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면 무소의 뿔처럼 용감해진다!

나를 발견하고 돌아보게 하는 봉사활동 이야기 # 5

by 런던남자

5화. 추억의 카페지기


20년 전 부산경남지역 자체 봉사활동 모습

1. 사회봉사클럽(종이시계)


봉사모임의 회원들과의 모임이나 뒤풀이 때 사회봉사클럽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사회봉사클럽을 다시 복원할 수는 없지만 그 명맥만이라도 유지하고 싶다. 나의 혼과 정열과 젊음이 고스란히 바쳐진 곳이 바로 사회봉사클럽이라는 봉사 모임이다. 1999년 12월 마지막 날 얼떨결에 만들어버린 모임이었다. 한 세기가 저물기 전에 무언가 뜻깊은 일을 하고 싶어 졌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 뜻깊은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스치듯 지나가는 단어가 봉사였다. 오래전 영국 어학연수 시절 접해보았던 일이 봉사활동이었다. 그 일을 한국에서도 해보고 싶어 졌다. 검색을 해보면 민간인이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종교 단체에서 하고 있었다. 순수한 목적인 경우도 있지만 전도라는 숨은 목적이 항상 따라다녔다.


그래서 순수한 민간 봉사단체를 만들어 운영해 보고 싶어 졌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봉사의 기쁨을 맛보게 하고 싶어 졌다. 12월 마지막 날 저녁 친구들과 송년회를 하느라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집에 돌아와 시계를 보니 11시가 지나고 있었다. 1시간만 지나면 낡은 천년이 가고 새로운 밀레니엄이 온다. 언론에서는 유난히 호들갑을 떨어 댄다. 그것도 밥그릇 싸움처럼 보였다. 즉 시청률 전쟁 중이라 좀 더 자극적인 내용들을 공중파로 쏘아 올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무리 술기운이지만 그대로 쓰러져 잘 수는 없었다. 일어나면 새로운 천년의 시작인 첫날 아침일 것이다. 간밤의 숙취로 해장국이나 먹고 새로운 천년을 시작하는 평범함을 생각하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고를 저질러야만 했다. 그래서 다음 카페에 사회봉사클럽이라는 봉사모임을 개설하였다. 잠시 후 생각하니 이건 아니었다. 내가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카페를 폐쇄하였다. 그러다 다시 생각하면 새로운 천년을 맞을 아침이 두려워졌다.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으면 나 자신의 삶은 앞으로 나아갈 동력 자체를 잃어버린 배나 다름없었다.


틀을 깨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다시 만들었다. 그렇게 다섯 번을 반복하다가 회원이 그 사이에 가입하는 바람에 폐쇄 버튼이 눌러지지 않았다.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일단 저질러 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새벽 2시까지 카페의 대문도 만들고 게시판도 정리해 배열하고 가입 환영인사까지 만들었다. 제법 카페 같아 보였다. 닉네임은 얼떨결에 해피투게더로 지었다. 나중에 회원들에게 강제로 줄임을 당하여 해투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나 보니 새로운 천년이라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태양도 어제의 그 태양이 분명하였다. 점심을 먹고 컴퓨터를 켰다. 어제 만든 카페의 마무리 작업을 하려고 카페에 들어가서 깜작 놀라고 말았다. 간밤에 회원 가입자가 50여 명이 넘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카페 꾸미기를 마무리하고 봉사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해서 봉사활동은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찾아보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찰스 다윈의 "지식보다는 무지가 더 자주 자신감을 불러일으킨다."라는 말에 동의하면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직진하기 시작하였다.


분명한 것은 봉사활동이 좋은 일이고 누군가는 나서서 총대를 메야한다는 사실이었다. 당시에는 정부에서 나서는 것도 극히 재한적인 복지만 가능하였다. 일반인들이 봉사단체를 결성하여 봉사하는 일은 일회성이거나 작은 규모였다. 예를 들면 미용이나 이발 봉사가 대표적이었다. 가끔은 짜장면 같은 봉사도 있었다. 좀 더 체계적인 봉사 단체를 만들어 일반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정기적인 모임으로 키워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불과 하룻밤 사이의 일이었지만 천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투입되었다는 자부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나의 욕심은 커져만 갔다. 한 달 정도 지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회원이 천명이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슬슬 봉사는 언제 가느냐고 질문을 해오기 시작하였다. 2월 중순경이었다. 처음으로 번개를 종로에서 열었다. 눈이 제법 내리고 강추위가 있던 날이었다. 개인적으로 신애의 집이라는 곳에서 봉사 중이던 다반향초라는 닉네임의 아가씨의 주선으로 10여 명 이상의 회원이 참여했다. 주된 관심사는 카페지기의 활동계획을 알고 싶어 했다. 언제쯤 봉사활동을 시작할 수 있느냐는 압박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날이 조금 풀리고 나서 봄부터는 시작하겠다고 무작정 선언을 해 버렸다.


