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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Nov 01. 2019

#33~34주차,나는 매월 한번 외도하러 간다 1,2

#33~34주 차, 매주 한 권 책 쓴다(2019년 9월 22,29일)

Note: 하루 만에 책 쓰기로 매주 한 권 책 쓰기 프로젝트는 나의 평생 프로젝트로 2019년 2월 11일 월요일에 춘천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죽기 전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을 소망한다. 만일 이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면, 나는 이미 질병과의 전투에서 1패를 기록하며 다른 별로의 고독한 여행을 시작하였을 확률이 아주 높다.




@ 부제: 운명처럼 시작된 봉사활동은 나의 인생은 물론 가치관을 재정립시켰고 항로를 바꾸었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은 것이 봉사활동이다. 

@ 분량: 이북 기준 총 400페이지(폰트 22)

@ 판매: 블로그 서점(https://blog.naver.com/jebyi)




프롤로그


1999년 12월의 마지막 날 저녁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동원하여 지구 상에 살았다는 영역표시라도 해야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다음 카페에 ”사회봉사클럽“이라는 봉사 단체를 개설하는 것이었다. TV에서는 세기말의 진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치열한 샅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언론과 종교단체 등에서 금방이라도 인류 최후의 날이 올 듯 떠들어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21세기는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이 올 거라며 떠들어 대기도 하였다. 근거 없는 낙관론은 벌써 상당 부분 현실이 되었다. 


그 마지막 날에 나는 봉사가 무언지도 모르고 일단 저질러 보았다.
 1시간 동안 다섯 번이나 카페를 만들고 폐쇄하기를 반복하였다. 봉사모임을 이끌어갈 수 있는 경험도 없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계는 어느덧 11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결국 마음은 폐쇄하기로 기울었다. 그래서 카페 폐쇄하기 버튼을 다시 눌렀다. 그런데 카페 폐쇄가 안 되었다. 원인을 찾아보니 그 사이에 회원이 두 명이나 가입해버린 것이다. 회원들의 동의가 있어야 카페 폐쇄가 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카페는 이끌어가야 하는 숙명을 떠안고 말았다. 그 결과는 내 인생의 항로를 바꾸어 놓을 만큼 지대하고 또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 순간의 대책 없는 선택이 바꿔놓은 운명이었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인생의 황금기였다.  두발로 걸어 다니고 두 눈으로 볼 수 있고 두 손을 사용할 수 있고 말도 하고 들을 수도 있는 인간의 모든 기능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여주 라파엘의 집에 다녀올 때마다 눈물이 나곤 하였다. 그곳은 중증 복합장애인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다. 최소, 서너 가지 이상의 장애는 기본이었다. 낙중 아저씨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었다. 참고로 카페의 상징인 낙중 아저씨도 여러 장애가 있다. 특히 앞을 보지 못해서 봉사자의 몸을 더듬어야만 그 사람을 인식할 수 있었다. 남자들도 당황하는데 처음 간 여자 회원들은 너무 놀라서 도망치거나 심지어 울기도 하였다.  

    

