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질병이란 일상에서 해방되어 휴식과 치유 및 힐링에 관한 연재이다
한국에서는 군대 입대 전 장병 신체검사라는 것을 한다. 나는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물론 자발적으로 병무청에서 허리디스크까지 검사해줄 정도로 친절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허리가 아프니까 일단 디스크 검사를 해달라고 우겨보라는 주위의 고마운 충고를 받고 일단 우겨보았는데 별도의 검사에서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도 2급 현역 입영대상자가 되어 입대하는 불운을 겪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군의관으로 보이는 사람의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명언이었다. ”대한민국에 허리와 목 뻐근하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입대해서 훈련하면 다 낳으니깐 걱정하지 말고 훈련이나 잘 받아. 그럼 거짓말처럼 낳을 거야.” 이런 충고 아닌 충고를 들었을 때, 뭐 저딴 인간이 다 있나 하면서 열이 받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어쨌든 3년의 군 복무를 마쳤고 허리는 6주간의 신병훈련 때 거짓말처럼 낳았다. 그리고 나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신체의 하나인 허리디스크는 나의 뇌리에서 잊혀갔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사실은 허리보다 목에 먼저 이상이 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목을 먼저 치료하느라 허리는 무시되었다. 영국에서 청담동에 있는 우리들 병원까지 와서 치료를 받았고 1년쯤 지나자 목의 통증은 사라졌다. 그러자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였다. 아내와 아들에게 자꾸 나약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래서 허리 아픈 이야기까지는 할 수 없었다. 군의관 말대로 허리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라며 참고 견디었다. 아마 그 당시에는 디스크에 문제가 시작되는 단계였기 때문에 그래도 참고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지난해 봄부터 예기치 않은 사고로 가계에서 힘쓸 일이 많아졌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육체노동을 하면서 허리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디스크들이 삐져나오는 것이다. 허리디스크 추 간판 탈출증이라는 생소한 병명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허리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막상 허리는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왼쪽 다리였다. 왼쪽 다리 전체가 전류가 흐르면서 바늘로 찌르는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앉아있을 때 그 고통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문제는 진통제 성분이 들어간 약이나 스테로이드 성분의 신경차단 주사 없이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프다는 것이다. 그것도 잠깐 몇 시간만 아프면 그래도 견디며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통증은 나를 24시간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자면서도 통증 때문에 2시간 간격으로 깨어났다. 병원은 물론 한의원과 카이로프랙틱까지 전전하며 통증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면서 잠자던 우울증이 폭발해 버렸다. 통증과의 싸움에서 이제는 우울감이 추가된 것이다. 두 가지를 견뎌내는 일은 두 배, 세배 이상 힘겨웠다. 그래서 자다가도, 아침에 눈을 떠서도, 하루 종일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적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이제는 3가지의 적과 싸워야 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리가 아픈 친구들의 도움으로 서울대병원 전문의가 쓴 책을 읽어가며 자가 치료를 시작하였다. 허리디스크 관련 책들은 거의 읽어보았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머리만 혼란스러워졌다. 허리디스크 치료법이 계속 변화해온 것이다. 시대별로 치료법이 달랐고 학자마다 그 방법론이 달랐다. 심지어 허리 근육 강화 방법은 정반대의 의견들도 있었다.
