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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l 23. 2019

영국으로 이사 왔어요 #2 한국에서 런던으로 이사하기

나의 20년간의 영국 여행 이야기



런던 도착 며칠 만에 드러난 나의 허세!


21세기가 막 시작된 해의 늦은 가을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만추를 지나고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날씨도 제법 쌀쌀해져서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하며 아내의 컨디션 조절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출발하는 날 아침부터 서둘러서 짐을 최종 점검하고 여권과 아내의 병원 기록 관련 서류들을 재차 확인하였다. 미리 예약해둔 공항 밴 택시는 집 앞에까지 도착하였고 우리의 이민가방 4개를 싣자 바로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이삿짐 치고는 너무 단출하였다. 그동안 보살펴준 처형과 작별 인사를 하고 택시에 올랐다.


1시간이 좀 지나서 택시는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체크인을 마치고 간단하게 브런치를 해결한 후 마지막으로 약국에 들러서 비상 상비약들을 샀다. 탑승구 앞에서도 기다림은 계속되었지만 긴장되거나 문제 될 일은 없었다. 단지 꿈에 그리던 이민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세상을 정복한 기분이었다. 출발 직전 내가 느꼈던 행복은 아마 나폴레옹이나 칭기즈칸이 느꼈던 행복보다도 훨씬 크고 짜릿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런던까지는 12시간이 소요되는 장시간 비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신한 아내에게 혹시 돌발 사태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다 보니 12시간이 어떻게 지난 간 줄도 몰랐다. 우여곡절 끝에 나와 아내를 태운 대한항공 비행기는 런던 히드로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비행기가 꽝 하는 굉음을 내며 활주로에 착륙하는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고 만감이 교차하는 찰나였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할 수 있다는, 아니 아주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여전하였다.


활주로에 내려서 터미널 빌딩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또 다른 행성으로 진입하여 들어가는 우주선처럼 느껴졌다. 활주로에서 맞이한 런던의 가을은 우중충하였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이국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낯선 행성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입국 심사를 위한 줄은 길고 길었다. 12시간의 비행도 힘든 여정이었는데 1시간 이상을 다시 입국 심사를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고역이었다. 특히 임산부인 아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결코 쉽지 않은 입국 심사를 마치고  커다란 이민 가방들을 찾아서 카트 2개에 나누어 싣고 나오자 입국장 앞의 커피숍 앞에서 후배 L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로소 영국에 다시 왔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마치고 커다란 이민 가방들을 끌고 지하철로 향하였다. 짐이 너무 많아서 택시 하나로는 힘들 거 같아서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후배 L 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은 런던 시내에서 다소 벗어난 East Acton에 있었다. 후배 집까지 가는 지하철은 대부분 지상으로 달리는 구간이어서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런던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익숙할 줄 알았던 런던의 풍경들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의아해하였다.


9년 전에 1년 반 동안이나 어학연수를 한 런던의 풍경을 다시 대하니 낯설다 못해 어색하였다. 그 어색함은 나를 살짝 주눅 들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불안이 창밖의 풍경이 스쳐 지나가듯이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사실 아무리 보아도 변한 건 거의 없고 그때 그 풍경이었다.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1시간여 만에 민박집에 도착하였다. 지하철역에서 민박집까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민 가방들을 끌고 가는 게 쉽지는 않았다. Dreams라는 침대 가계 코너를 돌아 가파른 철재 계단을 오르자 2층에 있는 민박집 현관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L의 아내 K가 우리를 반겨준다. 한국에서 알게 된 K는 L보다 먼저 알고 지내던 후배였다. K의 친구들과 술도 자주 마시고 하면서 친해지게 된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L이기도 하였다. 짐을 민박집에 들여놓고 우리는 그동안의 회포를 풀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IMF 경제 위기가 우리나라를 강타할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L 부부를 자주 만나서 술도 마시고 이들의 궁금증에 답해 주곤 하였다. 이 부부가 해외에서의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만나면 커피숍이나 찻집보다는 호프집이나 소주방을 주로 갔다.


해외에서의 생활 경험이 없는 이들 부부에게 해외에서의 창업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고 추천한 사업이 런던에서의 민박집 운영이었다. 집을 한채 임대해서 한국의 관광객들에게 저렴하게 숙식을 제공하는 도미토리 형태의 사업이었다. 1999년에 이들 부부는 해외 창업을 위해 런던으로 떠났고 민박집을 운영해서 수익을 내고 있었다.


