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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Dec 01. 2019

미용사님! 귀는 남기고 잘라 주세요

영국의 오만과 편견 1권 이방인

4한 달에 한 번만 여는 미용실     


무면허, 무자격, 무경험의 미용사에게 귀가 잘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영국 이민 초기에 흔히 들 겪는 일이 있다. 한국과의 물가 차이가 심하다 보니 생기는 해프닝이었다. 바로 한 달에 한번 집에 간이 미용실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이야 물가 차이가 거의 없어졌지만 그 당시는 심각하였다. 미용사는 아내가 되고 손님은 그와 그의 아이가 된다. 런던에 미용실이 없어서 집에서 커트를 한 것은 아니다. 런던에 차고 넘치는 것이 미용실이었다. 그런데 굳이 집에서 이발을 하는 이유는 바로 살인적인 런던의 물가였다. 당시 물가 기준으로 한국 미용실의 4배 정도 가격차이가 났다. 한국에서는 2주에 한번 충무로의 단골 미용실에 가서 커트를 하던 그였지만 런던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덥수룩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덥수룩한 중국 사람들의 헤어스타일을 닮아가고 있었다. 당시에는 전체적으로 짧은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귀 주변머리와 뒷머리를 바리 깡으로 밀듯이 짧게 치는 스타일이었다. 얼핏 보아도 쉬워 보였다.      


간이 미용실이 처음 집에 차려졌던 날은 아내와 심하게 다투었다. 아내는 생전 처음 미용사로 데뷔하는 날이었다. 물론 그와 그의 아들은 미용 교보재가 되어야 했다. 마루타가 따로 없었다. 단골 미용실에 가도 머리스타일이 잘 나오지 않는 그였다. 그의 머리는 완전 직모였다. 그의 성격을 어쩜 머리카락까지도 그리 닮았는지 신기하였다.


      

처음 집에 간이 미용실이 차려지던 날의 풍경은 저잣거리의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일단 신문지로 카펫 바닥을 덮었다. 그것도 몇 겹으로 촘촘하게 덮었다. 그리고 식탁의자를 가져다가 아이부터 공포의 미용이 시작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하던 녀석이 온갖 짜증을 부렸다. 아이의 커트 시간에는 아예 전기 청소기 호스를 들고 대기하였다. 유독 예민한 피부를 자랑하는 아이는 머리카락이 살갗에 닿는 것을 견디지 못하였다. 용케도 아이의 순서가 끝나고 그의 차례가 왔다. 그는 자연인처럼 차라리 머리를 길러서 묶고 다니겠다고도 하였다. 제발 아이에서 멈추길 바랬지만 그건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그의 아내는 대담하게 커트를 시작하였다. 거울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 커트 과정을 지켜보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결국 공포의 이발은 끝났고 욕실로 달려갔다.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좋지 않았다. 그는 결국 아내에게 디테일을 알려주며 다시 다듬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머리는 점점 짧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끝내 스포츠형 머리가 되고 말았다. 런던에서 아내의 첫 미용실습은 그렇게 끝이 났다. 무면허, 무자격, 무경험의 미용사에게 귀가 잘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날 속이 상하여 저녁도 먹지 않고 단식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그는 결국 아내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앞으로는 제대로 된 미용실에서 자르겠다며 핏대를 높였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공포의 간이 미용실은 한 달에 한번 문을 열었다. 그렇게 마루타로 몇 년을 살다 보니 아내도 실력이 늘어가고 있었다. 귀가 붙어있는 것이 용하던 시기를 넘어서자 조는 여유까지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난하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하던 시기였다. 아내와도 문제가 없었고 아이는 잘 자라주었다. 고양이도 쥐의 번식기만 아니면 아내를 공포에 떨게 하지 않았다. 신문지가 몇 겹으로 깔린 거실에서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뒤 집어 쓰고 두려움에 떨던 그 순간들이 행복이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아도 괜찮았다. 머리야 금방 자라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부자를 왜 맹구(개그만 심형래의 별명으로 그의 희한한 헤어스타일과 행동 때문에 생긴 별명, 촌스러움의 대명사!)로 만들었냐고 따져도 소용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그렇게 머리를 잘랐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이민살이는 시집살이보다 더 맵고 혹독하였다. 아무튼 그는 양쪽 귀가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그와 그의 아이가 좋아하는 화가 반 고흐보다는 행복한 사내였다. 그의 아이는 반 고흐가 물감을 지나치게 낭비한다는 예리한 평론을 내리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반 고흐의 매력에 빠져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토요일 오전에 축구 경기가 끝나고 가끔 회원들과 점심식사를 같이 한다. 메뉴는 주로 자장면이다. 대화 도중 아내가 머리 자를 때가 가장 무섭다고 하면 다들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듯이 뒤로 젖히며 웃어재낀다. 아! 이민 선배들도 그랬구나! 라며 그는 속으로 씁쓸하지만 흐뭇해지곤 하였다. 그만 가난하고 그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안도는 순간 기쁨으로 변하여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오늘 내가 쏩니다. 많이들 드세요! 한 달에 한 번만 문을 여는 공포의 미용실은 그가 work permit 비자를 받고 나서야 영업 중단을 선언하였다. 아이도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와 단둘이 여행할 때면 엄마의 무서운 가위질에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귀라도 잘리면 어떡하지! 귀는 봉합수술이 될까! 반 고흐도 봉합수술이 안 된 걸로 아는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가난하다는 의미를 이해해가고 있었다. 가난은 이렇게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이었다. 언제 어떻게 어느 쪽 귀가 잘릴지 모르는 일이 가난이었다. 이발이 끝나고 비닐봉지를 벗으면 옷 속에서 머리카락이 더 많이 나오는 것이 가난이었다. 신문지를 몇 겹으로 깔아도 그의 억센 직모가 카펫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가난이었다. 지금처럼 다이슨 청소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테이프로 일일이 찍어내야 박혔던 직모가 빠져나왔다. 못을 박은 것도 아닌데 억센 머리카락들은 청소기로는 빨려 나오지 않았다.      