덕분에 나의 생활은 갑자기 바빠져 버렸다. 퇴근 후 에는 약속도 잡지 않고 서울 외곽에 있는 시설 단체를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정말 열심히 다녔다. 마치 취업준비생처럼 면접당하는 기분이었지만 준비된 봉사활동계획서까지 제출하며 나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마침내 일산의 벧엘의 집이라는 곳에서 승낙을 받았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벧엘의 집을 나섰다. 당시 벧엘의 집은 산속에 있었다. 주위에는 논밭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의 풍경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일산의 집으로 돌아갈 때의 그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시작된 봉사활동은 광명 사랑의 집, 여주 라파엘의 집, 그리고 벽제 천사의 집까지 네 군대로 확대되었다. 매월 한번 방문이었지만 네 군데를 하면서 나에게 사적인 주말은 더 이상 없어지고 말았다.


회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네 군데를 시작하자 회원 수는 벌써 만 명을 넘어섰다. 체계적인 카페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운영진을 갖추고 각 시설의 짱을 정해주었다. 그 시절엔 그렇게 불렀다. 번개도 자주 하였고 특히 봉사가 끝나면 반드시 뒤풀이를 하였다. 뒤풀이는 항상 호프집이었다. 생맥주를 마시면서 그날의 봉사활동을 평가하고 미흡한 부분과 앞으로 개선할 부분을 논하였다. 명목은 그럴듯하였지만 나의 본심은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회원 간의 유대였다. 서로를 알고 지내면서 수시로 연락도 하면서 친목을 다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봉사활동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팀워크가 중요하였다. 그래서 회원 간의 소개는 필수였고 친목을 다져가게 하였던 것이다.

그 효과는 다음 달에 바로 나타났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던 어색했던 호칭이 바로 형이나 누나 또는 언니 같은 단어로 바뀌었다. 그 사소한 효과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였다. 서먹서먹했던 관계는 가족 같은 관계로 금방 발전하였다.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진 회원들은 점차 봉사활동에 중독되어 갔다. 부산에서 새벽 첫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오는 열혈 회원도 있었다. 그 회원은 지금도 가끔 만나서 차를 마신다. 1년이 지나자 카페는 벌써 전국적인 모임으로 발전하였다. 각 도의 지부가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회원 모집도 당연히 사회봉사클럽이라는 카페를 통해 유입되었다. 그렇게 해서 지방에 거주하는 회원들도 각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비행기를 타고 서울까지 올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만큼 전국적으로 봉사 열풍은 대단하였다. 카페의 운영진도 늘어나고 카페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아니어도 카페가 운영될 수 있다고 판단되자 정확히 1년 후에 나는 카페지기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백의종군하였다. 대신 새로운 카페지기는 회원들의 투표로 뽑을 수 있도록 회칙을 만들었다. 내가 없어도 카페는 운영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미리 적응훈련을 시키게 되었다. 카페지기는 6개월의 임기로 연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카페의 구심점인 카페지기는 선출직으로 전환되었다. 언제 어떻게 이민을 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나만의 비밀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극비 사항이었다. 결혼만 하면 직장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민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소망은 배우자를 카페 안에서 만나고 싶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였다. 봉사 활동하는 사람 치고 악하거나 나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배우자를 카페 안에서 만났고 만나자마자 결혼 준비를 하였다. 결혼식 1주일 전까지도 같은 집에서 동거하던 학교 후배 녀석조차 모르게 극비로 진행하였다. 한마디로 깜짝 결혼식을 올렸다.




20년 전 부산경남지역 자체 봉사활동 모습

2. 카페지기


IMF를 극복하면서 2000년도 초창기부터 한국에도 IT 열풍이 불었다. 수많은 포털 사이트가 생겨났고 돈 좀 있는 부자들은 여러 IT 기업에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젊은 친구들은 대기업에서 이직까지 하며 그 열풍에 합류하였다. 그 열풍에 힘입어 인터넷은 점점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도 다음의 카페는 인기가 높았다. 각종 동호회 모임들이 들불처럼 생겨났고 그 플랫폼 역할을 다음 카페가 열어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내가 세기말 밤에 술기운에 만든 사회봉사클럽이라는 봉사 카페는 무서운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일들이 현실 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모든 일이 비현실 속의 일들처럼 느껴졌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매일매일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카페지기란 자리는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었다. 단 하루도 카페를 떠나서는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할 일이 많았다. 카페 관리를 정성 들여하지 않으면 회원 가입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운명처럼 받아들였고 나 하나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고 있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냈던 날들이었다. 카페지기의 가장 중요한 일은 회원들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회원들에게 비전도 제공해야 했다. 그 비전이란 봉사활동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평생 할 수 있도록 항상성을 가지는 일종의 동기부여였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항상 회원들 앞에서는 당당해지려고 노력하였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하였다. 그런 역할을 다른 카페지기에게도 기대한다는 것은 욕심이었다.