주인 몰래 하는 민박집 사업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한 부부다. 첫날 저녁은 중국집에서 Take away 해온 볶음밥과 케밥이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중국음식은 맛있었지만 아내에게는 입맛에 맞지 않는 눈치였다. 맥주와 더불어 맛있게 먹고 TV를 보는데 이게 웬일인가! 영어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독일어처럼 들리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여파와 피로도 때문이라고 위안을 삼으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바로 곯아떨어졌다.


다음날부터 우리가 살집을 렌트하려고 부동산 업자와 같이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하였다. 영어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던 나에게 집주인들과의 대화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며칠 지켜본 아내는 무척 실망스러운 표정이었다. 매사에 자신이 있었던 나의 모습은 허세였다는 게 들통나는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이후부터 나의 영어 울렁증은 지속되었고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다. 중요한 전화나 미팅 시에는 아내가 나셨다. 현지인과 막힘없이 유창하게 대화하는 아내의 영어 실력에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나의 놀라움과 상실감은 더욱 컸다.


아내도 뉴질랜드에서 영어연수를 하였다. 배낭여행도 많이 다녔고 의료봉사로 몇 년간 페루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그렇게 자신 있었던 영어가 나를 올가미처럼 조여 오면서 자신감은 점점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놈의 영어 하나 때문에 생활의 주도권은 아내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렇게 영국에서의 나의 이민 생활은 시작되었고 넘어야 할 수많은 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던에 도착해서 집 렌트하기


그렇게 낯선 런던에 도착해서 East Acton에 있는 후배들의 민박집에서 이틀 정도를 쉬었다. 아내는 임신 상태였고 시차도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힐링까지는 아니어도 편안하고 안정된 휴식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많은 손님이 들락거리는 민박집에서의 휴식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조용하고 편안한 숙소를 구해서 옮겨야만 하였다. 다행히 런던 남쪽에 위치한 뉴몰든이라는 한인 타운에 조용하고 음식도 잘해준다는 한인 민박집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다음날, 그러니까 런던 도착 3일째 되는 날 그 한인타운의 민박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말이 이사지 작은 가방 하나씩만 가지고 뉴몰든으로 향하였다. 커다란 이민가방들은 그대로 남겨둔채로였다. 이동하는 민박집도 1주일만 예약하였다. 1주일 안에 우리가 살 집을 렌트해야 한다는 의미기도 하였다.


뉴몰든역에 도착해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친절하게 직접 역 앞까지 픽업을 나오셨다.  역에서 걸어서 1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였다.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3 배드라는 한인 하우스로 가족이 거주하면서 손님을 받는 형태의 하숙집 같은 민박집이었다. 민박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셰어하우스 형태에 가까웠다. 당연히 들락거리는 사람도 없어서 조용하고 아늑하였다. 주인 부부도 착하고 정이 넘치는 한국사람이어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식사로 제공되는 맛있는 한식 집밥은 우리의 피로를 달래주고도 남았다. 저녁마다 말동무도 되어주면서 민 빅 집 아주머니와 아내는 금방 친해졌다. 물론 나는 주인아저씨와 저녁마다 술을 마시면서 술 동무가 되어버렸다. 1주일의 한인타운 내의 민박집 생활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단 한 가지만 빼놓고..


저녁때만 되면 셰어 중인 중국인 학생 커플이 요리를 하였다. 문제는 중국요리의 특성상 튀기고 볶는 음식이 많다는 것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저 학생 커플은 웍이 두 개씩이나 있다고 귀띔을 해주시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요리를 못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고민이 크다고 하셨다. 그날 저녁에도 창문을 포함한 문이란 문은 다 열었지만 오래 열어들 수가 없었다.  마침 겨울이었고 런던에는 매일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날씨도 추웠지만 비가 내리는 날은 저기압이기 때문에 환기가 되지 않았다. 임신 중인 아내가 음식 냄새 때문에 힘들어하였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집 구하기에 나섰다. 한인타운 내에는 한인들이 운영하는 이스테이트 에이전시가 몇 군데 있었다. 그중의 한 곳을 선택하여 다음날부터 집들을 보러 다니기 시작하였다. 1주일 동안 상당히 많은 집들을 보러 다녔다. 모두 십여 군데 넘게 본거 같다.