봉사단체를 만든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회원들이 지속적으로 늘어갔다. 차츰, 왜 봉사활동을 하지 않고 카페에서 수다만 떨고 있느냐는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 울며 겨자 먹기로 퇴근하면 봉사를 갈 수 있는 시설들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원장님들의 마음은 그리 쉽게 열리지 않았다. 한두 번 하다 마는 단체들이 대부분이어서 봉사활동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나는 제안서 비슷한 봉사 계획서를 보여주며 원장님들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봉사활동을 한다면 무조건 오케이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거절을 당하면서 심한 절망과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회원들이 압력이 너무 거세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여 곳을 찾아다니다가 일산의 사리현동에 있는 벧엘의 집이라는 곳에서 승낙을 하였다. 그때는 일산이 아니라 벽제라고 불렀다. 그래서 첫 봉사지가 벧엘의 집이 된 것이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다음이 광명 사랑의 집과 벽제 천사의 집이었다. 그 뒤를 이어 여주 라파엘의 집까지 네 군데를 매월 한 번씩 방문하는 봉사를 시작하였다. 마침 중고생들에게 봉사확인서가 필요하기 시작하면서 회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수도권 위주의 네 군대를 넘어서 전국으로 봉사활동을 확장하기 까지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제주도나 전주의 경우에는 운영자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모든 의사소통은 사회봉사클럽이라는 카페를 통해 이루어졌다. 카페에는 각 시설과 지역별로 방이 만들어져 담당 리더가 이끌어가고 나는 중앙에서 관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 시절에는 운영자를 카페지기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여동생의 결혼식이 열렸지만 참석하지 못하였다. 나의 관심사는 온통 봉사활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경조사마저 챙기지 못할 정도로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또 관리까지 해야만 했다. 각 방의 운영자들을 지원하거나 홍보하는 등 문제가 있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면서 나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봉사활동이 왜 필요한지를 배울 수 있었다. 봉사란 남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설에서 보고 매우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항상 나의 부족한 면들을 자책하며 살았다. 나는 왜 이리 지지리도 가진 것도 없고 못난 사람일까를 달고 살았던 내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갖춘 인간이었다. 내 의지로 모든 일들을 처리해 낼 수 있는 완전체였던 것이다. 그 사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를 깨달으면서 봉사를 종교보다 더 숭고한 소명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절정기에는 회원이 수만 명을 넘기기도 하였다. 물론 실제로 활동하는 회원은 10%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10%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시설단체를 방문하는 봉사는 물론이고 서울 시내의 독거노인들을 위한 별도의 봉사도 진행하였다. 회원 1인당 한 명의 독거노인을 연결하여 형식적이 아닌 적극적인 봉사를 하였다.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했다. 그 시절에는 지차체도 복지 쪽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각종 종교 단체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보여주기 식 봉사는 오히려 피해를 주고 있었다. 일일호프는 주로 신촌과 이대 쪽에서 열었다. 그 수익금은 심장병이나 난치병 어린이들의 수술비로 후원되었다. 즉, 병원비를 우리 모임에서 대신 납부해준 것이다. 수술이 잘되어 고맙다는 소식이 전해올 때마다 그 사실은 카페에 크게 공지로 올려졌다. 그 뿌듯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가슴 벅찬 것이었다.          

 

잘 나가던 카페는 갑작스러운 나의 결혼과 이민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내가 이민 간 지 6년 정도 명맥을 유지하다 스멀스멀 사라져 갔다. 구심점이 없어진 카페는 늘 불화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지방의 봉사 지부터 이탈이 시작되면서 마침내 붕괴되어 소멸되고 말았다. 태풍이 아무리 강력해도 육지에 상륙하면 열대성 저기압으로 사라지듯이 그렇게 나의 원대한 꿈은 사라져 갔다. 나는 지구 반대편에서 그 안타가운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지난해 가을 치료 휴양 차 한국에 오게 되었고 처음 한일이 원년 봉사 회원들과의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장소는 단골이었던 마포 최대포집이었다. 상당히 많은 회원들이 모여 다시 의기투합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18년이라 간극을 극복하고 다시 시작한 곳은 공교롭게도 처음 봉사활동을 했던 일산의 벧엘의 집이었다. 인연의 끈은 내가 노력하기에 따라 이어질 수도, 끊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는 사실도 봉사가 알려주었다. 

봉사는 죽을 때까지 나의 숙명이다. 봉사를 통해 사랑과 인생을 배웠다. 그리고 나라는 완전체를 발견하는 일은 경이롭다 못해 눈물이 났다. 멀쩡한 몸으로 남 탓이나 하는 사치를 부리지 못하게 된 것도 봉사활동이 가르쳐준 것들이다. 일반인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에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장애를 가진 분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존재이다.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도 꿈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분들이었다. 그 용기가 남들이 가지 않는 영국이라는 낯선 땅으로의 이민이라는 초강수를 둘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이 책은 총 2권으로 구성되었다. 지난날의 봉사 이야기들이 책으로 나올 수 있도록 직접 참여해 주고 고생해 준 모든 운영진과 회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각 시설단체에서 생활하시며 삶을 가르쳐준 분들과 그분들과 같이 생활하며 도와주시는 많은 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 목차: 


