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다.! 새벽 4시면 벌써 방앗간 문을 두드린다. 시골 떡방앗간의 최대 대목은 설 명절이다. 설 3~4일 전부터 하얀 가래떡을 빼려고 줄을 서기 시작한다. 가래떡이 꼬득꼬득하게 굳으려면 최소 2일은 소요되기 때문이다. 가래떡이 굳어야만 떡국용 떡을 썰 수 있다. 불을 끄고 한석봉이 글을 쓸 때 석봉의 어머니가 썰었다던 그 떡이 바로 하얀 가래떡이다. 지금은 낱개 포장되어 마트에서 간편하게 쇼핑 바구니나 카트에 담을 수 있었지만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무렵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발뒤꿈치를 들고 아무리 먼 미래를 예측해봐도 지금 같은 세상이 오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긴, 강산이 변해도 몇 번은 변하였다. 실제로 강도, 산도 많이 파헤쳐지고 변해왔다.
또다시 설 연휴가 시작되었다. 올해는 설 명절이 상당히 빠르다. 추석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설이다. 내가 어렸을 때 이맘때쯤이면 3~4일은 가족 전체가 쪽잠을 자가며 전쟁에 가까운 극한직업에 내몰렸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해서 밤 12시까지 이어지는 가래떡 빼는 작업은 지금 생각하면 집집마다 최대의 명절 준비였다. 떡국 없이 설을 맞이할 수 있는 집은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여유가 있는 집은 가래떡 말고도 시루떡과 호박떡 등을 같이 만들어 갔다. 당시는 각자가 쌀을 집에서 씻어서 커다란 고무 대야에 이고 지고 또는 리어카에 싣고 우리 집 방앗간으로 왔다. 방앗간에 도착된 빨간 대야 순서대로 작업이 이루어진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다.
잠깐이라도 방심하거나 자리를 비우면 교묘하게 고무대야의 위치가 바뀐다. 위치의 이동은 순서의 변경을 의미한다. 늦게 와서 쥐도 새도 모르는 새치기도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모두 두 눈 새파랗게 뜨고 자신의 쌀 대야를 사수한다. 어떤 집은 가족들이 교대로 돌아가며 지키기도 한다. 평소에는 이웃사촌이던 마을 주민들이 방앗간에서는 살벌한 전투 모드로 돌입하는 이유는 단순하였다. 반드시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새치기를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번호표를 나누어주어도 소용없다. 번호표를 잃어버렸다고 우기고 자신의 고무대야부터 들이밀면 방법이 없다. 지금처럼 CCTV라도 있어서 돌려볼 수 있었다면 그러한 전쟁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인간의 성선설을 부인하는 이유도 설 대목마다 펼쳐지는 고무대야의 순간이동 때문이다. 타짜의 낮장 빼기보다 속도가 더 빠른다. 심한 경우에는 어머니들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일도 있었다. 평소 형님 동생 하던 어머니들이 그놈의 가래떡 하나 때문에 머리채를 잡았다. 그 시절 떡방앗간에서의 전광석화 같은 새치기의 추억이 그립다.
떡을 만드는 공정은 지금의 방앗간과 동일하다. 다만 각자가 쌀을 준비해온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쌀가루가 빻아지고 보일러로 이동해 스팀기로 쪄낸다. 마지막 공정은 잘 쪄진 쌀가루 시루를 통째로 떡을 빼는 기계판 위에 뒤집어엎는다. 뭉텅하고 굵은 나무 주걱으로 나선형의 쇠뭉치가 회전하는 아래로 밀어 넣으면 비로소 떡이 나온다. 이 공정에서 큰 사고가 많이 나기 때문에 이 일은 언제나 아버지나 어머니의 몫이었다. 떡의 모양은 형틀에 따라 가래떡부터 대여섯 가지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 추석과는 달리 설날에는 대부분이 가래떡이다. 추석에는 넓은 절편이나 시루떡이 주를 이룬다.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찹쌀과 쑥을 섞어 만드는 쑥떡이었다. 인절미라고 하는 떡이다. 쑥떡의 마무리는 콩가루를 입혀 작게 자르는 일이다. 나는 주로 떡값을 받는 역할을 하였다. 지금으로 치면 케시어였다. 당시 떡값의 계산 단위는 되와 말이었다. 가래떡 한 말에 5천 원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적지 않은 돈이었다. 영업을 종료하는 12시가 되면 가족들은 파김치가 된다. 씻지도 못하고 쪽잠을 잔다. 서너 시간 후면 다시 손님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라면박스에 수북하게 쌓인 현금을 세는 일은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마약 같은 역할을 하고도 남았다. 어려서부터 돈 버는 재미를 알았지만 돌이켜보면 하수의 기법이었다. 아버지가 똥폼(?) 잡으시고 지역 유지 노릇 하는 동안 할머니의 예상대로 서울의 땅값은 떵떵거리며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투자, 그리고 혁신과 재혁신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일생일대의 투자를 하셨다. 불과 1킬로도 안 되는 산골마을에서 버스 정류소가 있는 상당히 번화한(?) 네거리로 이사를 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투자는 당시에는 모험에 가까운 무모해 보이는 일이었다. 