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길고 먼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긴 화요일이 될 것이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차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냉기를 품은 겨울비다. 07시에 맞춰진 휴대폰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여행을 떠나야 할 시간이라고 호들갑이다. 알람을 맞춰놓고 잠들기도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알람이 필요 없는 일상이었다. 그 일상에도 매듭을 지어야 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가을에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3개월의 숙려기간을 가졌다. 아이가 생일이 빨라 2주 후면 성인이 된다. 의미 없는 숙려기간이지만 2주 차이 때문에 그래도 3개월을 더 법률적인 부부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 아내에게는 끔찍한 3개월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서 크게 의미를 둘 수 없지만 한번 맺어진 인연에 매듭을 짓는 과정은 길고 힘겨웠다.
엉킨 매듭을 풀지 못하고 끊어야 하는 일을 운명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첫눈에 반해서 결혼한 것도 운명이었다. 운명이 숨겨진 얼굴을 보여주는 것 또한 운명이다. 그래서 군말 없이 받아들인다. 지나면 별일 아닌 것들도 그 순간에는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황망하고 마음이 타들어갔다. 그 아픔은 온몸의 신경을 타고 흐른다.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듯 아픔을 담은 스트레스는 신경을 타고 흘렀다. 아픔만이 아니었다. 가장으로서 가정하나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죄책감도 같이 흐르고 있었다.
나의 신경세포들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고지혈증처럼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여름이다. 아내로부터 가정법원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느냐는 톡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바뀐 휴대폰 번호를 미쳐 알려주지 않았다. 그 뒤로부터 정확히 1주일 후에 가정 법원의 재외국민 이혼 담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날도 화요일이었고 폭우가 퍼부었다. 이번 화요일에도 비가 내렸다. 그 전화 한 통으로부터 자율신경계의 이상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온몸은 수축하고 감각이 무디어지기 시작했다. 의사는 몸이 서서히 굳어가는 루게릭이나 신경세포가 죽어서 역시 몸이 굳어가는 다발성 경화증을 의심하였다. 서울에서 이름깨나 있다는 병원들을 전전하였지만 병명조차 알지 못하였다. 막연하게나마 전신 무감각증을 의심할 뿐 현대의학으로는 치료는 고사하고 정확한 진단조차 불가능한 병이라고 한다.
의사들은 온갖 정밀검사기법들을 동원하여 원인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심리적인 요인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희귀 난치병이라고 부른다. 차라리 암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크다. 암은 어느 정도 치료가 가능해졌다. 워낙 암환자가 많다 보니 암은 그리 어려운 병이 아니다. 초기에만 발견하면 완치되는 암이 늘어가고 있다. 암환자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들 중의 하나가 내가 될 줄은 몰랐다.
비가 오는 화요일은 일상이지만 오늘은 평범하지 않은 화요일이다. 하지만 일상은 일상이다. 여느 때처럼 샤워를 하고 드라이를 한다. 헤어스프레이를 뿌리고 습관처럼 헛기침을 한두 번 한다. 전기면도기로 면도를 하고 스킨과 로션을 바른다. 특별한 날이라고 로션부터 바르지는 않는다. 루틴대로 옷을 입고 구찌와 폴로 중 구찌 향수를 셔츠에 뿌리고 울 니트를 입는다. 향수는 매번 그날 아침의 기분에 따라 선택한다. 아침마다 향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직은 신경들이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지난밤에 챙겨둔 여행용 캐리에는 입원 시 필요한 용품들이 들어있다. 캐리어를 끌고 오피스텔을 나선다. 마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설렘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긴 이별 여행을 떠나려나 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우편함들이 있는 현관을 지나쳐 밖으로 나서자 비가 제법 내린다. 다시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들어와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우산을 챙기려고 오피스텔로 향한다. 현관문을 열고 우산을 챙긴다. 3단 접이식 검은색 우산이다.
하마터면 창문의 커튼을 열어주지 않는 만행을 저지를 뻔하였다. 커튼을 활짝 열어주고 미나리와 고구마 순에 물을 듬뿍 준다. 나의 살가운 반려 식구들이다. 미나리는 봉사를 다니는 벧엘의 집 부엌에서 몇 뿌리 얻어왔다. 고구마순은 여동생이 보내준 고구마에 싹이 난 것들이다. 오피스텔은 베란다가 없기 때문에 고구마에 싹이 나기 적합한 온도다. 싹이 난 고구마들을 골라 1/3 정도 잘라 물에 담가 두었더니 뿌리가 나고 싹이 순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나머지 고구마들은 지하주차장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차의 트렁크에 보관 중이다. 게을러서 고구마를 삶아먹는 일도 만만치 않다. 안쓰러운 녀석들에게 다시 물을 주려면 1주가 될지 2주가 될지 모른다. 화요일 오전에는 이혼을 하고 오후에는 무릎 수술을 위해 분당으로 가서 입원을 해야 한다. 커튼을 열어주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자양분인 빛을 만날 수 없다. 3층의 서향이지만 빛이 들어오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다. 어둠 속에서도 생명이야 유지하겠지만 기약 없는 어둠을 견디는 일은 고구마순과 미나리들의 몫이다. 마치 내가 그 긴 어둠을 통과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어둠의 끝이 동굴이 아닌 터널이기를 희망하면서 버텨온 날들이다.
알람이 7시에 울린 이유는 10시까지 서울 가정법원에 출두 때문이다. 판사님의 최종 판결이 있는 날이다. 한강신도시에서 양재동까지는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 김포공항역에서 9호선 급행을 타고 고속터미널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탄다. 양재역에서 나오자 역시 비가 내리고 있다. 역에서 법원까지는 100미터 남짓 거리다. 가정법원 2층에서는 대여섯 커플이 이미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나란히 앉아있는 커플은 없었다. 신분증을 제시하자 남편과 아내 이름이 전광판에 뜬다. 이름 마지막자가 지워져 있다. 세 번째가 내 순서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커플이 왔다. 재외국민인 나만 혼자다. 판사님은 젊은 여자다. 동그란 안경 태에 검은 법복처럼 보이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름만을 확인하고 끝이다. 그 흔한 재고의 여지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도 없다.
AI에게 내줄 일자리에서 0순위가 판사라더니 실감이 난다. 20년의 세월이 1분 만에 반 토막이 나고 만다. 판사로부터 건네받은 서류들을 들고 법원을 나선다. 캐리어의 작은 바퀴들이 삐걱거리며 저항한다. 내친김에 서초구청으로 향한다. 3개월 내에 구청에 신고하지 않으면 이혼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한다. 가족관계부서에 가서 서류를 제출한다. 그리고 서류가 접수 처리되었다고 한다. 수수료도 없다. 역시 1분 만에 또다시 20년의 세월이 반 토막이 난다. 구청을 나서는데 여전히 비가 내린다. 그렇게 오전에는 이혼을 하고 오후에는 왼쪽 무릎 수술을 위해 신분당선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한 손에는 3단 검은 우산이 다른 한 손에는 여행용 캐리어가 들려있다. 내리는 비를 작은 3단 우산으로 가리며 오래된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