프롤로그


제1권  (2019년 9월 22일)


1화. 나는 매월 한번 외도하러 간다

1. 외딴집

2. 애절한 사랑

3. 유부남과 유부녀들     


2화. 15원이 가르쳐준 행복

1. 토요일 아침

2. 하이패스의 이면

3. 15원이 가르쳐준 행복     


3화. 자기 불만은 가장 큰 사치다

1.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

2. 자신이 쓸모없다는 사람들

3. 우울하거나 고독한 사람들  

   

4화. 중증 복합장애인 이야기

1. 중증 복합장애인

2. 인권과 인간의 존엄

3. 행복과 불행 사이     


5화. 추억의 카페지기

1. 사회봉사클럽

2. 카페지기

3. 내 청춘을 바치다    

      

제2권 (2019년 9월 29일)     


6종이시계는 날고 싶다

1. 낙중 씨와 종이시계

2. 라파엘 가는 길

3. 종이시계의 비상과 추락     


7신촌 일일호프의 추억들

1. 말술과 그 일당들의 해적질

2. 밤새 돈을 만들어내라

3. 어려운 아이들의 수술비     


8봉사지 에피소드

1. 일산 벧엘의 집

2, 광명 사랑의 집

3. 여주 라파엘의 집

4. 벽제 천사의 집

5. 독거노인봉사

6. 전국적인 자체 봉사활동

7. 닉네임이 슬픈 섬인 아가씨  

   

9봉사활동이 위축된 이유

1. 인권과 성추행 문제

2. 형식적인 봉사확인서 문제

3. 서민들의 고달픈 삶    

 

10되로 주고 말로 받기

1. 봉사를 통한 자아실현

2.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

3. 삶은 자체로 아름답고 숭고하다     


에필로그





에필로그


우연히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것이 봉사활동이었다. 누군가는 나서서 새로운 길을 내면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 하나로 시작하였다. 예상은 적중하였고 졸지에 나는 많은 수의 회원들을 이끌고 전국적으로 봉사하는 큰 모임을 만들어냈다. 일반 국민들이 그 정도로 봉사에 관심이 많은 지는 상상도 못 했다.      


카페가 커지자 따라서 하는 모방 카페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모두 내가 바라던 바였다. 그래서 다른 카페들도 잘될 수 있기를 바라며 봉사에 전념하였다. 우리 카페는 이미 후발주자들의 롤 모델이 되어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돕는 것은 우리 카페가 더욱더 잘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회원들은 주로 젊은 층이 많았지만 가끔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가족 단위의 참여도 있었다. 특히 여주 라파엘의 집에 다녀온 회원들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리고 뒤풀이에서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들이 받은 충격은 지금까지의 삶의 항로를 바꿀 만큼 크고 지대하였다.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하나만 할 수 있어도 행복해하는 분들이 가르쳐준 것은 그 어떤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두발로 걸을 수만 있어도, 두 눈으로 볼 수만 있어도, 두 귀로 들을 수만 있어도, 스스로 화장실을 다녀올 수만 있어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 의지로 스스로 다 할 수 있는 놀라운 사람들이었다.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그야말로 완전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가진 것도 없고, 어디 가서 대우도 받지 못하고, 좋은 대학도 나오지 못하고 따라서 좋은데 취직도 못하며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는지 깨닫는 순간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도 그랬었다.  

    

한 가지, 너무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나의 이민이었다. 나 없이도 카페지기를 비롯한 중앙 운영진을 선출하고 지방 운영진들과의 조화 속에 모임을 점점 키워가길 바랬다. 그래서 한국뿐만 아니라 제3세계로도 진출할 원대한 꿈까지 꾸던 차에 갑작스러운 나의 이민은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고 말았다. 물론 나의 공백 이후에도 4년 정도 명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구심점이 없는 모임은 사소한 분쟁에도 힘들어했고 급기야 지방의 회원들부터 독립을 선언하면 카페를 떠나갔다. 그 아픈 과정을 지구 반대편에서 지켜보면서 눈물이 났다. 하지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분열 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마침내 카페 폐쇄를 결정하였다는 통보가 메일로 왔다. 너무도 안타까워 며칠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다짐을 하였다. 나의 이민 생활이 완전히 자리를 잡고 아이가 대학생이 될 무렵이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반드시 재건하겠다고.....,     


