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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Nov 13. 2019

행복은 엉덩이가 무겁지 않았다!

미스터리(Mr. Lee) #2. 런던, 고향이 되기까지

이삿짐센터와 허리디스크   

  

미니 캡으로 학생들을 공항에서 홈스테이 집까지 픽업해 주는 일은 그래도 낳았다. 가끔 갑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귀엽게 봐줄 만하였다. 그런 학생들에게는 런던의 범죄율과 사건 사고를 살짝 이야기해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갑과 을이 바뀐다.      


“아저씨 제가 가는 동네는 안전한가요? 만약 안전하지 않다면 어느 동네가 가장 안전한가요? 특별히 주의하거나 조심할 점들은 없나요? 홈스테이가 마음에 안 들면 옮길 건데 그때 연락드려도 되나요? 그리고 공부 마치고 돌아갈 때도 픽업해 주실 수 있나요?”      


자연스럽게 화이트 밴을 하나 구입하였다. 연식이 오래된 낡고 털털거리는 르노의 작은 밴이었다. 본격적으로 학생들 이사 서비스도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직업이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났다. 주로 런던 시내와 옥스퍼드 캠브리지 및 브라이튼의 연수생이나 학생들의 짐을 날라 주었다. 가끔은 본머스 까지도 갔다. 보통 이사 개념은 Door to Door 서비스였다. 하지만 그는 여학생들의 짐을 현관에 두고 차마 그냥 갈 수 없었다. 그 무거운 이민 가방들과 박스들을 4층이나 5층까지 날라주었다. 그때부터 그의 허리는 안녕하지 못하였다.      


런던 아파트들의 나이는 최소 100년 이상은 기본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 무거운 이민가방들을 끙끙거리며 4층이나 5층까지 날라주고 나면 겨울에도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흑기사 서비스는 허리의 흑 역사가 되고 말았다.      


일도 하고 여행도 하고 근육도 단련시키고 일석삼조가 따로 없었다.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이사하면 그를 찾았다. 그는 “크라운 서비스”라는 명함을 만들어 본격적인 이삿짐센터 일을 시작하였다. 주말에 서너 건은 기본이었다. 새벽과 늦은 밤에는 공항 픽업도 하였다. 그의 아내는 일이 있는 날에는 도시락 두 개를 정성스럽게 싸 주었다. 그가 가장 행복할 때는 픽업이나 이사를 마치고 경치 좋은 곳에서 도시락을 까먹는 일이었다. 특히 남쪽 브라이튼과 본머스가 단골 지역이었다. 가끔 이스트본이나 헤이스팅스에서 까먹는 도시락은 더욱 운치가 있었다. 반면 옥스퍼드나 캠브리지는 그다지 운치가 없었다. 일을 하면서 영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한다는 일은 축복이었다. 한 번도 고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놀러 다니면서 돈도 번다고 생각하였다. 허리가 서서히 상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는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점점 바빠져 갔다. 그가 삼성 임원의 꼰대처럼 내뱉은 훌륭한 조언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크게 될 놈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런던에서 학생 이사할 때는 기본적인 짐들은 아파트나 플랫 아래로 내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삿짐을 실러 약속된 시간에 가면 그 시간에 이삿짐을 싸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하나의 일정이 밀리면 그날은 온종일 정신이 없어진다. 그래도 이사만 있으면 다행이다. 문제는 공항 픽업이 있는 날에는 차를 승용차로 바꾸어서 나가야 한다. 급할 때는 화물 밴 트럭으로 공항에 가서 픽업한 일도 있었다.      


이삿짐을 날라 주면서 온몸은 근육질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가 몸 짱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 무거운 짐들을 5층까지 올리거나 내리다 보면 몸 짱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로 운동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토요일 오전의 축구만큼은 빠지지 않았다. 토요일이 가장 바쁜 날인데도 이사는 오후로 미루었다. 공항 픽업은 여전히 새벽과 저녁에 주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토요일 오전의 축구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매주 살아있다는 증명서 발급 같은 것이었다.


토요일 날 오전 축구를 마치면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와 정신없이 샤워를 마치고 일하러 런던 시내로 나갔다. 물론 그의 아내가 싸준 2개의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도 행복했고 어떤 이삿짐을 만나도 두렵지 않았다. 피아노만 빼놓고 말이다. 그는 항상 자신의 이사처럼 친절하게 날라주었다. 그가 연수 온 시절을 회상하며 그 자신이 겪었던 고충과 두려움을 생각하며 편하게 대해주었다.     

 

가끔 갑 질 하려 드는 학생들에게는 꼰대처럼 이렇게 또는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조언도 시작하다. 그럴 때마다 삼성의 임원이나 관광객 가족이 생각나서 치가 떨리기는 하였다. 영국에 몇 년 살았다고 제법 아는 채 하거나 잘난 채 하는 그 자신의 모습에서 그는 한국인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자각하였다. 피는 못 속인다는 명언을 누가 했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하였다.      


행복은 결코 엉덩이가 무겁지 않았다.


그럭저럭 세 가지의 일을 하면서 그는 행복하였다. 아내의 정성스러운 도시락을 먹을 때는 승무원 못지않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한국에서 겪던 우울이나 불면은 상상도 못 했다. 운전하다가도 졸릴 정도로 노동의 강도는 그를 단련시켰다. 몸의 근육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근육까지도 단련되어 갔다. 자존감 또한 결코 평균치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행복이 별거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이었다. 우량아인 아이도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그녀의 야망인 스시가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법인을 설립하여 work permit 비자만 받으면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그의 이민생활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 정신없던 시절이 가장 행복하였는지도 모른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행복은 다른 얼굴들을 내밀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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