다행히 지난해 6월에 치료 및 휴양 차 한국에 있던 아내가 아들과 함께 귀국하면서 나는 가계 운영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일을 할 수 없는 나는 아들과 유럽과 웨일스 및 스코틀랜드 자동차 여행을 하였다. 허리가 아파서 좀 편하게 여행하려던 나의 의도와는 달리 자동차 여행은 나의 허리디스크에 결정타를 날려버렸다. 장시간 운전이 허리디스크에 그 정도 나쁜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결국 드러누워서 꼼짝 못 하는 진짜 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1년간의 휴가를 요청하였고 아내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승낙하였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었다. 영국이 아닌 한국으로 혼자 돌아가서 치료를 받으며 쉬라는 것이었다. 아내는 유독 가족이 아파하는 모습을 싫어하였다. 아들이나 나는 아파도 내색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작고하신 장인어른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은 쌓여만 갔다. 아내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한국에 돌아와서 몇 달 후에 알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허리디스크 덕분에 나의 1년 동안의 하프타임 휴가는 시작될 수 있었다. 한국에 입국해서 혼자 지내면서 인생이란 참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묘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통증이라는 질병은 나에게 많은 것을 선물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니체는 질병의 긍정적인 측면을 무던히도 강조하며 살았다. 물론 자신의 나약한 신체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질병이 인간의 내면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라고 하며 질병을 즐겼다. 니체가 옳았다는 사실은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내가 질병과 싸우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내와 3년 동안 떨어져 살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인상 좀 펴고 살아 라는 말이었다. 아내의 질병으로 3년 동안 떨어져 살면서 아이의 방학에 맞춰 여름 2달은 런던에 와서 지냈다. 나는 연말연시 휴가 때 가계를 닫고 1주일 정도 한국에 다녀올 수 있었다. 나는 별다른 일이 없는데도 웃음을 잃어가고 있었다. 떨어져 살면서 가끔 만나는 가족을 보고도 웃지 않는 나는 점점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그럴 때마다 무슨 일 있어? 인상 좀 펴고 살아 라는 말을 기계처럼 반복하며 타박을 주었다. 나도 아내도 내가 통증과 싸우며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사실 나는 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도 그것이 우울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우울증은 심신이 미약하고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에게나 오는 것이라고 믿던 시절이었다. 나처럼 강한 사람에게는 감히 범접조차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애써 태연하였다. 그리고 설마 그런 것이 나에게 찾아온다 해도 며칠 만에 물리칠 수 있다는 치기 어린 생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바보 중 한 사람이었다. 그 증세는 고스란히 나의 얼굴 표정에서 나타났고 수면 장애와 여러 증세가 나타났는데도 치료는커녕 인정조차 않고 몇 년을 버틴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심각하지 않았으니까 치료 없이도 버텨낼 수 있었으리라! 아내의 반복되는 같은 잔소리는 나를 질책하는 것으로 들렸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더 열심히 살지 않는다는 책망으로 내 귀에는 들렸던 것이다.
그러한 잘못된 이해는 백화점에 엉뚱한 초밥 사업을 하나 더 오픈하는 과오로 이어졌다. 그 당시에는 뭐에 홀린 듯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내가 하면 다르다는 자신감은 물론이고 금방 부자가 되리라는 확신은 나를 우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1년 만에 많은 손실을 떠안은 채 퇴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좀 더 바쁘게 살면 우울증 정도야 떨칠 수도 있다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결과였다. 실제로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며 바쁘게 살았지만 노동은 나를 즐겁게 해주지 못하였다. 이유는 자명하였다. 노동에 대한 보상이 생각보다 훨씬 저조하였기 때문이다. 직원들 월급에 고정비를 포함한 제반 비용을 빼고 나면 내 월급이 겨우 떨어지는 정도가 될까 말까 하였다. 일에 대한 의욕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기존의 가계에도 신경을 덜 쓰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었다. 역시 욕심이었다는 결론에 달하자 과감하게 정리를 시작하였다. 충분한 보상이 따르지 않는 노동은 결코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자아를 실현시켜 주지도 않았다.
초밥 가계를 정리하면서 소송이 진행되었다. 변호사를 비롯한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면서 늘어가는 것은 스트레스뿐이었다.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정리하는 것은 몇 배는 더 힘들었다. 패장이 챙길 것은 거의 없는 것이 비단 전투에서뿐만 아니라는 사실을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본격적인 우울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가족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게 되었다. 가계는 여름휴가를 이유로 1주일간 문을 닫고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날아갔다. 마침 카사블랑카에는 아지즈라는 친구가 살고 있었다. 그 친구도 볼 겸, 머리도 식힐 겸 카사블랑카에서 1주일을 보냈다.