다른 카페지기들이 카페를 운영하면서 삐걱거리고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나는 성장 통이라고 생각하고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떠나도 다른 카페지기들에 의해 운영되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초창기 카페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일은 첫 엠티를 경상도 김천 어디쯤에 있는 직지사로 엠티를 갔다. 2박 3일의 일정으로 가서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 3개의 텐트를 쳐서 매 끼니를 야영을 하면서 직접 해서 먹었다. 나는 주로 설거지를 담당하였다. 저녁을 먹고 나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둥그렇게 둘러 않아 맥주를 마시면서 노래도 부르고 게임도 하고 대화도 하면서 밤이 깊을 때까지 청춘을 불태웠다. 2박 3일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의 회원들과는 지금도 연락이 되고 있을 정도로 소중한 인연이 만들어졌다. 직지사의 봄은 따스했지만 밤은 생각보다 싸늘하였다. 남쪽이라고 이불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가 밤마다 추위에 떨었다. 덮을 수 있는 것은 다 꺼내서 덮었다. 침낭이라는 것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직지사 주변에는 봄이 한창이었다. 개나리 진달래는 이미 졌고 철쭉이 한창이었다. 그런데도 밤에는 비가 오고 추웠다. 낮에는 반팔을 입을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직지사란 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단지 그 주변의 아름다운 봄이 생각날 뿐이다. 그 찬란한 봄 속에서 꽃보다 아름다운 청춘들이 모여서 교감하고 공감 하 며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20년이란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생생하다.

술기운에 덥석 만든 카페가 이렇게 급성장해서 엠티도 가고 전국적으로 봉사 활동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나의 개똥철학이 이렇게 빛을 발할 줄은 몰랐다. 이 경험은 나의 인생의 항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무슨 일이든 도전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기 시작하였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카페지기를 다른 회원들이 시작하면서 개인 시간이 날 수 있었다. 나는 일반 회원으로 모든 봉사활동에 참여하였고 때로는 지방의 봉사활동에도 지원을 나갔다. 진정한 전국 모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는 나의 소원대로 되었고 내가 이민을 떠난 후에도 존속할 수 있었다.

절정기에는 회원수가 몇 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나의 이민이 문제였다. 내가 이민을 떠난 후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공든 탑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나에게 여러 차례 SOS가 왔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무너져가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 가슴 아픈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소중한 추억이고 무언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년이나 묵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서 빨래 줄에 널듯 말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러는 누렇게 색이 바래기도 하고 더러는 곰팡이 때문에 알아볼 수 없는 모습들이지만 그래도 그 형태만은 그대로인 이야기들이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년 전 부산경남지역 자체 봉사활동 모습


3. 내 청춘을 바치다


봉사에 봉자도 모르는 사람이 술기운에 덜컥 만들어버린 모임이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나게 발전해 나갔다. 물론 나의 심혈을 기울인 노력 덕분이었지만 여러 여건이 맞아떨어지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운대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봉사에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순식간에 회원 수는 몇 천 명을 돌파하였고 카페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방송 인터뷰도 들어오고 심지어 천만 원에 사겠다는 작자도 있었다. 나는 한마디로 거절하였지만 그 작자는 끈질기게 나를 돈으로 유혹하였다. 액수는 점점 올라가 내 연봉과 비슷해졌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카페는 천만 원이 아니라 수백억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많은 회원들이 봉사를 통해서 자아를 찾았고 자신은 완전체이고 더 이상 부족하지도 쓸모없는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회원들이 늘어났고 그 후기들은 카페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카페가 폐쇄되면서 모든 자료가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그 기록들이 남아있었더라면 많은 이야기들을 책으로 집필할 수 있는데 아무런 자료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나는 어떤 일에 몰입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예를 들어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올 때까지 파는 성격이다. 중간에 포기라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아내로부터 고지식하다는 소리를 많이도 들었고 때로는 타박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성격이 그렇게 생겨먹은걸 어찌한단 말인가!


봉사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집안은 물론 친한 친구나 직장의 직속상관의 경조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아 집안 어른들로부터 심한 욕을 먹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봉사활동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확신으로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몰입하였다. 혼신을 다해서 활동했고 몸이 아파서 힘이 들어도 절대 빠지지 않았다.


