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겪은 1인 가족 고독사 사회문제를 연재하다.
테오도라는 누워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겨울에서 봄을 거처 초여름의 문턱을 노크하고 있었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수은주는 초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에어컨을 켤 수도, 창문을 열 수도 없는 몸으로 누워서 더위와 싸우고 있었다.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자신이 누워있는 전기장판은 100일 동안이나 켜졌다 꺼졌다 하는 일을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이 전기장판으로서의 자신의 의무였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아주 단순한 기능은 또 다른 인간을 그 위에서 미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슬프고 안타깝다. 테오도라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의 몸을 부패시켜 냄새를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그 냄새를 통해 세상의 무정한 타인과 접선을 시도하고 있었다. 겨울에는 그 시도가 쉽지 않았고 효과도 전혀 없었다.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냄새는 강렬해야만 하였다. 그러려면 일정 온도 이상으로 올라가야만 가능하였다. 온도를 올려주는 전기장판도 매개변수로 작용하였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하였다. 밀폐된 집의 4층에서 지상으로 내려가려면 초여름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5월까지 기다린 것이다.
매일 누워서 자신의 말라비틀어져가는 육신을 바라보며 그녀의 슬픈 영혼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처절하게 혼자일 수밖에 없는 세상을 탓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자신을 탓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마음과 처지를 이해해주는 오빠인 나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조차도 그녀가 사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지난해 가을에 한국에 와서 만나기로 여러 번 날을 잡았을 뿐이었다. 서로 일정이 자꾸 뒤틀려서 만남 또한 뒤틀리고 말았다. 12월 3일이 마지막 주고받은 대화였다. 지극히 평범한 안부만 묻고 말았다. 힘들지?라는 위로나 격려의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였다. 어색하고 형식적인 짧은 대화는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 전에도 같은 대화가 몇 번 이루어졌지만 3교대란 간호사 직업 특성상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로가 힘든 처지에서 만나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오빠로서의 힘이 되어주지 못하여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녀도 오빠가 힘들어하는 것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에 직업인으로서의 죄책감까지 느꼈다는 말을 몇 번 하였다.
잘 지내지?
오늘 저녁에 근무하니?
네 이브닝 근무예요
시내에 나왔는데 근무 안 하면 저녁이나 하려고 했었지.
아 네∼오빠는 별일 없이 잘 지내죠?
응 매일 병원 다니며 잘 지내
아 네!
연말연시가 되면서 나 또한 심각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아무도 만나기가 싫었다. 아니 만날 사람이 없었다. 나 또한 철저하게 고립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되고 A형 독감에 걸리면서 그 우울은 극을 달렸다. 죽고 싶은 생각을 이기려고 정신과에 매주 두 번 찾아갔다. 월요일과 목요일에 3번 방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젊은 선생님 앞에서 나의 모습은 점점 작아져만 갔다. 자존감을 지켜 나답게 산다는 것은 사치이고 지극히 이론적인 비현실적인 것일 뿐이었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약을 복용하며 그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그 위기를 넘기고 설날 연휴가 찾아왔다.
설날에 해외여행을 가려다 고향집으로 향하였다. 가족들을 만나면서 정신이 좀 들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찾지 못하였지만 최소한 죽을 이유를 떨쳐낼 수는 있었다. 세상은 내가 살아도 죽어도 관심이 없었다. 슬퍼할 사람도 많지 않다고 생각하니 굳이 서둘러 죽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힘을 얻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트렁크에 가득 싣고서 서울로 향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시골집은 더 이상 마음의 고향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그렇게 텅 빈 트렁크로 돌아와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 공간을 용기라는 것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연휴 동안에 테오도라는 나와는 정반대의 길을 택하였다. 그 길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제발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설날 연휴는 두 사람의 희비를 갈라놓고 말았다, 세상이 무슨 자격으로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미안하고 가슴이 저려온다.