평생 농사일만 하시던 분이 젊은 혈기에 사업이라는 걸 해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 사업이 다름 아닌 떡방앗간이었다. 사업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어서 장사라고 불렸다. 당시만 해도 제과점이 없던 시절이었다. 빵이라고는 삼립식품에서 나온 보름달인지 둥근달인지와 카스텔라가 전부이다시피 하였다. 세끼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에 군것질이나 간식은 논밭이나 과수원 그리고 산야에 흩어져 있는 먹거리들이 전부였다. 돌이켜보면 자연산의 제철식품들이었다. 남의 집 과수원이나 밭에서 몰래 서리를 해서 먹던 시절이었다. 지금 같으면 절도죄에 해당하는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훔쳐먹다 걸려도 눈감아주던 인심이 넉넉한 시절이었다. 모두가 배고프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모님들이 넘겼던 그 힘겨운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생각은 어느 정도 적중하는 듯 보였다. 네거리의 목이 좋은 떡방앗간을 인수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재투자까지 감행하며 비즈니스 의지를 불태우셨다. 인수 당시에는 커다란 발동기를 이용해서 방앗간의 기계들이 돌아갔다. 떡방앗간이라고 떡만 만들지 않는다. 고춧가루는 기본이고 참기름과 들기름을 짜내는 등 잡다한 일이 많았다. 심지어 쌀 한 되를 빻으려 가져오는 경우에도 발동기를 돌려야 했다. 발동기는 장정이 아니면 시동을 켜기가 쉽지 않다. 경운기 시동의 10배쯤 힘이 드는 고된 일이 매일 반복되었다. 가족들의 불만과 원성은 커 저만 갔다. 방앗간 인수자금 못지않게 재투자가 절실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산업용 전력을 끌어들이는데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면서 집안 사정은 다시 휘청였다.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대가는 혹독하였다.
산업용 전기를 끌어오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면소재지에서부터 십리 거리에 전신주를 세워가며 끌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일대 혁신이 일어난다. 지금 생각해도 혁신이었다. 발동기가 사라지고 스위치 하나만 올리면 기계들이 작동하는 신기한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산업용 전기를 끌어들인 마당에 아버지는 다시 욕심을 내셨다. 또 다른 혁신에 도전한 것이다. 또 다른 혁신은 대대적인 방앗간 리모델링 작업이었다. 기존의 낡고 오래된 기계들은 신형으로 바뀌었다. 보일러만 빼고 모든 설비들이 바뀌면서 집안은 또다시 휘청거렸다. 시골에서 아버지의 혁신이 이루어질 때 서울에서는 혁명보다 더 빠르고 무서운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할머니의 선견지명,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그 때라도 할머니 조언을 들었더라면 아버지는 지금쯤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에게는 아들 셋에 외동딸이 하나 있었다. 그중 장남이 바로 아버지다. 당시, 농사를 지어도 서울에서 지어야 한다는 게 할머니의 지론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지론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할머니의 뚝심과 고집에 결국 둘째와 막내아들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서울로 농사지으러 올라간 것이다. 할머니는 시골의 전답 일부를 정리하여 상계동의 논들을 사들이셨다. 그리고 둘째와 막내아들을 반 강제로 올려 보내셨다. 이왕 힘들게 농사지을 바에는 서울에서 지어보라는 할머니의 선견지명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할머니는 죽은 듯이 20년만 상계동에서 농사를 지으면 때(?)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하지만 둘째와 막내아들은 그 사이를 못 참고 몇 년 만에 다시 시골로 내려오셨다. 이유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시골이 그리웠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순간의 선택이 지금도 시골에서 허리가 휘도록 농사를 짓고 계신다.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70년대에는 상계동이나 시골이나 논의 땅값이 몇 배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와 아버지와의 불화도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할머니의 지론은 20년만 내다보라는 것이었지만 아버지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할머니의 충고들을 무시하였다. 그 결과가 내가 태어난 생가에서 겨우 1킬로 미터 떨어진 곳으로의 이사였다. 아버지의 화려한 삶도 잠시였다. 결론적으로, 아버지는 지금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떡방앗간 자리에서 살고 계신다. 떡방앗간은 망해서 헐렸고 그 자리에 새집을 지으신 것이다. 아버지의 회심의 사업이었던 떡방앗간이 70년대와 80년대 호황을 누리는 동안 서울은 일대 천지개벽이 진행되고 있었다. 