처음 보러 간 간 곳은 Morden이라는 지역의 집이었다. 하우스 두 곳을 보있다. 3 베드룸 하우스였는데, 집 자체는 크고 정원도 괜찮고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두 집 모두 화장실이 베드룸 안에 있는 치명적인 구조였다. 이러한 구조는 우리의 고려 대상에서 무조건 탈락이다. 화장실이 욕실과 분리되어 있거나 아니면 욕실이 두 개인집을 찾아야 했다. 우리의 형편상 셰어를 하지 않고는 집세를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우스나 플랏 쉐에시 화장실이 욕실내에 있는 경우에는 아침마다 진풍경이 펼쳐질 수 밖에는 없다. 특히 여학생이 많이 사는 집들의 경우에는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이 발생하곤 한다.


영국의 일반적인 주택구조는 1층 현관 바로 옆에 화장실이 있다. 욕실은 2층에 있는데 욕실은  화장실을 겸하기 때문에 화장실이 2개인 경우가 보통이다. 소개해주는 직원에게 굳이 화장실 문제 같은  이야기를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따라서 주변에 공동묘지가 가깝고 지하철역과도 멀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음날도 집을 보러 다니는 일은 계속되었다. 리치먼드 파크의 담벼락에 거의 붙어 있는 대저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들어가는 진입로도 프라이빗 로드여서 일반인들이 통행할 수 없다고 한다. 프라이빗 로드라니! 그런 길이 있는 줄도 본 적도 없었다. 너무나 예상 밖이라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직원에게 여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하였더니 잠깐만 기다려 보라 하신다.


크고 웅장한 저택 맞은편 수영장 옆에 우리나라의 사랑채 같은 개념의 집이 보였다. 쉐드하우스 개념으로 일반 집에서는 작은 창고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 저택의 쉐드 하우스는 방갈로 형태이기는 하지만 웬만한 집들보다 크게 보였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와 관리인들이 기거하던 집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저택이 아니고 저택 맞은편의 바로 저 집이 우리가 볼 집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그렇지!! 내심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집사라니!!! 자존심이 상하였음에 불구하고 마음에 들었다. 환경도 훌륭하였고 잘 관리된 파란 천연잔디의 정원에는 내가 좋아하는 축구골대도 보였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서 포기하고 그 집을 나설 수 밖엔 없었다. 집사처럼 살 수는 있었지만 여기저기 달려있는 카메라를 보는 순간 셰어가 불가능하다는 직감이 바로 왔다. 집 바로 앞에 있는 수영장도 문제였다. 몇 달 후면 아이가 태어나는데 코 앞에 수영장이 있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아이에게 너무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다음날은 뉴몰든 남쪽의 서튼 지역의 집들을 보러 다녔다. 한인타운인 뉴몰든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약간 외곽이다 보니 집들이 크고 정원도 넓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교통이 좀 걸렸다. 셰어를 하려면 가능하면 역세권이거나 버스 정류장 근처야만 한다.


그렇게 며칠을 더 보러 다니자 소개해주는 직원도 처음에 들뜬 마음으로 나섰던 우리도 조금씩 지쳐갔다.  결국 마지막으로 리치먼드 외곽의 햄이라는 작은 동네에 상가 플랏으로 확정하였다. 1층은 상가가 있고 2,3층의 복층 플랏 형태의 집이었다. 2층에는 거실이 3층에는 욕실과 방 2개가 있었다. 여기로 정한 이유는 비록 외곽이지만 리치먼드라는 좋은 동내라는 프리미엄에 집 옆에 큰 공원과 템즈강이 흐르고 있었다.


리치먼드 파크라는 유명한 공원도 걸어서 10분 거리여서 집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사무실로 돌아와 계약을 하였다. 무엇보다 화장실과 욕실이 분리되어 있었다. 월세는 850파운드였고 6주 디파짓이고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1주일간의 한인타운 내 민박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는 바로 이사를 들어갈 수 있었다.


민박집주인과 직별을 고하고 짐을 꾸리는데 반찬들과 김치도 한통 싸주시는 것이다.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좋은 분들이셨다. 이분들과의 인연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물론이고 앞으로 살아갈 집과의 인연을 만들어 나가면서 우리의 이민생활은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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