삶은 역설로 가득하다는 사실도 가난이 가르쳐준 선물이었다. 간이 미용실이 매달 열리는 그 시절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가난할 때가 오히려 행복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좀 먹고살만해지면서 간이 미용실은 사라졌다. 사람의 욕심은 중력과 닮아있었다. 질량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중력도 커졌다. 생활이 좀 나아지면 씀씀이부터 커졌다. 인간은 어쩜 그렇게 환경에 잘 적응해 나가는지 신기할 정도다. 제법 비싼 미용실을 예약해서 아들과 다니면서 더 이상 귀가 잘릴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옷 속이나 카펫에 머리카락이 박히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중간에 샴푸까지 해주고 서비스로 두피 마사지까지 받았다.      

그토록 싫었던 한 달에 한번 문을 여는 미용실이 그리워지는 나이가 되었다. 생전 처음 아내의 손에 가위를 들게 하고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쓴 채 앉아있던 시절이 가장 행복하였다. 귀만 붙어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미용실에서의 커트는 항상 아들과 동행하였다. 어차피 동행하는 김에 그도 같이 커트를 하였다. 한인 타운에서 가장 비싼 미용실에서 커트를 시작하였다. 아이는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마무리된 자신과 아들의 머리 모습을 보면서 행복하다는 생각보다는 아내가 먼저 떠올랐다. 아이도 엄마가 떠올랐다고 하였다. 가난이 항상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가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끈끈한 사랑과 공감을 무기로 장착하고 살아야 했다. 아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거나 닳고 닳은 바퀴를 가진 중고 유모차를 사 오던 날은 슬펐고 서러웠다. 가난이 싫었고 저주스러울 정도로 비루함마저 안고 가야 하는 현실이 미웠다. 

가끔은 한국에 계시는 아버지를 떠올리기도 하였다. 맨주먹으로 세상과 맞서게 만든 시골의 아버지조차 미웠다. 누군가는 부모 잘 만나 호위 호식하며 사는데 그는 지구 반대편의 땅에서 온갖 현실의 가난과 맞서야만 했다. 물론 자발적인 그의 선택이라서 아버지를 탓해서도 안되었다. 가난의 이면에 소소한 행복마저 없었더라면 감당하지 못할 악몽이 되었을 것이다. 그를 포함한 가족을 잔인하게 괴롭혔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내와 아이에게는 항상 미안했다. 혈연, 지연, 학연은 물로 가진 것도 없는 그가 가난을 벗어나는 일은 열심히 몸을 파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시간과 노동력의 물물교환으로 인한 수입만으로는 평생 가난을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생산수단이나 시스템을 만들지 않고서는 가난을 벗어나는 일은 서울이나 런던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삶이란 추억을 리필하며 지난하고 반복되는 하루를 밀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삶이 꼭 부자일 필요는 없다. 부자이면서 행복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요즘은 3주에 한번 삼성동의 연구소 근처에서 커트를 한다. 만 원짜리다. 런던의 그 단골 미용실에 비하면 몇 배 차이가 난다. 물론 서울에도 고가의 미용실이 수두룩하지만 그는 삼성동의 할머니가 운영하는 가장 허름한 만 원짜리 미용실의 단골이 되었다. 그 미용실의 낡은 의자에 앉으면 영국의 IKEA에서 구입한 싸구려 식탁 테이블이 생각난다. 물론 할머니는 아내보다 훨씬 나이가 들었지만 할머니의 가위에서 젊은 시절 아내의 살벌했던 가위가 생각난다. 할머니에게도 청춘이 있었고 신혼이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할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계셨다. 갑자기 가위라도 잡아야만 했던 가슴 아픈 사연을 말씀하셨다. 누구나 아픈 기억들을 가슴 한켠에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만원으로 그 가난하던 시절을 추억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수요일엔 다시 그 만 원짜리 미용실에 들러야 할 것 같다. 어느새 머리들이 자라서 귀를 찌르기 시작한다. 운명적인 직모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달이면 짧은 겨울방학을 이용해 아이가 런던에서 온다. 이젠 성인이 다 된 아이지만 그 아이 때문에 지금까지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보물 같은 존재다. 그 아이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를 살아있게 해주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DNA와 피만 나눈 것이 아니다. 가난이라는 추억도 함께 한 아이다. 팔불출인 그가 살아가고 즐거워하는 이유다. 심하게 우울감이 급습할 때마다 글을 쓰지만 글로서도 막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때는 그의 첫째 아이와 둘째 고양이를 생각한다. 어쩌면 삶이란 추억을 리필하며 지난하고 반복되는 하루를 밀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삶이 꼭 부자일 필요는 없다. 부자이면서 행복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도 부자였으면 한다.




영국의 오만과 편견 1권 이방인 (2019년 11월 25일 / 하루 만에 책 쓰기로 제작된 책의 일부임)

참고로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는 삼성동 아지트리에서 "나는 매주 한 권 책 쓴다" 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 만에 책을 쓰고 매월 또는 매주 책을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처럼 매주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이 15명 이상 되었다. 앞으로도 그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강의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https://www.onoffmix.com/)에서 할 수 있다.


"나는 매주 한 권 책 쓴다" 강의 신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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