카사블랑카는 여행객이 여행할 수 있는 그런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휴가철인데도 도시에 외국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친구가 공항까지 마중 나와 주었다. 호텔 체크인 시간이 일러서 친구 차로 카사블랑카 해변을 돌며 차도 마시고 점심도 먹으며 북아프리카의 이국적인 모습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런데 친구도 아내와 같은 소리를 했다. 인상 좀 펴고 살아 라는 말이었다. 내가 미소를 잃어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나는 웃을 일이 생기면 웃는다고 웃는데도 불구하고 경직된 내 얼굴에서는 웃음이 표현되지 않았다. AI나 사이보그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울한 사람에게는 아프리카도 하루가 지나자 우울한 대륙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첫날의 아름답던 카사블랑카는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로 바뀌어서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유일한 낙은 호텔 안에서 책을 읽고 맥주를 마시는 정도였다. 저녁이면 여기저기 초대를 받았지만 그 신나는 파티조차도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더욱이 밤늦게까지 콜라나 커피를 마시며 하는 파티는 고역이었다. 술이 배재된 문화는 내 정신만 더욱 또렷하고 말짱하게 할 뿐이었다. 잊으러 간 소송이나 정리할 일들이 더욱 생생하게 생각날 뿐이었다. 그래서 4일째가 되자 거의 호텔 안에서 먹고 마시고 자기를 반복하였다. 음식을 먹을 때도 먹지 않을 때도 맥주를 마셨다. 책을 읽을 때도 맥주를 마셨다. 맥주가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허리 통증이 처음부터 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2년 전까지만 해도 견딜 만하였다. 지금처럼 24시간 아프지는 않았다. 문제는 통증이 있을 때는 우울감이 상승한다는 것이다. 통증과 우울의 상관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분명 관련이 있음을 몸이 먼저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허리가 아프면 자동적으로 우울증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통증이 느껴지면 진통제를 먹고 통증과 멀어지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내성이 생긴 진통제는 먹으면 먹을수록 속만 아플 뿐 더 이상 신통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대 의학을 믿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허리 통증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사립병원에서 MRI를 찍어본 결과 허리디스크 판정이 났다. 영국의 무료 NHS 시스템으로는 허리 치료 시간은 기약이 없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순서가 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전 국민의 무료진료시스템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초 고령 사회에 진입한 영국의 병원들에는 환자들이 넘쳐났다. 응급환자가 아니면 입원 치료는 요원해 보였다. 심지어 응급환자들도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우울증도 마찬가지였다. GP의 주치의에게 몇 번 찾아가서 상담을 받았지만 2차 병원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약 처방도 받을 수 없었다. 우울증은 영국인의 절반이 안고 있는 질병으로 감기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감기는 당장 생명과 직결되지 않는다. 사실 우울증이 질병으로 인정받으려면 절차가 복잡해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우울증 치료를 포기하고 만다. 살다 보면 우울할 일이 넘쳐난다. 굳이 치료까지 받으며 환자처럼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도 그랬고 의사도 그랬다. 모두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살고 있고 그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영국인들이 왜 유독 더 우울한지는 나도 알 수 없다. 혹자는 6개월간의 긴 겨울 동안 비가 내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가 내리면 해가 뜰 수 없다. 해를 보지 못해 우울할 수도 있다. 아니면 요람에서 무덤 까지라는 복지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태동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시스템은 많은 부분에서 사회주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영국의 특징은 세금의 나라라는 점이다. 부가가치세는 20%가 된 지 오래다. 한국의 10%에 비하면 2배인 셈이다. 연봉이 2억 정도만 되더라도 거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그래서 그 세금을 바탕으로 복지가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동유럽의 국민들과 아프리카 난민들이 영국으로 몰려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국이 EU를 탈퇴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민자의 급증과 난민 문제였다.
