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겪은 1인 가족 고독사 사회문제를 연재하다.
볼펜으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테오도라 어머니의 편지는 A4 용지의 절반을 채우지 못하였다. 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써 내려간 편지에는 어머니이기 이전에 나이 든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가 가득하였다. 힘이 잔뜩 들어간 글씨체는 진했고 많이 흔들려 보였다.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었다. 또박또박 써 내려간 활자들은 저마다 간절함을 품고 흐느끼고 있었다. 마지막 미사에서 엄마는 딸에게 미안함을 편지를 읽으며 애절하게 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나의 동생은 우리 곁을 떠나갔다. 테오도라라는 이름으로 된 납골 항아리에 담긴 채 서울 외곽의 한 추모공원에 안치되었다.
검은색 정장의 흰색 장갑을 낀 직원의 손에는 스크루 드라이버가 쥐어져 있었다. 4개의 나사가 4개의 모서리를 조이는 데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직원의 손길은 무겁고 정중하였지만 능숙함을 잃지 않았다. 퇴근시간이 임박해서인지 나사를 조이는 속도와 정교함은 놀라웠다. 그렇게 테오도라는 천주 교실 2층 라인의 중간쯤에 한 장의 사진과 한 장의 편지와 함께 영원히 잠들었다.
금요일 저녁 1박 2일의 무인도 여행을 마치고 일행과 함께 유진상가 근처에서 삼겹살로 뒤풀이를 하였다. 오랜만에 소주에 삼겹살로 금요일 저녁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동생은 서울이라는 거대한 무인도의 어느 건물 4층에 100일째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건물 주변에는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초여름 날씨로 변하였고 경북 영천은 30도를 넘어섰다는 것이 뉴스가 되었다. 4층에서 악취가 난다는 주민의 신고는 한 달 전에도 있었지만 무시되었다. 무시된 악취는 다시 주민들에게 신고를 하게 만들었다. 테오도라의 죽음은 30도라는 온도를 빌어서 마침내 세상에 알려졌다.
어린이날 황금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샤워를 하고 전주의 결혼식장으로 향하였다. 시간은 7시를 약간 넘어서고 있었다. 정체를 예상하여 서둘러 출발하였다. 황금연휴와 겹쳐서 7시인데도 정체가 시작되었다. 평소 이용하던 구리 판교 간 고속도로를 포기하고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하였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반대로만 따랐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비게이션을 따라 운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기도를 벗어나는 데만 3시간 이상이 걸렸다. 간밤의 악몽은 숙취보다 더 나를 괴롭혔다. 도로는 설 명절의 정체를 능가하였다. 결국 전주에 도착하니 결혼식은 끝났고 연회장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점심식사는 갈비탕이었다. 호텔 음식이 그렇듯이 갈비탕의 갈비는 뼈를 서너 개 발라내면 먹을 게 없었다. 두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비우며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 간에 인사를 주고받았다. 물론 신랑 신부와의 인사도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내려온 하객들은 나처럼 그렇게 늦게 도착하고 있었다.
사고는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 전해졌다. 호텔의 테이블은 원탁이어서 테이블 당 8명 정도가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어서 하객은 다 돌아가고 가족과 친지들만 남았다. 내 바로 옆에 앉아있던 사촌 여동생이 전화 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나의 촉수는 빠르게 더듬거리기 시작하였다. 간밤의 악몽과 아침의 두 개의 넥타이가 먼저 촉수에 반응하였다. 넥타이중 하나는 검은색이었다. 나는 그 넥타이를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다 둥글게 말아서 옷장 한쪽에 찔러 두었다. 기분이 참 묘하였다. 악몽 또한 평소에는 꾸지 않던 진기한 것이었다.
그렇게 테오도라의 사망 소식은 경찰서에서 가족에게 전달되었다. 서울이라는 무인도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방식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순간 호텔의 식당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울음바다로 변한 호텔의 식당에서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하였다. 나는 동생의 전화기에 찍힌 번호로 다시 확인 전화를 하였다. 동작 경찰서 경찰관과 통화가 이루어졌다. 010으로 시작하는 휴대전화 번호였다. 그래서 보이스피싱을 의심하였다. 제발 보이스피싱이길 바라던 나와 가족 친지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렇게 해서 100일 만에 테오도라의 죽음은 가족들에 알려졌다. 화창하고 화사하기만 한 봄날의 하늘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튼 토요일 오후에 나의 하늘은 무너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것도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사촌들은 전주역에서 입석으로 서울로 급히 올라갔다. 나는 테오도라의 어머니를 태우고 집에 들러 장례준비를 할 수 있는 채비를 갖추기까지 기다렸다. 테오도라의 어머니는 생각과는 달리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믿음의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7시간을 운전한 나에게는 잠깐의 휴식이었다. 다시 서울로 4시간의 운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허리디스크 통증은 나를 계속 압박하고 있었다. 4시간 만에 서울의 동작경찰서에 도착하니 테오도라의 오빠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신원 확인은 끝난 상태였다. 1시간 이상의 진술 조서를 작성하고 바로 시신이 안치된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시신의 훼손 상태가 심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빈소도 차리지 못하고 테오도라는 떠나갔다. 피붙이 하나 없는 가엾고 처량한 영혼이었다. 무신론자인 내가 신의 가호를 빌고 있었다. 안타깝고 있을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나의 영혼도 무너져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죽음은 처절하고 아프게 비참함을 유지한 채 슬픈 현실로 나오고 있었다.
어린이날 황금연휴가 끝나고 화요일 오전에 부검이 이루어졌다. 부검의들도 연휴를 즐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사인불명이었다. 오후에 발인과 동시에 새로 생긴 서울의 화장장에서 화장이 이루어졌고 서울 외곽에 안치되었다. 새로 생긴 화장터는 주민의 반대로 납골당은 없었다. 단지 화장만 가능하였다. 시설은 현대식으로 깨끗하고 위치도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시민이어서 화장 비용은 저렴하였다. 모든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산자는 각자의 몫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깊은 슬픔은 여기저기 허공 속에서 흐느끼듯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테오도라는 화장을 마치고 벽제로 향하는 버스의 기사 뒷좌석에 실려 있었다. 납골 항아리에 담겨 보자기에 싸인 채였다. 나는 서초에서 벽제까지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그 항아리를 안고 있었다. 항아리가 깨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들어있는 항아리는 처음에는 미지근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뜨거워졌다. 그렇게 본인의 억울함을 체온으로 전해오고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그 체온을 느끼고 받아들였다. 산자가 죽은 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인사였고 대화였다. 죽은 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벽제 인근에 오자 그 체온은 싸늘해지고 있었다. 나는 끝까지 눈물을 눈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어머니 죽음 때와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죽음은 삶의 연장이고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 달려있다. “어머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까뮈의 이방인에서 느낀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절망이 엄습하였다. 뉴스나 소설책에서 접할 수 있는 일이 지금 내 앞에서 현실이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그 현실은 테오도라와 나와의 관계를 집요하게 연결하고 있었다. 그렇게 연결된 관계에서 눈물도 없는 절망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세상에는 나와 타인이라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만이 존재하였다. 테오도라는 철저하고 비참하게 타인으로 죽어갔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무인도는 젊고 아름다운 테오도라의 몸에서 사정없이 악취를 뽑아내고 있었다.
슬프고 부끄러운 가족 이야기를 글로 꺼내기까지는 많은 고심이 있었다. 하지만 제2의 테오도라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용기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