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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Oct 25. 2019

#28주 차, 여보 잠깐 바람 좀 피우고 올께

하루 만에 책 쓰기로 매주 한 권 책 쓴다(2019년 8월 19일)

Note: 하루 만에 책 쓰기로 매주 한 권 책 쓰기 프로젝트는 나의 평생 프로젝트로 2019년 2월 11일 월요일에 춘천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죽기 전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을 소망한다. 만일 이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면, 나는 이미 질병과의 전투에서 1패를 기록하며 다른 별로의 고독한 여행을 시작하였을 확률이 아주 높다.




@ 부제: 바람피우는 남자는 아내를 비난하고, 아내는 남편을 비난한다. 결혼할지 말지 고민한다면 그 사람과 70년을 대화할  있을지 생각하라.

@ 분량: 이북 기준 161페이지(폰트 22)

@ 판매: 블로그 서점(https://blog.naver.com/jebyi)



프롤로그


진실이란 무엇일까? 도덕이라는 것이 인간 본연의 감정보다 상위 개념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언제부터 그렇게 하자고 하였을까? 왜 부부 사이에는 숨겨야 할 일이 그리도 많을까? 좀 솔직하면 안 될까? 휴대폰은 왜 락을 걸어서 배우자가 보지 못하게 할까? 물론 부부 사이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고 사생활이 있다. 그 사생활과 사생활의 간극에는 무엇이 숨어 있어서 휴대폰마저 락을 걸어야만 하는 것일까?  


정상적인 부부는 물론이고 사랑이 떠나간 부부 사이에도 숨겨야 할 일들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이혼이라는 절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 배우자의 애인들이나 연애 사실도 모두 극비에 해당된다. 우리 대부분은 마치 첫사랑처럼 연애해서 결혼한다. 수많은 애인이 바뀌고 심지어 요즘 젊은 세대들은 분기 또는 매년 바뀌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초등학교 때부터 연애를 시작한다. 풋내 나는 사랑도 사랑인 것이다. 사랑에는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시대와 국경까지 초월하는 힘이 있다.


우리 인간이 각자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건 중의 하나는 사랑이다. 사랑 없는 성공이나 행복도 공허하고 무의미할 뿐이다. 문제는 타인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타인을 사랑하는 일처럼 모순된 행위는 없다. 사랑이 없는 삶은 불행한 삶이고 사랑이 떠나간 자리는 공허하고 적막할 뿐이다.  

   

무더위가 한창인 요즘 카페에 가보면 학생들이 카페를 마치 도서관처럼 이용한다. 내가 이용하는 동네 카페는 24시간 개방한다. 그중 많은 학생들이 커플이다. 하루 종일 옆에 붙어있으면서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하면서 효율적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 부러우면 진다는데, 그래도 부러울 뿐이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하는 장면들이다. 공부는 당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하는 것이고 도서관에서는 침묵과 정적만이 흐를 뿐이었다. 커플들이  옆자리에 앉아있을 수는 있지만 카페처럼 떠들고 스킨십을 하는 행위는 할 수 없었다. 물론 눈치껏 적당히 스킨십을 하는 커플도 있기는 하였다. 지금도 도서관에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도서관의 역할을 카페에게 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다 머지않아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사라져 갈 수도 있다. 영국의 덩치 큰 전통 선술집이었던 펍들이 사라 지듯이 말이다. 아니면 도서관도 카페처럼 변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도서관마저도 생존을 위해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혼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는 이혼한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그리고 법률상으로는 부부지만 이미 사랑이 떠나간 상태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가정까지 합한다면 이혼율이 30%가 아니라 거의 50%에 육박하거나 넘을 수도 있다.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이혼하는 것일까? 이혼하는 부부들도 연애시절에는 하루라도 못 보면 죽고 못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럼 사랑이 식어서 이혼이나 별거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사랑은 왜 식는 것일까? 물론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 너무 쉬운 일이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왜 이토록 쉬워 보이는 일을 나머지 절반은 하지 못하는 것일까? 불행하게 결혼 생활을 끝내는 일이나, 자의든 타의든 몰래 외도를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점점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라고 불리는 우리 모두는 동물적인 기본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기본적인 욕구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해결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수도자나 성직자가 아닌 이상 욕구에 충실하는 일을 탓할 수는 없다. 도덕적인 잣대나 기준이 개인의 사생활까지 통제하는 세상이다. 얼마 전 간통법이 폐지되었을 때를 돌이켜 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하였던가! 나중에 드러나고 있는 사실이지만 반대를 했던 분야의 성직자들은 간통보다 더 심한 강간까지 일삼고 있었다.      


