지만 과거에는 현금 사용률이 압도적이었다.
세금 문제는 세발의 피다. 각종 부정부패나 부조리는 물론이고 지역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는 이 나라를 나락으로 빠트리고 있다. 청문회를 깨끗하게 통과할 수 있는 정치인이 과연 있을까?라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정치인들을 뽑아준 사람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 중에 누구를 뽑아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민들이 정치인들보다 더 많은 비리를 안고 교묘하게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최대 피해자는 월급쟁이 직장인을 비롯한 서민들이다. 버는 만큼 세금으로 정확하게 털리는 유리지갑들은 자신들이 뽑아준 정치인들이 무슨 짓을 해도 분노할 수가 없다. 누구를 찍어줘도 결과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왕이면 자신에게 금전적으로 한 푼이라도 이익을 줄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하게 된다. 자기 집 앞에 지하철을 지나게 해 역세권을 만들어 주거나 대형 쇼핑센터를 유치해 아파트 값을 올려주겠다고 하면 거기에 현혹되지 않을 국민들은 많지 않다. 그 후보가 당선되면 아파트 값이 1억이나 오를 수도 있는데 어찌 아니 찍어준단 말인가. 그래서 나온 말이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비판하고 탓할 수조차 없을 만큼 우리 사회는 천민자본주의의 수렁에 빠져 있다. 돈이면 다 된다는 논리가 팽배하게 사회를 이끌어가면서 거의 모든 국민이 이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합류하지 않고는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 일가족이 자살하는 일까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돈을 향해 달린다. 거기에 무슨 도덕성이 필요하단 말인가! 도덕성은 오히려 사치스러운 것일 뿐이다.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엄하고 존중받아야 되는 존재이다. 여기에는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된다. 조선시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물론 고려나 삼국시대도 마찬가지로 계급 사회였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지나가면 모든 평민들이나 노비들은 절을 하며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옷차림만으로도 그 사람이 양반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양반에게 절을 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양반에게는 그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참 우습기만 하다. 인본주의를 내세우며 공맹 사상을 외치며 평생 유교를 종교처럼 떠받든 사람들의 이중성을 알 수 있다. 인본주의는 사라지고 자신들의 철저한 권리와 이득만을 챙기던 기득권 세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양의 노블레스 오를 리제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멀었다. 일부 훌륭한 양반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이러한 사회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공화제를 택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철저한 계급 사회다. 과거에는 그 계급의 수직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계급의 수직 이동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 이유는 자본이 모든 것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 자본의 특성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집중된다는 점이다. 그 자본의 획득 과정에서 밀려난 서민들은 말 그대로 서민이란 계급이 되고 만 것이다. 상류층의 사회와 서민의 사회는 비교 불가다.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인간이지만 자본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기득권이 되어 보수화되고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권력을 잡으면 국가의 모든 시스템은 재벌이나 상류층을 위한 것으로 만들고 최대한 부를 축적한다. 말은 국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생색을 내지만 국민들의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져만 가고 있다. 단순히 경기 하락이나 경제문제를 탓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들의 부는 더욱 늘어만 간다. 사회나 국가 시스템을 그렇게 만들도록 일조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반 국민들이다. 그들의 호응이니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투표다. 선거 때마다 그들에게 투표하면서 경기나 탓하고 경제만 원망한다.
국민들의 인권이나 존엄성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국격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에 현혹되면서 정작 자신의 인권이나 존엄성에는 관심이 없다. 선진국의 시민 정신이 우리에게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집단 이기주의가 먼저이고 지역 이기주의가 먼저이다. 정의나 도덕성에는 관심조차 없다. 시민정신이란 바로 정의나 도덕성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일이 아닌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어떤 부패나 부조리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그만이다. 그 단적인 사례가 바로 세월 호와 용산참사 같은 사건들이다. 선진국처럼 시민정신이 투철하였더라면 결코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사고들이다.
어느 정권이든 경제지표로만 모든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 이유는 국민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경제가 항상 최우선이다 먹고사는 일이 곧 경제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심각한 국민들의 도덕적 해이와 님비 현상 등이 포함되어 있다. 아직까지도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촛불을 들어 정권까지 바꾸었지만 아직도 문제는 도덕성이라는 덫에 걸려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정치인들을 가려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단 한 명도 국회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먼저 인정하게 되었다. 사실, 한국에서 인권을 마음 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도 민주화 운동을 거친 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 전에는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문으로 쓰러져 갔다. 거기에는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있었고 물고문으로 죽은 서울대생도 있었다. 이렇게 인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많은 대학생들이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며 민주화 투쟁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대학생들도 천민자본주의 앞에서는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변절이라고 하고 신보수와 비슷한 용어들로 표현하기도 한다.