서울은 할머니의 예상대로 무섭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방앗간 혁신이 이루어지는 동안 서울에서는 개발 혁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남이 개발되고 노원구에 아파트들이 집중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가는 반면 시골의 땅값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88 올림픽 이후 빵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떡의 소비량은 격감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이 미팅을 하는 곳도 빵집들이었다. 커피숍은 아저씨나 노인들이 가는 다방 형태였다. 그 다방에는 마담 언니들이 합석을 해서 눈웃음을 난리면 게란 노른자가 동동 뜬 한약 냄새나는 쌍화차 정도는 손님이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니면 커피라도 한잔 사야 했다. 청소년들이 드나들 수 없는 성인업소 수준에 가까웠다. 티켓 다방도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는 강남의 배밭 과수원을 사주시려고 그토록 어르고 달랬지만 아버지는 강남의 과수원 농사보다는 시골 떡방앗간 사업에 구미가 더 당겼다. 당시에는 아버지의 선택이 현명해 보였지만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비롯한 삼 형제는 그놈의 땅 때문에 땅을 치고 후회를 하게 된다.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할머니는 조선이 일본에게 강제로 합병되던 해에 태어나셨다. 땅 욕심으로 똘똘 뭉친 할머니는 물려받은 많은 땅도 모자라 해마다 소출의 절반을 다시 땅을 매입하시는데 투자하였다. 땅이라고 해봐야 논 아니면 밭이었다. 할머니의 단순하지만 원대한 혁명의 꿈은 세 아들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할머니는 아버지를 비롯한 자식들을 원망하셨을 것이다.
아름다운 어린 시절 설 명절의 추억과 회귀본능!
그래도 떡방앗간을 운영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너무도 소중하다. 그 시절 우리 독수리 오 형제는 틈만 나면 톱과 도끼를 들고 산으로 향하였다. 그 시절의 지개질은 남자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필 수 노동이었다. 산에 땔감을 마련하러 갈 때는 지개를 지고 갔다. 떡을 쪄내는 보일러만큼은 장작보일러를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기름보일러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이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도 산에 가서 나무를 자르고 집으로 날라서 도끼로 장작을 패는 일은 오로지 자식들의 일이었다. 특히 연년생인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의 역할이 막중하였다. 셋째 형님은 기분파여서 뺀질거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넷째인 나는 장작을 쌓는 일이 주 업무였다. 여동생과 막내는 아직 어렸었다.
도끼로 막 패 낸 장작을 양지바른 곳에 쌓을 때 나는 나무의 향기는 진하였다. 퍽! 소리와 함께 하얀 속살이 드러날 때마다 소나무에서는 송진향이, 참나무는 도토리처럼 떫지만 은은한 오크향이 났다. 기타 잡목들도 저마다 나름대로의 향이 났다. 그 향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세월은 흘렀고 추억만 아련하다. 도끼질은 못해도 짝짝 쪼개진 장작들을 쓰러지지 않게 쌓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끝선의 각을 맞춰가며 쌓던 기억이 소록소록하다. 돌이켜보니 나의 결벽증은 그때부터 전조 증상이 시작되었다. 눈이 오는 날에도 형제들은 웃통을 벗어젖히고 도끼질을 하였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시절이다. 당시 시골에서 자식들은 소중한 노동력이었다. 집집마다 대여섯은 기본이었다.
설 연휴가 다가오면서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방앗간의 고무 대야들이 순간 이동을 하며 새치기가 난무하였던 시절이었다. 성악설이 성선설을 눌러도 상관없다. 어차피 짊어져야 할 생의 무게는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지만 그래도 돌아가고 싶다. 비록, 아버지의 혁신도 할머니의 혁명도 물거품이 되었지만....,
참고로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는 삼성동 아지트리에서 "나는 매주 한 권 책 쓴다" 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 만에 책을 쓰고 매월 또는 매주 책을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처럼 매주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이 15명(매월은 60명 이상) 이상 되었다. 앞으로도 그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강의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https://www.onoffmix.com/)에서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