계절은 바뀌어서 테오도라가 기다리던 5월이 왔다. 4월이 가는 것이 너무 못마땅하였다. 한국의 봄은 짧고 개념이 없었다. 어렸을 때 보았던 그 아름다운 봄이 더 이상 아니었다. 꽃들은 미세먼지와 싸우고 있었다. 벚꽃이 어디에 어떻게 피었는지도 몰랐다. 가까운 여의도에도 가보지 못한 채 벚꽃은 속절없이 지고 말았다. 온도는 널뛰기를 하며 가끔은 초여름의 날씨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 잔인한 100일은 5월이 되어서야 비축하고 응축해둔 냄새를 밀폐된 집안 밖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아름답고 젊은 여자의 향기로운 냄새가 아니라 지독한 악취를 몸에서 뽑아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건물이나 이웃의 타인들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20대의 젊은 테오도라는 아름다웠고 많은 꿈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꿈을 세상에 내주면서 그녀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나로서는 곁에서 맥주 한잔이라도 사주며 토닥여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나의 관심은 철저하게 내가 여유가 있을 때만 발산되는 이기적인 것이었다.
5월의 첫 번째 목요일과 금요일에 나는 사승봉도라는 무인도에 있었다. 이유는 현실 속의 무인도 체험이었다. 모 방송국의 특정 프로의 촬영 팀과 우리 일행은 모두 7명이었다. 그동안 마음속에만 그리던 비현실 속의 무인도는 그렇게 현실로 다가왔다. 섬은 작고 아담하였지만 아름다웠다. 규사로 이루어진 백사장은 물이 빠지면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광활하였다. 마치 사막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무인도 체험은 말 그대로 궁핍과 자유를 교환하는 일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인도라는 곳에 가보고 싶어 졌다. 아마 7년 전의 어느 시점인 거 같다. 40대 중반의 그 시점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립감이 불쑥 찾아왔다. 그리고 그 고립감에 시달려야 했다.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고립감은 외로움과 우울이라는 두 가지 선물을 동시에 선사하였다.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이지만 뿌리칠 방법이 없었다. 그 두 가지 선물을 고스란히 마음속에 간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내 마음속에는 무인도가 생겼다.
비현실 속의 무인도에서 아파하고 힘들어하면서 현실 속의 무인도를 동경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가면 외로움과 우울이라는 선물을 내려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인도라는 텅 빈 공간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단지 기대에 불과하였다. 혼자서는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무인도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 기회는 그리 익숙하거나 달갑지 않은 방송 촬영이 조건이었다. 그래서 며칠을 심각하게 고민하였고 가지 않기로 하였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무인도로 향하고 있었다. 무인도로 가려면 승봉도에서 민간 어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사승봉도는 사유지이기 때문에 사전 승인과 어선 예약이 필요하였다. 사유지인 섬에 들어가려면 1인당 만원씩 내야 한다. 모든 비용은 동행한 촬영 팀의 방송국에서 지불하였다.
무인도에서 지낸 1박 2일간의 시간들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도시의 편리한 삶에 비해 무인도의 궁핍과 허기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였다. 드넓은 백사장과 바다는 모든 타인들과의 관계마저 차단하였다. 진정한 고립을 느끼기에는 일행이라는 걸림돌이 있었다. 그래도 나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외로움과 우울을 내려놓으려 애썼지만 여의치 않았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무인도나 사승봉도라는 작은 무인도나 내게는 같은 무인도였다. 결국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하고 섬을 떠나왔다. 그래도 섬을 떠나올 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현실과 비현실의 무인도는 다른 듯 닮았고 닮은 듯 달랐다.