그렇게 아이가 대학생이 될 무렵이라는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이민 갈 때의 결단보다 더 어려웠다. 영국이란 사회를 모르기 때문에 이민을 떠날 수 있었지만 한국으로의 복귀는 조심스러웠다. 물론 가족은 남겨두고 혼자만의 복귀였다. 한국 사회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겁이 났다. 복귀의 명목이 없어서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감사(?)하게도 허리 디스크에 큰 문제가 생겼다. 통증이 너무 심해 잠시 주춤하던 우울증까지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의 병마와 싸우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아내와 합의 후 1년만 한국에 가서 치료하며 쉬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국을 떠나왔다.     


지난해 가을, 그러니까 딱 이맘때쯤이었다. 그때도 한국의 가을은 햇살이 상당히 강렬하였고 모든 것이 낯설었다. 심지어 순댓국이나 곱창 같은 음식들을 너무나 손쉽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국에 와사 2주 정도 치료하며 시차 적응이 끝나자 원년 멤버들을 소집하였다.    

  

18년 만의 모임 장소는 마포에 있는 최대포집이라는 단골집이었다. 옛 철길 밑의 최대포집이 아니었다. 마포 특히, 공덕오거리는 놀라울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오랜만에 모인 회원들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막내였던 20대 초반의 꼬마 아가씨 토시와 혜인이 40대라는 말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자기들 나이 먹은 줄은 까맣게 잊고 말이다. 우리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옛 추억을 더듬기 시작하였다. 너무 시끄러워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최대포집은 손님들로 넘쳤다. 거기에 고기 굽는 냄새와 연기까지 오랜만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었다.  

    

헤어지기 아쉬워 근처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차분한 분위기에서 본격적인 나의 제안이 시작되었다. 회원들은 반신반의하였다. 왜냐하면 모두 가정이 있고 아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봉사활동을 할 수 있냐는 반문이었다. 그럼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먼저 해보자고 다시 제안하였다. 그러다가 회원이 늘면 매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벧엘의 집부터 봉사가 시작되었다. 지난해 첫 봉사는 20년 전의 첫 봉사 때보다 더 떨리고 조심스러웠다. 같은 공간 같은 주방인데도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내가 봉사활동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학교는 바로 장애인 시설 단체라는 나의 믿음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봉사활동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발견이었다. 나는 완전체였고 더 이상 쓸모없는 인간도 아니었다. 봉사를 갈 때마다 그분들의 미소와 행복을 보게 된다. 그분들보다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조건을 지닌 내가 왜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가는지의 답을 그분들이 온몸으로 가르쳐 주고 있었다.   

   

봉사를 가기 전의 설렘과 다녀온 후의 뿌듯한 기분은 중독성이 있다. 마약 같은 중독성은 20년이 지난 회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시 돌아온 구심점 역할만 하고 비전만 제시해주면 나머지들은 회원들이 알아서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그동안 아이들의 엄마로서 갈고닦아 온 음식 솜씨와 주부 내공까지 쌓인 그들은 봉사활동에 최적화된 존재들이었다. 20년 전의 미모에만 신경 쓰던 어설픈 아가씨들이 더 이상 아니었다.          

  

20년이나 묵은 이야기들을 펼쳐 놓는 이유는 봉사활동의 당위성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봉사활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소중한 사실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은 것이다. 봉사는 단지 시설단체에 계신 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봉사활동보다 더 가슴 벅차고 뿌듯한 일을 나는 아직 경험하지 못하였다. 누군가를 위해 내가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분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보고 매우고 느끼며 돌아온다는 사실은 나를 봉사 전도사로 만들고 말았다.   

   

아무쪼록 이 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봉사활동을 체험해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은 절대 부족하거나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19년 9월 30일 

강화도 초입의 어느 카페에서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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