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대에서 어머니가 불러준 노래!

병상일기 #4, 수술 당일날의 기록

by 런던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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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남들은 별거 아니라고 하는 무릎 수술이지만 나에겐 처음 겪어보는 일이다. 내 몸을 마취하고 메스로 피부를 갈라서 그 내부에 있는 뼈를 비롯한 여러 부위들에 인간의 손이 처음 닿는 신비로운 일이기도 하다. 남들에겐 정말 별거 아닌 수술일 수도 있다. 보통의 인간들이라면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수많은 응급 환자들의 고통보다는 당장 자신의 고통이 먼저다. 심지어 가족도 예외일 수 없다. 자신의 손톱 밑에 보이지도 않을 크기의 가시 하나만 박혀도 온 신경은 그곳으로 집중된다. 가시를 제거하기 전까지는 세상만사가 귀찮을 뿐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화요일 오전 6인실에서 수술실까지 이동은 휠체어로 이루어졌다. 그 1분 정도의 이동시간 중에도 많은 타인들이 보인다. 누가 누구를 응시하는지조차 혼란스럽다. 병원에는 온갖 환자들로 북적인다. 나처럼 수술하러 가는 사람, 방금 수술을 마치고 입원실로 올라오는 사람, 수술한 지 며칠 되어서 휠체어로 움직이는 사람 등 환자들마다 다른 시점을 살아내고 있었다. 환자가 되려고 수속 중인 무리들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만 시야에 들어온다. 타인으로부터 동질성을 발견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일까!

수술실 출입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나의 휠체어를 밀고 왔던 분은 수술실의 벨을 누른다. 수술실에서 간호사로 보이는 분이 와서 환자를 인수인계한 후 수술실 문이 열린다. 수술실 방들에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낯선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내가 수술할 방에는 이미 정중앙에 수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방은 생각보다 넓다. 수술대 위에는 파란 색상의 비닐이 덮여 있었고 나는 그 위로 옮겨졌다. 전공의로 보이는 서너 명의 의사들이 수술 준비를 시작한다. 마취 전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수술 부위를 다시 확인한다. 마취주사는 허리에 찔러졌고 약간 따끔한 정도의 통증이 감지되었다. 주사는 워낙 많이 맞아서 웬만한 주사는 느낌도 없을 정도다. 특히 지난해 초 서울의 모 한의원에서의 주사는 잊지 못한다. 허리디스크 환자를 주사로 치료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한의원 원장님은 결국 항복을 선언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더 이상 허리에 주사를 찌를 부위가 없다는 것이 그 항복 문구였다. 한 달 반 동안 주사란 주사는 다 찔러댄 것이다. 심지어 봉침까지 등장했었다. 각종 물리치료는 기본이었다. 하지만 효과는커녕 오히려 악화되는 느낌이었다.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한의원 채질이 아니어서였을까!


하반신 마취가 감지되면서 수면 마취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잠들기 전까지도 병원장이자 수술집도의인 선배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저 인턴들이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같이 축구하는 후배의 다리를 인턴에게 수술시킬 리 없다는 확신으로 미소가 살짝 퍼질 무렵이었다. 수술실 천장에서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나에게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를 불러주고 계셨다.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과 요양원을 전전하시다 6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의 수술 대위에 나타나신 것이다. 수면마취 시간은 길지 않아서 몇 분 이내에 잠이 든다고 한다. 그 몇 분 이내에 어머니는 고향의 봄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사나 음정 하나 틀리지 않고 불러주셨다.


뇌경색의 특징 중 하나는 반신마비와 언어장애다. 어머니는 다행히도 걸을 수는 있었지만 대신 언어를 내주셨다. 반신 마비로 신체의 반쪽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불같은 성격의 어머니가 걸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뇌경색 발병 후 5년이나 더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머니는 심장과 폐 등 다른 기관에 합병증이 오기 시작하면서 중환자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어쩌면 어머니를 5년이나 지탱해준 것은 계절을 견디어낸 희망이라는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가을부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셨던 모양이다. 영국에 사는 넷째 아들이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한국에 왔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래서 그렇게도 눈을 기다리고 겨울을 기다리셨을 것이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단 한 번도 어머니를 병원에서 맞이한 기억이 없다. 다섯 번 다 집에서 맞이하였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이 어머니를 12월이 되면 집으로 모셔올 만큼 상태를 호전시켰는지도 모른다. 막상 누워본 수술대는 차갑다는 느낌마저 없었다. 어머니가 수도 없이 홀로 누워계셨을 수술대에 내가 눕고 나서야 어머니의 고통과 아픔이 느껴졌다.

얼마를 잤는지 모르지만 불빛들이 희미하게 감지되기 시작한다. 마취가 풀리면서 안면 근육들에도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수면상태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사물을 인식하고 상황판단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뜨자 동그란 안경 태에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 초롱 거리던 전공의 선생님의 가녀린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두 분의 전공의로 보이는 남자 선생님들도 보인다.

원장님은요?라는 질문에 수술을 마치자마자 다른 수술실로 들어가셨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집도의가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핵심적인 수술 과정에만 참여하고 수술 준비나 마무리는 전공의들의 몫처럼 보였다. 물론 이것도 추측일 뿐이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한다. 수면 마취만 풀렸기 때문에 다른 마취까지 풀리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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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 문을 나와 다시 입원실로 옮겨지면서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면 마취 직전 그 짧은 시간에 어머니를 본 것인지 아니면 수면 중에 꿈에서 본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어머니의 오랜 투병생활에 대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겁이 많았던 어머니는 약도 거의 다 버리셨다. 약을 삼키지 못하고 뱉어낼 정도로 겁이 많으셨다. 겉으로는 초인이었던 어머니가 알고 보니 겁쟁이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다가오는 죽음 앞에 얼마나 두려우셨을까!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런던에서 달려왔을 때는 이미 입관이 이루어져 어머니 임종은커녕 얼굴도 뵙지 못하고 말았다. 다음날 화장터에서 어머니가 한 줌의 재가 되기까지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 동안 가족들은 점심을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 넷째 아들은 끝까지 눈물을 밀어내지 못했다. 카뮈가 쓴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 못지않게 부도덕한 사람이 바로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셨던 넷째 아들인 셈이다. 한마디로 어머니는 부도덕하고 못난 넷째 아들에게 속은 셈이다. 막상 혼자가 되고 보니 어머니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불혹이 너머 서면서 더욱 어머니가 생각난다. 수술을 마치고 6인실로 돌아와서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인다. 어머니가 너무 그리운 날이다. 이제야 철이 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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