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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Nov 12. 2019

학교가 부도나고 총리까지 나서다!

미스터리(Mr. Lee) #2. 런던, 고향이 되기까지

비자 학교 부도사건에 토니 블레어 총리까지 나서다.    

 

그는 런던의 영어 학교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도 선생과 친구들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홈 오피스 이민국의 불시 점검에 대비하는 철저함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치 촉수나 더듬이로 목표물을 감지한 다음 사냥하는 곤충처럼 말이다. 그가 최초 입국 시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억류되었다 추방 직전 극적으로 풀려난 아픔이 그 촉수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아무리 비자 학교지만 영국이라는 나라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8년 전 공항에서 호되게 당한 경험은 영주권자가 된 지 오래지만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고 있었다. 그 아이를 위해서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어쩌면 그가 이민을 결정한 가장 큰 계기도 아내 뱃속의 아이였다. 그는 생각보다 부성애가 강한 사람이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내 뱃속의 아이 인생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고 한국을 떠나왔던 그다.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그가 잘(?) 나가던 직장에 사직서를 내밀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이유다. 하지만 그 부성애라는 것은 모성애에 비하면 새발에 피와 같은 것이다. 아무도 인정조차 해주지 않는 사랑이다. 심지어 당사자인 아들 녀석은 물론이고 그의 아내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만다. 있기는 하지만 드러낼 수도 없는 짝사랑만도 못한 것이 부성애였다.

     

첫 번째 1년은 두 번의 관광비자로 버텼다. 참고로 영국과 한국은 6개월 관광비자 협정 국가다. 유럽이나 기타 나라들이 한 달에서 3개월이라는 점에 비하면 파격적이었다. 이유는 한국인의 명품 사랑과 관광 그리고 어학연수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모두 영국 정부에 돈이 되는 것들이다. 반면, 영국인들이 한국에 가서 6개월간 체류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어민 교사로 한국에 가기 위해서도 비자가 필요하였다.  한마디로 한국사람들의 지갑을 털어보겠다는 의도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의 버버리 사랑은 세계 최고였다. 일본은 루이비통이었다. 

  

두 번의 관광비자로 1년을 버틴  다음 해부터는 신분 세탁에 돌입하였다. 물론 당시에는 모두 합법적이었다. “에번 다인”이라는 학교에 등록해 1년짜리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학교가 비자 학교라는 사실은 그 학교 학생들만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학교는 5개 이상의 캠퍼스를 운영할 정도로 승승장구하였다. 첫 번째 1년은 아무런 이상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문제는 두 번째 학교 등록을 하면서 발생하였다. 학교 등록을 하면 학교에서 등록 서류를 발급해 준다. 그 서류와 여권을 가지고 런던 남부의 이스트 크로이든에 있는 홈 오피스에 직접 가서 비자를 받아온다. 보통 한나절 정도면 가능하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영국이 이민자나 학생들에 대해 가혹하리만큼 깐깐하지 않았다. 경기도 호황이었고 이민자들이 해야 할 일자리가 넘쳐났다. 어학연수 학생비자로도 일을 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영국이 브렉시트 사태를 겪고 있는 것도 그 발단은 시리아와 동유럽 각국에서 몰려드는 이민자 문제가 도화선이었다.     


“영어학교가 고의 부도를 내고 폐업하다! 교장은 아프리카로 먹튀 했다”     


두 번째 학생비자를 받고 그다음 주에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간발의 차이였지만 이미 비자를 받은 학생들도 장담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바로 그가 다니던 비자 학교 교장이 부도를 내고 잠적해 버린 것이다. 학생들로부터 받은 어마어마한 돈을 들고 다른 나라로 잠적해 버린 것이다. BBC 등 영국 언론들은 1주일째 그 문제를 톱뉴스로 내보내고 있었다. 그는 어이없는 사태를 뉴스로 접할 때마다 좌불안석이었다. 검찰까지 나서 그 학교의 비리를 파 해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의 비리들이 터져 나왔고 그것마저 이슈가 되어갔다. 런던에 있는 세계 각국 대사관들은 분주해지기 시작하였다. 한국 대사관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한국의 9시 저녁 뉴스에까지 나왔다고 한다.   