카페지기의 모범과 솔선수범은 카페가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모든 사생활도 포기하고 봉사활동에 전념하였다. 직장은 나의 휴식처이자 놀이터였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봉사활동을 하고 평일에는 직장에서 틈나는 대로 카페 관리를 하였다. 어차피 직장은 결혼을 하게 되면 바로 사직서를 낼 예정이어서 진급이나 인사고과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토익 시험도 550점이 나와서 망신을 당하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1년에 한 번씩 토익위원회에서 나와 대 회의실에서 전 직원을 모아놓고 토익시험을 치렀다. 내 아래 기수들은 토익점수가 900점대를 찍는 세대였다. 350점의 차이는 아득하기만 하였다. 나의 상사들은 400점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동기들 중에는 내 점수가 가장 높았다. 직장도 가족도 봉사활동에 걸림돌이 되면 과감히 포기하였다. 어느새 봉사는 나의 일부에서 전부로 변해가고 있었다.


예쁜 동양란을 가꾸듯 매 순간순간 들여다보며 애정을 쏟았다. 그런 애정 탓에 카페는 무럭무럭 건강하게 잘 자랐다. 어느 순간에는 꽃도 활짝 펴주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회원들 간의 분쟁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봉사활동을 하려고 나온 착한 회원들끼리 파벌이 형성되고 싸운다는 일은 이해불가였다. 그래서 분쟁에는 직접 나서서 양쪽 의견을 듣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결해 나갔다. 원칙과 기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낀 것도 잦은 분쟁이 알려준 것들이었다. 대책의 일환으로 회칙을 만들어 운영진과의 협의를 거친 후 카페에 공개하였다. 그래도 분쟁은 줄어들지 않았다. 워낙 회원 수가 많아지면서 각 짱 들이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특단의 대책을 생각해내야 했다. 초창기에는 봉사가 끝나면 무조건 각자 집으로 갔다. 뒤풀이도 몇몇 운영진들끼리만 하였다. 그래서 회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말과 글은 전달력이나 뉘앙스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카페 내의 분쟁들과 불만을 글로 올린 결과였다. 말로 하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닌데 글로 써서 올려놓고 많은 사람들이 두 편으로 갈라져 댓글 싸움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글보다는 말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그 결과 봉사 후에는 반드시 뒤풀이를 하도록 하였다. 그동안 문제점이나 서운한 점들을 생맥주 한잔 마시며 이야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나는 대로 수시로 번개 모임을 해서 친목을 다져 나갔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고 분쟁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대신 다른 문제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바로 커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봉사활동만 하면 서로 말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번개와 뒤풀이를 통해 자주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이성 간에도 친해지고 커플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놀랍게도 카페 내에서 결혼한 쌍이 아주 많았다. 물론 그중에 한 사람이 초대 카페지기였던 나였다.

영국에 살면서도 봉사활동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맨손으로 이민 온 주재에 봉사활동을 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장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 가족의 생계가 위태롭기 때문이었다. 영국에는 번화가에 옥스팜을 비롯하여 많은 체러티 숍들이 있다. 이러한 단체들은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운영방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더 이상 입지 않는 옷을 비롯하여 사용하지 않는 집안 세간들을 정리할 때 버리기보다는 체러티 숍에 기증하는 방식이다. 버리지 않고 기증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운영이 된다. 매장을 운영하는 직원들도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가끔 한국 학생들도 눈에 띈다. 영어도 배우고 영국에서 자원봉사도 했다는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어느 동네를 가든 하이스트리트에는 반드시 체러티 숍이 몇 개씩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난민이나 홈리스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체들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빅 이슈이다. 빅 이슈는 얇은 잡지다. 2.5파운드 정도 하는데 나도 많이 사주었다. 놀랍게도 한국에서도 빅 이슈를 판매하는 모습을 보았다. 바로 삼성역 코엑스 출구에서였다. 너무 기뻐서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를 돕는 일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돕는다는 단어의 인식이다. 무상 급식도 마찬가지다. 그냥 학교급식 또는 급식이라고 하면 논란의 소지가 없다. 그런데 그 앞에 굳이 “무상”이라는 생경 맞은 단어를 집어넣고 생색을 내는 일이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였다. 그 단어 하나 때문에 두 편으로 갈리어 찬성파와 반대파가 극렬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모 서울시장님은 시장 직을 걸고 투표를 하는 일까지 감행하였다. 학생들에게 소중한 한 끼의 밥을 놓고 정치인들이 추한 도박을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고 결국 그 시장님은 약속대로 시장 직에서 그리고 정치판에서 물러나야 했다.



영국처럼 학교와 병원 전체가 무료는 아니어도 우리의 미래인 학생들의 급식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위인들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단어인 “국격”을 논하고 있다. 툭하면 이재용 아들도 공짜로 밥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들고 나온다. 모든 학생들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당연히 이재용 아들도 똑같이 대접받아야 한다. 재벌 아들이라고 황금덩어리라도 씹어 먹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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