이러한 국가적인 문제를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고통을 느낀다는 일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었다. 내 손끝에 박힌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가시 하나가 영국이 EU를 탈퇴한 사건보다 더 아픈 법이다. 나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우울과 싸우기 시작하면서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구여도 좋았다. 어차피 가족이란 의미는 이미 퇴색되기 시작하였다. 사랑이란 것이 이처럼 쓸모없고 쓸쓸한 일임은 우울과 싸우면 싸울수록 확고해져만 갔다. 그래도 한때는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었던 가족에서 사랑이 떠나간 자리는 공허하고 의미가 사라져만 갔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일처럼 느껴졌다. 나의 성격도 우울을 증폭시키는데 일조하였다. 과거에 집착하며 식어가는 사랑을 붙들고 늘어졌던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가정만은 지키고 싶었다. 그 울타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더 이상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지만 그 상실 속에서 한줄기 희망까지도 내려놓지는 못하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외로워졌고 더 우울해져만 갔다.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였다. 그 사람이 아내가 될 수 없는 사실이 서글펐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아내와의 관계가 멀어졌는지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세상은 온통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가족에게서 상처를 받았다는 피해의식이 항상 나를 괴롭혔다. 그 피해의식의 가해자도 물론 나였다. 가장이 가족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였다는 자책이 나를 더욱 괴롭게 하였다. 그 괴로움과 상실의 관계는 매일 겉잡을 수없는 마음속의 홍수를 일으켰다. 홍수는 흙탕물이 되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희망이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상실이었다. 상실이란 자발적 상실이 아니었다. 버림받은 유기견과 같은 비참함이었다. 그런 생각이 깊어질수록 우울은 더욱 깊고 커져만 갔다. 거기에 본격적인 허리 통증이 더해지자 참아낼 수 있는 한계치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 한계치가 넘어서는 순간 마음속의 홍수는 댐을 무너트릴게 분명하였다. 두렵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상실감이 우울을 불러오는지 우울해서 상실감이 느껴지는지조차 알 수 없는 혼돈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비상구가 필요하였다. 대화가 필요하였고 나의 넋두리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였다. 친구여 도 낯선 타인이어도 상관없었다. 이성이어도 동성이도 괜찮았다. 단지 사람이면 그리고 공감을 해줄 수 있는 인격체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피폐해진 마음을 달래줄 대상을 찾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죽을 거 같았다.
어릴 때부터 가족은 나에게 안식처였다. 비록 가부장적인 세상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던 아버지의 야만적인 폭력을 보고 자랐지만 그래도 가정은 가족을 위해 소중한 공간이었다. 할머니와 6남매를 포함하여 9 식구가 가족의 구성원이었지만 가끔은 10 식구가 넘어가는 일도 있었다. 흔히 객식구라도 하는 사람들이 임시 가족이 되어 공간을 같이했고 그 무게를 감당하는 사람은 언제나 어머니의 몫이었다. 거기에 일꾼들과 주변의 친척과 친지들을 합하면 밥은 언제나 검은 가마솥으로 해야 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항상 보리밥을 원하셨다. 쌀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건강을 먼저 강조하시는 아버지는 연로하신 할머니가 계신데도 언제나 보리밥을 고집하였다. 보리밥은 잘 씹히지도 않을뿐더러 맛이 없었다. 보리밥을 하려면 하루 전에 보리를 물에 불린 후 미리 한번 삶아놓았다가 쌀과 섞어서 밥을 해야 할 만큼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우리 형제는 지금도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본인의 생각대로 관철하며 사셨다. 당연히 할머니와도 많이 각을 세웠다. 고집이라면 둘째가라는 할머니도 아버지를 이기지 못하였다. 우리 형제들은 학교 도시락에 보리밥을 싸가는 일이 가장 난감하였다. 당시 쌀밥은 부자의 상징이었고 보리밥은 가난의 상징처럼 인식되던 시대였다. 우리 집은 떡 방앗간도 하고 농사도 많이 지어서 보리밥을 먹을 만큼 가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을 때면 항상 도시락 뚜껑을 활짝 열지 못하고 반쯤 열고 손으로 가리고 먹었다. 그 시절은 가난 자체가 너무나 당연하고 심지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은 점심시간마다 아버지를 원망하면 밥을 먹어야 했다.