금요일 저녁이 다 될 무렵에야 섬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처음 배가 출항한 인천 연안여객터미널 주차장에서 촬영 팀과 우리 일행은 헤어졌다. 그렇게 짧은 무인도 체험 겸 촬영 일정이 끝났다. 무인도에서의 모든 것들은 불편하였고 허기가 항상 딸아 다녔다. 먹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무의식의 본능이 솟구쳤다.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각자가 준비해온 라면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1박 2일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을 것이다. 반칙이고 편법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팀의 리더 격인 친구만 믿고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지만 이미 늦었다. 자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허기를 해결해야 하였다. 배고픔은 모든 것을 정지시켜 버렸다. 그 아름답던 섬은 때가 되었는데도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자 상막한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 끼를 해결한다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섬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채취나 수렵으로 끼니들을 해결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리는 야생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온실 속 화초임을 재확인 채 씁쓸하게 육지로 돌아왔다. 마치 패잔병이 된 기분이었다.
인천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은 상당히 지쳐있었다. 나는 우리 일행을 가는 길에 집에까지 데려다 줄 생각으로 내차에 태웠다. 무인도를 체험하게 해 준 감사의 표시를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주차요금 이만 원을 카드로 지불하였다. 주차요금은 하루당 만원이었다. 항구 근처의 거리들은 연안부두여서인지 대형 화물트럭들이 거리를 매우고 있었다. 그 커다란 덩치에 기가 죽었다. 도로는 어수선하고 무질서해 보였지만 나름대로의 규칙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동이 되고 있었다. 금요일 퇴근 무렵과 겹치면서 늘어나는 차들로 도로는 막히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작은 사고까지 겹쳤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정체가 심해 갔다.
이틀 동안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해서인지 배가 너무 고팠다. 하는 수 없이 중간 지점인 홍제동 부근에서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하였다. 메뉴는 모두가 무인도에서 그렇게 노래 부르던 삼겹살이었다. 삼겹살에 소주가 빠지면 이상해지는 분위기였다. 불금을 즐기고 무인도 체험을 자축하려면 건배가 필요하였다. 자연스럽게 소주를 주문해서 본격적인 뒤풀이가 되어버렸다. 유진상가 부근의 삼겹살은 소주를 자꾸 부를 정도로 맛이 있었다. 삼겹살의 한쪽 면이 완전히 익을 때까지 절대로 뒤집지 말라는 사장님의 당부가 있었다. 우리는 군침만 흘리며 한쪽 면이 익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뒤집을 타이밍을 보며 소주잔을 비우고 있었다. 결국 사장님의 승인이 떨어져서 뒤집을 수 있었다. 삼겹살이 완전하게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우리들의 눈빛은 굶주린 하이에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마침내 삼겹살이 완전하게 익자 가위로 자르기 시작하였다. 자르기가 무섭게 각자의 젓가락질은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삼겹살 3인분이 불판에서 사라졌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무인도에서 굶주린 보상을 받고 싶어 졌다. 어느 정도 허기가 채워지자 이번에는 소고기도 먹고 싶어 졌다. 차돌박이 3인분을 시켰다. 그렇게 호사를 누리며 뒤풀이는 절정에 달하였다.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무인도에서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배고팠던 경험은 벌써 아련한 추억처럼 무용담이 되어가고 있었다.
황금연휴가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의 거리는 활기로 넘쳤다. 우리가 삼겹살 파티를 하는 식당도 사람들로 넘쳐났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손님들 목소리의 톤은 점점 높아져 갔다. 사람들의 얼굴들은 이미 불그스레하게 물들고 있었다. 반찬 하나하나 밥 한 공기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문명의 이기는 편리하고 익숙함을 새삼 되새기고 있다. 고기가 뭐라고 오가는 대화들은 온통 무인도에서 헐벗고 굶주린 이야기들뿐이었다. 좀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바랐던 나의 욕심은 금방 꼬리를 내렸다. 무인도에서 바라본 속세의 우리는 모두가 타인들이었다. 타인들이 모여서 타인들의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 타인들은 백사장의 모래알만큼이나 서로 관계 정립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모래가 쌓여있어도 모래는 모래일 뿐이었다. 모래가 바위가 되는 일은 없었다. 천만의 인구는 모든 모래만큼이나 많은 타인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서울은 타인의 도시였고 거기에는 타인의 시간과 타인의 계절이 흐르고 있었다.