    

문제는 피해를 본 학생들의 구제책 마련이었다. 등록을 하고 비자 신청마저도 못한 학생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억세게 운이 좋은 그도 이번만은 피해 갈 수 없는 초유의 사태였다. 그처럼 며칠 전에 비자를 받은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학교가 없어졌는데 법정 수업 일수를 채울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미 발급한 학생비자도 취소해야 한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학교 하나의 부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로 인한 피해자가 몇 천 명에 이르는 중차대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급기야 총리까지 나서서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미 등록해서 학생비자를 받은 학생들은 비자를 유지시켜 주기로 하였다. 대신 1년 치 수업료를 반납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로서는 최상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미 등록하고 비자를 받지 못한 학생들은 어느 정도 보상을 받고 다른 학교로 옮겨주되 학생비자는 발급해 주는 조건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토니 블레어 총리에게 감사의 편지라도 쓰고 싶었지만 그는 후일을 위해 자재하였다.      


이번 학교 부도 사태를 경험하며 그는 내년에도 학생비자로 버티기는 쉽지 않을 것을 직감하였다. 그는 어떻게든 회사를 설립하여 노동허가서(work permit) 비자를 받을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때까지도 그는 정착을 하지 못하였다. 아이 키우고 겨우 먹고 살 정도의 돈만 물어오는 가난한 아빠였다. 아빠 새들이 밥을 물어오지 못하면 둥지의 새끼 새들은 굶주려야 한다. 새들은 식량을 비축할 수도 없다. 그처럼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도 없다. 새들에 비하면 그는 그래도 행복하다고 자신을 토닥여주며 버티고 있었다.      


급할 때는 한국의 BC카드에서 현금서비스까지 받아가며 버티는 삶 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가 이민 당시 영국에 가지고 온 돈은 천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그가 받은 퇴직금과 결혼 축의금 일부는 그의 마이너스 통장을 해결하는 데 사용하였다. 청약적금과 보험 등을 해지하고 결혼 축의금 일부까지 해서 그나마 천만 원도 마련한 것이었다. 그가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며 회식의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이구동성으로 한말은 두 가지였다. “총각들은 결혼해야 돈을 모을 수 있다.” 와 “언젠가는 직장 때려치우고 자기 사업하겠다.” 는 것이었다.      


천만 원으로 영국에서 아이를 양육하며 살 수 있는 날은 100일 정도였다. 일단 집을 렌트하려면 6주 보증금이 필요하다. 거기에 매달 집세와 살인적이니 공과금들에 치여 살다 보면 한국이 그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놈의 카드 돌려막기는 한국에서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영국에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카드를 돌려서 막아야 했다. 그의 아내도 매달 27일만 되면 우울해지며 분주해지기 시작하였다. 오죽하면 하루는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당신 연애할 때 했던 말 있잖아! 제주도 한라산 기슭 1100 고지에 근처에 감귤농장 50만 평짜리 있다고 한 거 말이야. 너무 크고 일부는 국립공원에 인접해서 팔리지 못해 방치해 뒀다는 그 감귤농장 땅 그거 뻥이지?”     


몇 번 만나지도 못하고 급하게 결혼했지만 그 말을 그가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는 물론 농담으로 그 이야기를 하였다. 아내뿐만 아니라 그가 결혼 전 만나왔던 수많은(?) 아가씨들에게 농담처럼 흘리듯 한 말이었다. 그의 촌스럽고 소박한 외모로 보면 감귤농장과 얼핏 매치가 되어 보였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그 이야기를 들고 나온 것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그의 아내가 이민 초기 얼마나 생활고에 시달렸으면 말도 안 되는 그 오래된 농담을 기억해냈을까! 그는 지구 축이 흔들리며 지진이 일어나는 착각에 빠졌다. 연애시절 술자리에서의 농담을 기억하게 만든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왜 그는 쥐뿔도 가진 것이 없을까? 생각하니 그의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다. 물론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이를 보면서 후회가 밀려오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잘 다니던 직장에서 동기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는데도 사서 고생하는 자신을 처음으로 원망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가만히 않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블루칼라로서의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라 혼쭐이 나고 있었다. 그는 동시에 세 개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총알 없이 사냥을 나간 포수가 사냥을 하면 얼마나 할 수 있을까? 그는 하루빨리 총알을 만들어야만 했다.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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