그 욕구 자체도 자기를 사랑하고 신에게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둘러댄다. 극히 일부지만 성직자들도 이러한데, 일반인들의 유혹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도 전제는 금슬이 좋은 부부는 논외로 한다.  부부라는 이유만으로 소 닭 보듯이 한 지붕 두 가족처럼 사는 부부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들도 아내이기 전에 여자고 남편이기 전에 남자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이기 전에 동물인 것이다. 동물적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욕구를 해결해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선다.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짓을 왜 해야만 하는 것일까? 답은 너무 간단하고도 명료하다. 외롭기 때문이다. 이미 부부 사이에 사랑이 빠져나간 공간은 황량한 바람이 불 뿐이다. 사랑이 서로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외도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무늬만 부부인 사람들은 거의 동물적으로 자신의 새로운 짝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수도자가 아닌 평범한 본능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 모두가 쉬쉬하는 너무도 민감한 부분이고 자칫 거대 담론으로 번져 몰매를 맞을 수도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몰매를 맞을 각오도 하고 있다. 나는 다만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참된 사랑은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오입질과 사랑의 경계를 가르는 것은 바로 낯섦이다. “라고 하였다. 사랑받기 위한 기본 단계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서로를 이해해야 사랑이 생긴다는 것이다. 한 번의 이상한 맞선을 경험한 니체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평생을 홀로 수도승처럼 고독을 즐기며 살다 간 사람이 사랑을 논한다는 것은 어쩌면 모순일 수도 있다. 그가 실제로 경험한 질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는 법륜 스님이 가정사를 상담해주는 것도 그렇다. 한발 물러서면 더 잘 보일 수는 있다. 바둑이나 장기의 훈수꾼들처럼 말이다.    

 

사랑이란 단지 남녀 간의 사랑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이 떠나간 자리가 공허하듯이 사랑이 없는 삶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남편들이, 그리고 아내들이 배우자 몰래 다른 사랑을 찾아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이러한 행위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꿈만 꾸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의 본능과 도덕성이란 가치 사이에서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는 본능대로만 살 수는 없다. 본능은 언제든 무시당하고 억제당할 수 있는 것이다. 욕구를 통제하고 통제당하는 일이 동물과의 가장 큰 차이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도덕성 앞에서 본능이 설 자리는 지극히 제한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존감을 논하고 자기애를 말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풀어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행복이란 결국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자신이 먼저 만족해야 한다. 일반인들이 성직자처럼 살고 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사랑이 따나 갔다고 이혼부터 할 수도 없다. 결혼은 쉽지만 이혼은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특히 자식 문제는 가장 큰 난관이다. 자식들을 위해 참고 사는 부부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금욕을 해야 할 이유나 명분, 그에 대한 보상이 충분하다.


열녀비로 여성의 순결과 지조를 강조하고 억압하던 조선시대라면 모를까! 우리는 인권과 남녀평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 일반인은 수도자가 아니다. 수도자처럼 살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래서 더욱 힘든지도 모른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사랑 중에서 어떤 것이 우선일까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이유다. 이유를 막론하고 자녀들이 성장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소중한 보금자리는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 최소한의 법으로나마 개인의 본능과 행복을 강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도덕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 인간의 업보일 수밖에 없어 더욱 안타깝다.





@ 목차:


프롤로그     


1. 왜 딴생각들을 할까?

1장, 남편들의 불만

2장, 아내들의 불만

3장, 성격차이란?   

  

2. 외로움과 고립

1장, 비밀이야!

2장, 사/오 춘기와 갱년기

3장, 무인도     


3. 버티는 삶 뒤에

1장, 아내도 여자였다

2장, 아이들만 아니면

3장, 남편이 죽었으면      


4. 이혼하는 사람들

1장, 이혼 꼭 해야 하나?

2장, 자유와 책임

3장, 혼자 사는 즐거움    

 

5. 사랑이 없는 삶

1장, 왜 사랑은 힘들게 할까

2장, 사랑이 떠난 간 공간

3장, 사랑하고 싶다     


에필로그




에필로그


다소 터부시 되는 주제로 현실을 꼬집고 싶었다.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문제 전반에 만연한 가정불화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영국이나 한국이나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은 외도를 하고 있다. 물론 건전하게 잘 사는 부부도 많다. 외도를 정당화시킬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고 그럴 의사도 전혀 없다. 외도는 해서는 안 되는 비도덕적인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외도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 이러한 문제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을까? 아니면 지금처럼 그냥 각자의 사생활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정부나 지자체가 나서서 외도하지 말고 바르게 삽시다.라고 선도나 계몽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확연하게 줄어든다. 그렇다고 전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심각한 가정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욕구를 틀어막고 수도자처럼 평생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부가 서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가정에서 각자가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두고 외도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이혼을 요구하는 일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논란의 소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쉽사리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주제다. 언제나처럼 종교단체에서 제일 먼저 들고일어날 것이다. 위선의 탈을 쓰고 신의 이름을 팔아먹는 자들이 누구보다도 앞장설 것이다.   


니체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비심은 친절하고 선량한 마음이다. 다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군자의 마음이다. 그 어떤 일을 하거나, 그 어떤 말을 할 때, 그 어떤 생각을 할 때도 늘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이 세상을 지탱하고 세상에 행복과 즐거움이 있게 한다. 또한 서로 존중하고 화목하며 의심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온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세상 사람 모두 다 안락하게 된다.”     


즉, 세상을 지탱해 나가는 힘을 사랑으로 본 것이다. 부부간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람인 이상 사랑이 영원히 식지 않을 수는 없다. 음식도 마찬가로 식으면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된다. 사랑도 식으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다시 데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번 식었다고 폐기 처분해 버리면 그건 일회용만도 못한 사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부디 많은 부부들이 사랑에 아파하지 않고 사랑에 행복해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9년 8월 19일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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