자본의 위력은 이들마저 변절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법과 도덕성은 안중에 없다. 법망은 교묘하게 피해 가면 그만이다. 도덕성은 정치인도 아닌데 굳이 도덕적으로 살 필요가 없다. 오로지 돈에만 모든 것이 집중되다 보니 각종 위법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마을에 장애인 관련 시설이 들어오면 결사 항쟁으로 막아내야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파트값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의 생활 권리나 인권보다는 자신들의 아파트값이 중요하다. 이러한 국민들이 인권을 논하고 정치인들의 도덕성을 지탄하고 있다. 너무나 이중적인 행보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이제는 철저한 권력 투쟁만 남았다. 자본을 가진 자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반면 자본을 가지지 못한 일반 국민들은 촛불이든 다른 형태든 자신들이 그동안 부의 분배에서 소외된 것을 깨닫고 자본가와 대항하고 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모든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은 자본가와 상류층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들의 입맛에 맞게 계속 유지보수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반 국민들이 대항하기에는 그들이 보유한 자본의 힘이 너무 막강하다. 그래도 국민들은 자신의 도덕성은 잠깐 눈감아두고 정치인과 상류층의 도덕성에 집단적으로 대항하고 있는 모습이다. 계급 간의 권력투쟁은 국민들이 뭉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게임이다. 그것은 바로 국민들이 시민으로 돌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총이나 칼 또는 언론보다 더 강한 것이 투철한 시민정신이다. 일단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마을부터 시민정신을 고취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이는 아주 쉬어진다. 시민정신이 투철해지면 정치인들이 지금처럼 자신들의 입맛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 시민들이 무서워서 쩔쩔맨다. 영국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속도위반 딱지가 날아오자 자신이 아닌 아내가 운전했다고 거짓말을 한 정치인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야당 대표였고 2년형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물론 그의 정치생명은 끝이 났고 영원히 복귀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이분은 내가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우리 가계에 식사하러 몇 번 왔었는데 나는 그분이 시장인 줄도 몰랐다. BBC 뉴스를 접하고서야 그분이 시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분의 죄목은 다운로드된 아동 포르노 파일을 보유했다는 것이었다. 보다가 걸린 것도 아니고 시장 실에 있는 컴퓨터에 아동 포르노 파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범죄였다. 결국 시장 직을 잃고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분도 물론 모든 정치생명이 끝나서 복귀는 불가능하다.
도덕성이란 이처럼 무겁고 엄중한 것이다. 그 도덕성은 시민들이 도덕적이기 때문에 정치인에게도 추궁할 수 있는 것이다. 시민들이 도덕적이지 못하고 썩어 있으면 정치인들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어도 뭐라 할 말이 없게 된다. 자신의 위선을 굳이 드러내면서까지 정치인을 추궁하지 않는다. 살짝 눈감아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정치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고 오로지 다음 선거만을 생각하며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다. 오죽하면 고위 공무원의 입에서 민중은 개돼지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이 말은 정말로 국민들을 개돼지로 만들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 공무원은 소송 끝에 이겼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너무도 적나라한 사건이자 사고였다. 가슴 아픈 일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 자신에게 던지는 왜?라는 물음에 분명하게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다음은 아주 간단해진다. 어떻게 해야 할지 금세 알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을 흉내 내면서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이미 나의 길이 명료하게 보이기에 이제 남은 일은 그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다. “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먼저이지 않으면 결국은 평생 남들을 흉내 내면서 세월을 허비하고 만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시간이다. 부자에게는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30시간이라고 하면 이처럼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아무리 빈부격차가 심하고 부의 불평들이 문제가 된다 한들 시간 앞에서는 평등하다.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죽는다는 사실에는 대체로 평등한 편이다. 나의 경우, 행복한 삶이란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남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어려서부터 고민하고 방황도 많이 하였다. 기존 사회의 틀이나 통념을 깨지 못해 안달을 했지만 마음뿐이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2400년 전의 공자와 2300년 전의 맹자의 사상에 갇혀 있다. 아직도 충과 효와 예 가 중요한 사회 통념이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형 노릇부터 하려고 든다.
"나는 빠른 95이니까 94 너희들은 나를 무시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나는 너희들의 친구란 말이야.
몇 달 차이도 안 나는데.
무슨 언니야!!!!
아니야, 너는 엄연히 태어난 해가 다른데 어떻게 친구니?
언니라고 불러.
알았어!!"
이런 논란은 모든 계층에서 일어난다. 나이가 무기가 된 것도 공맹 사상이 그 주범이다. 서양에서는 나이로 형과 동생 또는 언니와 동생을 구분하지 않는다. 심지어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만나도 포옹하면서 안녕 제임스라고 이름을 부른다. 시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안녕 수잔! 잘 지냈니? 물론 영어에도 존칭이 있고 극존칭도 있다.
