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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Nov 12. 2019

당신 런던 어학연수 뻥이지? 제주도 감귤농장도..

미스터리(Mr. Lee) #2. 런던, 고향이 되기까지


당신 어학연수 뻥이지?     


그는 런던에서 그의 아내는 뉴질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하였다. 공교롭게도 90년대 초반의 같은 해였다. 그런데 누가 봐도 그의 영어를 듣고 있노라면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영어의 절반은 콩글리시였다. 영어라고 내세우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반면 그의 아내는 유창하였다. 심지어 영국 사람들도 놀랄 정도였다. 그리고 항상 비교가 이어졌다. 당신의 아내는 영어를 저렇게 잘하는데 당신은 왜 영어를 못하느냐? 대학은 나온 거야?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그는 한마디로 기가 찼다. 그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영어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소통에도 어려움이 없다. 문제라면 그의 아내가 너무 잘하는 것뿐이다. 얼핏 들으면 그의 논리는 틀리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전화 영어였다. 영국은 모든 것이 예약 문화다. 당시 인터넷 보급률이 낮아서 전화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인터넷은 전화기선을 따서 사용하는 모뎀 방식이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영어와 전화기로 하는 영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표정이나 입모양을 보고 하는 영어는 못 알아들어도 유추라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전화 영어는 토익시험보다 10배는 어려웠다. 사람마다 악센트나 발음이 달랐다. 특히 입을 벌리지 않고 웅얼거리는 할머니들의 영어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에게 수화기를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내는 너무도 쉽고 가볍게 처리하고 수화기를 내려놓곤 하였다. 영어 하나로 결혼생활의 모든 주권은 아내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나설 일이 있으면 그는 아내 뒤로 숨었다. 그렇게 영어 울렁증이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실망하거나 좌절할 그가 아니었다. 뭐가 돼도 될 놈이 그깟 영어 하나 때문에 스트레스까지 받지는 않았다.      


문제는 아내의 의심이었다. 제주도 감귤농장은 그렇다 치고 런던 어학연수까지도 사기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1년 반이나 런던에서 어학연수를 한 사람의 영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 날은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그의 아내가 뜬금없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 정말 런던에 어학연수 와서 영어 배운 거 맞아? 괜찮으니까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해줘! 어학연수는 뻥이지? 감귤농장처럼 말이야!”     


한마디로 그도 어이가 없었다. 그 흔한 런던의 사진 한 장 제시하지 못하였다. 큰 형님 댁에서 보관 중이던 앨범이 이사하면서 분실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유명 연예인 채 모씨와 팔짱 끼고 찍은 사진을 보여줄 수도 없었다. 그 시절의 여권에 찍힌 스탬프도 보여줄 수 없었다. 여권을 분실하면서 그의 이름이 바뀐 것이다. 영어 표준 표기법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고 구청 직원이 권고해 주었다. 생각해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영국과의 첫 대면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여권을 계속 사용하는 한 그는 영원한 전과자였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조금 자라자 아내의 활동 반경은 점점 넓어졌다. 반면 그의 활동 반경은 아내에 비해 반비례하고 있었다. 아내는 그 시기부터 초밥 가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하루살이 인생을 살고 있었다. 화이트칼라에서 블루칼라로의 전환은 그의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시골에서 나서 자랐지만 삽질 한번 안 해본 그였다. 심지어 군 복무도 행정반이라는 사무실에서 하였다. 졸업 후 첫 직장도 항상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다녀야 했다. 


유일하게 그가 노동이라는 것을 해본 기억은 이민 8년 전 어학연수를 위해 분당에서의 막노동이 전부였다. 



5개월간의 아파트 현장에서 그가 맡은 일은 벽돌 조였다. 가장 기술이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벽돌을 쌓는 일이 아니고 벽돌을 나르는 일이었다. 층마다 할당된 벽돌을 지고 날라야 했다. 첫 달은 병원비와 약값이 더 들어갔다. 젊은 녀석이 생긴 거와는 달리 일 못한다는 소릴 자주 들었다. 막 군에서 전역한 예비역이 맞느냐고 의심의 눈초리로 처다 보다가 끝내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군가를 불러보라는 반장 아저씨도 있었다. 그는 심지어 군가도 잘 몰랐다. 그가 군가를 부를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행정반의 사무실에만 있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5개월 내내 같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막노동판에서 한 달이 지나자 그는 아파트 건설 현장의 특성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 어려운 벽돌 조를 5개월 내내 해야 한다는 사실은 끔찍하였다. 그가 속한 팀은 벽돌을 쌓고 미장까지 하는 팀이었다. 5개월 내내 그 일만 하였고 그는 벽돌만 지어 날랐다. 시멘트로 허술하게 찍어낸 벽돌은 짊어지고 가다가 넘어지면 깨지기도 하였다. 그만큼 허술한 벽돌이었다. 다음 조인 창틀 팀이 들이닥치기 때문에 항상 속도와의 싸움이었다. 심지어 음식물 투척 구에는 벽돌 대신 스티로폼을 대고 시멘트로 바르기도 하였다. 당시 분당의 일부 아파트는 음식물 투척 구가 있었다.      


아내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그였지만 낙담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잠시도 한눈팔 틈이 없었다. 처음 3년은 영국의 선술집인 펍에서 맥주 한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였다. 한국의 물가와 비교하면 당시 런던의 물가는 살인적이었다. 그래서 도시락을 두 개씩이나 싸가지고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3년이 지나자 비로소 한국의 물가와 비교하는 습관이 사라지고 있었다. 영국의 물가 자체로 보이기 시작하기까지는 3년이란 세월이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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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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