일행 중 리더 격인 20대의 젊은 친구는 소주를 전혀 마시지 못하였다. 무인도 체험으로 굶주린 금요일 저녁에는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섬에서 나오자마자 삼겹살과 차돌박이를 소주와 함께 먹는 호사를 누렸다. 그렇게 뒤풀이는 끝나고 대리기사를 불러 집에 가는 길 중간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을 내려주고 도착하였다. 대리기사 비용은 삼만 오천 원이었다. 집 앞에 도착하여 오만 원권을 내자 만 오천 원을 거스름돈으로 주고 대리기사는 버스 정류장 쪽으로 멀어져 갔다. 그렇게 또 한 사람의 모래알 같은 타인과 멀어지고 있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시작되고 있었다. 4월이 그렇게 빨리 가리라고는 예상치 못하였다. 두어 차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자 꽃들은 떨어지고 신록이 진해지기 시작하였다. 연한 녹색의 이파리들은 서로 경주라도 하듯이 하루가 다르게 색을 입혀가고 있었다. 색소는 녹색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분주하였다. 녹색이라는 색상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덩달아 의 기온도 올라가고 있었다. 하만 봄의 향연은 찰나였다. 꿈에 그리던 남도의 봄은 짧았다. 4월 초에 벌써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4월의 세상은 연한 초록이 지배하였다. 남도뿐만 아니라 수도권에도 그 색상들은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있었다. 매일 그 속도를 감상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였다. 하지만 봄이 가는 아쉬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마음 한 모퉁이에 구멍 난 것처럼 그렇게 봄은 연기처럼 스멀스멀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번 봄에 여동생이 갑자기 남도의 월출산에 식당을 차리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남도에 갈 일이 많아진 것이다. 20년 만에 맞이하는 한국의 봄은 기대가 컸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아련하고 막연하게 그리워하던 봄 풍경은 남도의 봄이었다. 남도는 마음의 고향이자 실제 고향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맞이했던 봄들은 일종의 향수병처럼 한국의 봄과 비교를 당하였다. 아름다운 영국의 봄인데도 불과하고 내게 평가절하되기 일쑤였다. 한국, 그것도 남도의 봄과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었다. 꿈에서나 그리던 봄을 찾아서 주말에 몇 차례 남도에 다녀왔다. 명목은 식당일을 도와주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남도를 몸으로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남도의 봄은 텅 빈 공허감만을 주고 본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들판은 화사하였지만 인적 없이 싸늘하였다. 산들은 제각각의 꽃들로 잔치를 이루고 있었지만 적당한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분수에 맞게 그렇게 각자의 몫을 치르며 봄이라는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5월의 첫 주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낀 황금연휴였다. 달력을 잘 보지 않기 때문에 5월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집에는 그 흔한 시계조차 두지 않고 살고 있다. 무소유는 아니지만 단순한 생활을 추구하다 보니 방에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침대도 이사 들어오면서 버렸다. 그렇게 작았던 방도 이젠 제법 넓어 보인다. 구치소로 치면 대통령이 수감되는 특실 정도 되는 방이거나 조금 더 넓을 것이다. 휴대폰의 다이어리에는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무인도 체험이, 토요일에는 전주에서 조카의 결혼식이 메모되어 있었다. 친 조카들 중 첫 번째 결혼식이기 때문에 빠질 수 없었다. 집안에서는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결혼식이었다. 중요하지 않은 결혼식이 어디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니 괜히 씁쓸해진다. 결혼식이 끝나면 다시 남도를 여행할 마음에 무인도를 가기 전부터 마음은 들뜨고 이미 남도에 가 있었다.
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혼자만의 시간들을 갖고 싶었다. 혼자지만 남도에서의 혼자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고독과는 다른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 나서고 있었다. 그것이 외로움인지 우울인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어쩌면 둘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가 아닌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