영어는 보통 Please라는 단어를 붙이면 존칭이 된다. 왜 어른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지에 의문을 제기해봐야 한다.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른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2400년 전의 논리일 뿐이고 동양에서만 성립이 되는 논리다. 물론 서양에서도 어른 대접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른보다는 아이와 여자가 우선이다. 물론 어른에게 항상 먼저 인사하지도 않는다. 어른이 먼저 인사하는 경우도 많다. 인사에 나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나이가 중요하다.
동남아의 경우 아들과 아버지가 같이 맞담배를 피운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과 맞담배를 필 수는 있어도 아버지와 맞담배를 피울 수는 없다. 아무리 막대 먹은 망나니나 양아치도 아버지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불문율처럼 지켜온 우리의 전통이자 기본예절이다. 담배를 피우는 일은 성인이면 선택의 문제이고 너무나 당연하다. 담배에 권위를 두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담배에는 아무런 권위도 권력도 없는 기호식품일 뿐이다. 거기에 그런 엄청난 힘을 실어줄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슬람교도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쿠란에는 발굽이 네 개인 동물이라서 먹지 말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돼지 자체를 불결한 동물이라고 취급한다. 하지만 돼지는 결코 불결한 동물이 아니다. 어렸을 때 돼지를 집에서 길렀다. 돼지는 온갖 잡식성으로 못 먹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뱀도 잡아다 주면 그 자리에서 단숨에 먹어 치운다. 그리고 돼지우리 청소를 해주면 돼지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돼지우리를 깨끗하게 물청소까지 하고 마른 집을 깔아주면 좋아서 빙빙 돌며 꿀꿀거린다. 이러한 돼지를 이슬람교도들이 먹지 못한 숨은 사연이 있다. 모로코에서 이슬람교도 친구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다.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된 것은 그들의 알라신인 마호메트가 돼지고기를 먹고 배탈이 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 모든 이슬람교도들은 그 맛있는 삼겹살이나 족발 등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슬람교도 친구의 말이라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의문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초인처럼 말이다. 사회의 통념과 틀을 깨지 않고서는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길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겨우 한복만 벗고 상투만 자른 100년 전의 모습에서 그다지 많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물론 기술적인 측면은 세계를 리드하는 분야도 상당수고 선진국의 문턱에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회통념과 실생활의 괴리는 아직도 많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특히 나이 든 어른들의 행태는 도를 넘어선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버스나 지하철 등의 공공장소에서도 큰소리치며 어른 행세를 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꼰대라고 수군거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경험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현명해져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은 아집과 고집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어른이 왜 ”어른이”로 불리는지 알 것 같다. 그것도 모자라 온갖 가짜 뉴스나 사이비 종교에 현혹되어 그것을 퍼트리고 남에게 피해까지 준다. 자신의 소신이랍시고 자기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펼친다. 남의 말은 애당초 들을 생각조차 없다. 그것이 과연 그분들의 행복한 생활인지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어른 노릇이라는 말 자체도 싫어한다. 그렇다면 청년은 청년 노릇을 해야 하고 어린이는 어린이 노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는 나이로 들이대는 잘못된 말이다. 어른이 아이에게 인사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아이들은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졌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배워야 할게 너무 많다. 반면,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무얼 배워야 할지는 의문이다. 탐욕이나 투기 또는 아집과 불통을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큰소리 지르며 자신보다 나이 적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어른 행세하는 것을 배울 수도 없다. 도대체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배울 점은 무엇일까? 며칠을 고민해도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뚜렷하게 자신을 알고 자기의 생을 살아온 어른이라면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어른들에게는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어른들은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 남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걷기는 쉽지 않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가 코앞에 있기 때문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분들은 존경을 받는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묵묵히 그 길을 해쳐 나오다 보면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대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니체의 말대로 자신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가지 못하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갈릴 수 있다. 행복을 정의하는 방법은 너무도 다양하고 또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나만의 기준으로 행복 론을 펼쳐 보았다. 초인처럼 산다는 것은 매 순간 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진정한 삶이라고 니체는 강조하고 있다. 행복이란 결국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 쉽게 찾아오는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는 삶보다 더 행복한 삶이 있을까? 그 반대로 돈만 추구하는 삶은 결국은 돈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행복과 불행 사인에는 항상 돈이라는 매개체가 있다. 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한 것이 행복과 불행 사이다.
@뱀의 다리들: 제 주관적인 글입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들의 악성 댓글은 신고와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세상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는 전재로 작성된 글임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