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남자 Nov 13. 2019

런던에서 만난 한국의 국가대표급 진상들!

미스터리(Mr. Lee) #2. 런던, 고향이 되기까지

관광가이드와 미니 캡 기사로 을의 삶을 배우다     


그가 런던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청소나 접시닦이 등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성격상 누구의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일들은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자영업이었다. 그가 하는 일들은 사업장이나 직원이 필요치 않았다.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해야만 하는 일들이었다. 차 한 대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정식 영업허가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합법적인 일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미니 캡이란 지금의 우버와 아주 비슷한 자가용 승용차로 영업을 하는 방식이다. 우버는 회사에서 지정해준 손님과 연결해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반면, 미니 캡은 그 회사 역할까지 본인이 다 해야 했다. 그래서 한국의 유학원들과 손을 잡고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한국의 기업체들도 손님이 되었다. 

미니 캡을 전문적으로 하려면 전화 예약을 받을 수 있는 사무실이 있어야 한다. 사무실을 갖추고 런던 교통 국에 미니 캡 라이선스를 신청하면 1년짜리를 발급해 준다. 그 녹색 라이선스는 운전석의 반대쪽인 왼쪽 앞뒤 유리 상단에 부착해야 한다. 당시에는 라이선스 없이 미니 캡 사업을 하였다. 미니 캡과 택시인 블랙 캡의 차이는 예약 여부이다. 미니 캡은 반드시 예약된 손님만 상대해야 하지만 블랙 캡은 언제 어디서든 손님을 태울 수 있다. 미니 캡이 경쟁력이 있는 것은 블랙 캡에 비해 저렴하기 때문이다. 이 미니 캡을 변형시킨 플랫폼 사업이 바로 우버다. 플랫폼을 통해 고객과 연결을 해주고 피드백까지 받아낸다. 따지고 보면 플랫폼 사업이 별거 아니다. 그가 이미 20년 전에 할 수도 있었던 사업이었지만 당시 IT 기술이 따라주지 않아서 그는 우버 같은 신산업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주로 한국 유학원의 학생들을 공항에서 홈스테이 집까지 데려다주는 일을 하였다. 미니 캡 일이 없는 날에는 관광 가이드 역할도 하였다. 그의 차를 이용해 개인 관광을 해주는 것이다. 주로 런던 시내가 무대였지만 가끔은 외곽으로 멀리 나가기도 하였다. 그는 어떠한 자격이나 지식도 없이 관광 가이드를 해내고 있었다. 런던에 대한 역사책 한 권 읽어보지 않은 그였다. 그런 그가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가이드를 하였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활성화되지 않아서 그의 가이드 내용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검색해서 확인해 볼 수 없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을 그는 해내고 있었다. 역시 뭐가 돼도 될 놈은 달랐다.      


그는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니 캡도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이라는 것이 없었다. 모든 행선지는 지도를 보고 다녔다. 다행히도 영국의 도로구조나 주소 시스템은 선진국은 이래야 한다는 모범답안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도만 보고도 어렵지 않게 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한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런던 시내를 그는 차를 몰고 자유자재로 다녔다. 일방통행이 많은 런던 시내 운전은 일반 영국인들도 손사래를 칠 정도로 복잡하다. 주차비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다. 거기에 교통 혼잡 부담금(Congestion charge)은 런던교통국에 별도로 납부해야 한다.      