세월이 흘러 그 시절이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그래서 가족의 의미도 많이 바뀌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바로 가족은 식구라는 개념이다. 식구라는 의미는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가족들끼리 밥을 같이 먹을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식구란 개념보다는 같은 집에 살면서 가끔 보는 관계로 바뀐 것이다. 요즘은 가족이 같은 집에 살지 않고 떨어져 사는 경우도 많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가족과 4년 정도 떨어져 살면서 가족의 의미를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공간에 오랫동안 없어도 가족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질 자체만 붙들고 있다고 가정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내가 느낀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나 혼자 지킨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었다. 그 안에 식구들이 생각하는 가족 구성원의 역할과 책임이 각자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직도 고전적인 가정의 울타리만 지키려고 애쓰는 고리타분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방식을 싫어하면서도 결국은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가족 간의 공감 능력의 상실은 더 이상 가정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는 커다란 하자였다. 가장이라는 사람이 경제적인 책임만으로 가정의 울타리는 유지되지 않는다. 가정이라는 유기체는 단순하게 보이지만 복잡하고 미묘한 생물 같은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건 주름과 후회뿐이다. 좀 더 현명하게 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사랑이라는 것은 허망하기도 하지만 사람을 너무 쓸쓸하게 하는 것 같다. 그 쓸쓸함에 많은 후기 청년들이 힘들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족은 가족이지만 가족 같지 않은 가족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우울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허무주의도 회의주의도 아닌 결핍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회수당하는 일처럼 잔인한 일이 또 있을지 의문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움을 넘어서 숭고하고 값진 일이다. 그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이 그리도 쉽게 무너져 내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결혼이라는 것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우울증이 찾아온 것은 아마도 아내의 관심이 아이에게 집중되던 그 시기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아들과 아버지라는 두 남자는 한 여자를 두고 그 사랑과 관심을 위해 투쟁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승자는 항상 아들이었다. 그렇다고 아들을 미워하거나 바로 우울증이 찾아온 것은 아니다. 말도 못 하고 아내만 바로 보고 있는 나 자신이 처량할 뿐이었다. 아!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런 것이었구나. 아내는 아내대로 스트레스 속에 살아가고 나는 나대로 힘들어하면서도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결혼 생활이라는 것의 정체였다. 물론 그 정체는 가정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가족 간의 이러한 미묘한 갈등에 익숙해진 결과는 엉뚱한 것이었다. 서로 간의 무관심이 증폭되면서 언제부터인지 사랑이 창문 틈으로 새어나가고 있었다. 그 새어나간 사랑이 다시 돌아오게 하려는 노력도 없이 서로는 서로를 겨냥하며 그동안 숨겨두었던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낼 뿐이었다.
우울감이 극에 달하면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한다. 그 한 가지는 바로 죽음이었다. 그것도 가장 멋지고 통쾌하게 죽어 나를 우울하게 해 준 사람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었다. 지난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허리 통증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덩달아서 우울증도 최고점을 찍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집이라는 공간이 창살 없는 감옥으로 돌변하였다. 그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삶의 의지가 상실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이었다. 그 가장 큰 부작용은 바로 극단적인 생각이었다. 모든 생각은 생각의 고리를 만들어냈고 그 고리의 끝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바로 죽음이었다. 나 하나 죽으면 평화가 찾아올 텐데 라는 생각은 굉장히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삶을 포기해야 할 이유들은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라는 유혹은 차고 넘쳤다. 허리도 문제였지만 이젠 우울증이 더 큰 문제로 다가왔다. 나에게는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했고 휴식이 필요했다. 휴식의 일반적인 개념이 아닌 장기 요양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제의를 하였고 지난해 가을 한국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병원 유목민 생활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니체가 강조한 대로 질병을 긍정의 에너지로 받아들이고 질병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