그가 이민을 와서 미니 캡 기사가 되었고 어학 연수생 픽업을 해주며 가끔 엣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그사이 변한 세월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집에서 학교 등록은 물론 거처까지 마련해주고 그것도 모자라서 픽업 서비스까지 제공해 주는 학생들이 부러웠던 것이다. 런던 어학연수마저도 막노동을 통해 돈을 모으고 그것도 모자라 부모님 몰래 와야 했던 그였다. 그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독립적인 청년이어서는 아니다. 단지 그는 가난한 학생이었을 뿐이다. 가난해도 해보고 싶은 일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였다. 남 탓만 하고 앉아있지는 않았다. 많은 자식들을 둔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일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였다. 대학만 다닐 수 있어도 행복하였다. 물론 대학도 부모님 몰래 들어갔다. 처음 1년은 재수한다고 숨기고 다녔다. 그의 큰 형님만 사정을 알고 도와주었다. 그는 이처럼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고 실행하는 일이 어려서부터 몸에 배어있었다. 만 18세만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서양의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런던에서 미니 캡을 하고 가이드를 하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한국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가끔은 한국 관광객들 중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진상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손님들마저도 고마웠다. 한국에서 갑으로 살다가 영국으로 이민 오는 그 날부터 철저한 을로서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를 보고 눈곱만 한 팁을 주면서 “안타까워” 하는 관광객도 있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였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평생 택시나 가이드나 하고 사는 거란다. 고등학교만 나오면 할 수 있는 일들은 정해져 있어. 어중간한 대학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엄마 아빠가 좋은 학원 보내주고 좋은 선생님 부쳐 주는 거야! 왜 공부 열심히 해야 하는지 알겠지? 최소 저 아저씨처럼 살지 않으려면 공부밖엔 없어! 너희들은 무조건 SKY는 나와야 한다.” 

그 훈계를 듣던 아들은 아빠에게 한마디 하였다. “여긴 미국이 아니고 영국이거든요!” 아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또한 단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졸지에 고졸로 변신해 한국에서 온 관광객 자녀들의 표본이 되고 말았다.      


을로 살아가는 일은 일 자체보다 갑이라는 사람들이 주는 상처가 더 문제였다. 그는 그때마다 군 시절의 행정병으로 권력을 누리며 PX로 불려 다니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으로 느끼는 을의 삶이 그나마 남아있던 자존감의 질량들을 줄여나가기 시작하였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 무너지는 순간들은 시도 대도 없었다. 마치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한 번은 삼성 런던법인에서 히스로 공항까지 임원 한 사람을 태워다 준 일이 있었다. 그는 비행기 시간이 빠듯해 보였다. 뒷자리에 앉아서도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간지점에서 그가 잠시 길을 잘못 들어 10분 정도 지체가 된 일이 있었다. 그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공항을 한두 번 다닌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하던 일을 멈추고 집중해서 길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갑질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의 말에는 비하는 없었지만 뼈가 들어있었다.      


“택시를 해도 장인 정신이 필요한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너무 생각 없이 산단 말이야! 대충 살아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없어. 뭐든지 철두철미하게 그리고 프로 근성으로 완벽하게 해야 성공해. 아무튼 인간은 실수할 수도 있지만 다음부터는 길을 잘못 드는 따위의 실수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비행가 놓쳐서 몇 백만 불짜리 계약 못하면 책임질 수 있어? 아무튼 삼성의 임원을 택시로 모시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고.”     


마침내 히스로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래도 명색이 삼성의 임원이었다. 임원 대접을 해주려고 얼른 내려서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트렁크 가방을 내려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비행시간에 늦어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뛸 거라는 그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팁은 고사하고 정확하게 택시비만 주고 그는 유유히 사라져 갔다. 삼성 임원이라고 해서 은근히 기대했던 팁을 바란 그가 바보였다.      


그는 자존심을 구겨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 가족을 책임져야만 하는 그였다. 그가 화가 난다고 한국에서처럼 화를 내면서 살 수는 없었다. 갑과 을의 삶은 국경을 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미니 캡이나 관광가이드의 고객은 한국 손님들이었다. 그것도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진상인 줄은 영국에 살면서 알게 되었다.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강해 보이면 넙죽 엎드리다가도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약해 보이면 그런 무시가 없다. 하지만 그는 자발적으로 을이 된 사림이었다. 숙명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어린아이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간이나 쓸개라도 내주어야 했다. 승무원보다 더 입이 찢어져라 웃어야 했다. 영국에서 을로 살아가는 일은 힘겨웠다. 영국 토박이들에게도 을이었다. 한국의 관광객이나 학생에게도 을이었다. 심지어 영어 못한다고 주권을 빼앗긴 가정에서도 을이었다. 그의 이름 끝 자를 을로 바꾸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정도로 을로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군과 직장에서 갑으로 살았던 그가 느끼는 을의 삶은 사사건건 질량 보존의 법칙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서울 선정릉 [모두의 캠퍼스] 강의 신청하기  / 월출산 국립공원 카페 [기억] 강의 신청하기


이전 03화 당신 런던 어학연수 뻥이지? 제주도 감귤농장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