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진부하고, 사랑한다는 말만큼 오남용 되는 단어를 찾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세상의 모든 시계는 동작을 멈춘다. 찰나라는 보이지 않는 순간 동안 그 음흉한 언어의 마법에 빨려 들고 만다.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는 런던의 그리니치는 세계의 표준 시간을 제공하는 곳이다. 75억이 뿜어내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인한 시간의 단절까지 그리니치 천문대에서는 계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라별, 대륙별로 시차를 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근거는 없다. 어쩌면, 수백억 광년보다 더 떨어진 행성들과의 거리도 찰나 일지 모른다. 우리가 별을 보는 그 순간이 그 별의 실체이거나 현 위치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아이들도 아는 일이다.
물론 그 찰나들의 멈춤 만큼이나 사랑의 유효기간이 개인에 따라편차가 심하다. 문제는 편차이지만 그 이전에 그 단어의 파괴력이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흥분과 열정의 도가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흐느적거리게 하는 이 단어를 오늘 고발하려 한다. 왜냐하면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일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오늘 한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서 아이가 아닌 당당한 성인 남자에게서 말이다.
사랑이라는 달콤함에는 당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단어에 노출이 반복될수록 혈당 수치는 낮아지고 페닐 에틸아민(PEA) 수치는 높아진다. 이성 간에서 느낀 이 현상이 동성에게서도 똑같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제법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온다. 물론 어르신들이 들으면 마뜩지 못한 기색을 보일 것이다. 언제나 철이 들려고 이 따위 사랑타령이나 하고 있냐는 핀잔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누가 뭐래도 오늘만큼은 잊을 수 없는 특별한 날이다. 내 인생에서 누구에게 사랑한다는 단어를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내도, 어머니도 결혼 전 스쳐간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나라는 인간은 잘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잘생기지 안(못)하였다면 키 정도는 평균치는 유지했어야 했다. 아내는 물론 어머니 심지어 외할머니보다 작았다. 위로 세분의 형님들과 신장 차이를 보면 이복동생인 줄 안다. 생김새는 누가 봐도 형제인데 10cm 정도 차이가 난다. 솔직하게 10cm 정도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더 차이가 난다. 결혼 전, 연애시절이었다. 사귀다가 절교를 수도 없이 당하였다. 대부분 부천이나 인천 그리고 수원과 안산까지 1호선과 4호선에서의 악몽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놈의 외모, 특히 작은 신장이다.
군 입대 전 장병 신체검사에서 잰 공식 신장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164.4cm였다. 반올림을 해주려 해도 그놈의 0.1mm가 걸렸다. 이승만 정권인지, 유신독재 시절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그 유명한 4사 5입을 적용하려다 보니 괜스레 찔렸다. 그래도 민주화 운동 세대의 주역이었는데....., 어차피 안 되는 반올림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대로 사기 치는 올림뿐이었다. 165가 아닌 167cm로 나 자신과 극적인 올림에 타협을 보았다. 외할머니가 168cm, 어머니가 170cm였다. 심지어 아내는 172.5cm다. 반올림해서 173cm였고 당시 여고에서는 가장 큰 신장이어서 체육대회 때마다 기수를 하였다고 한다. 물론 지금 세대에게는 큰 키가 아니다.
결혼식장에서 급조된 불량 키높이 구두의 악몽!
내가 연애 시절에는 키높이 구두가 없었다. 아니,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도 명동이나 신촌 멋쟁이들은 신었을지도 모른다. 연예인들도 마찬가지다. 당시 핫플레이스는 강남역이나 홍대입구가 아니었다. 결혼식장에서는 하는 수없이 아내가 맨발로 입장을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웨딩드레스에 가려 맨발이 보이지 않아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아내와 높이를 맞추려고 구두 뒤쪽에 종이컵을 몇 개식 밟아서 넣어야 했다. 급조된 키높이 구두의 탄생 배경이다. 문제는 신랑 신부 입장에서 터지고 말았다. 발이 자꾸만 구두에서 이탈되려 몸부림을 쳤다. 위풍당당하고 패기 있게 걸어도 시원치 않은데 걸음걸이가 너무 이상했던 모양이다. 신랑이 뭐하고 이제야 포경 수술을 했느냐는 비아냥부터 다양한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신랑 신부 동시입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장면이었다. 아내는 그때부터 이미 페미니스터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사실을 알면 이혼한 것도 모자라 다시 이혼하자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만일 혼자 입장하였으면 개망신을 당했을 것이다. 구두가 벗겨지는 순간 밟아서 욱여넣은 종이컵들이 탈출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슬리퍼를 끌듯이 약간 정성스러운 하지만 우아한 마이클 젝슨 형님의 빌리진 스텝으로 겨우 예식장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내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말이다.
결혼식 중에도 양가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하객에게 인사하고 움직일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때마다 발뒤꿈치에는 힘을 주어야 했다. 움직일 때마다 욱여넣은 종이컵들이 공간 이동을 시작하려 몸부림을 치기 때문이었다. 맨 앞 신랑석에 앉으신 어머니와 아버지는 시종일관 불안한 아들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셨다. 어머니는 급기야 내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판단하신 모양이다. 눈치 없는 아버지도 안절부절못하실 정도였다. 급기야 어머니는 똥이 마려우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라는 강력한 텔레파시를 신랑인 나와 사회자인 친구에게 날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화장실 문제가 아니라는 표시를 뒤돌아서서 어머니에게 전달할 수가 없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실 여자의 로망인 하이힐을 결혼식에서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발목이 다 보이는 하얀 버선만 신은 아내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내가 만약 12cm 하이힐을 신으면 185cm가 넘을 수도 있다. 그려지지 않는 비현실 속의 추상화가 되는 그림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맨발의 아내 높이에 맞추기 위해 굳이 급조된 종이컵 키높이 구두를 신을 이유가 없었다. 이벤트사 직원의 배려는 배려가 아니었다. 그깟 높이가 뭐라고 30분의 악몽을 만들어냈을까! 농구나 배구경기라면 높이가 중요하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경기에서 높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식이 끝나고 피날레인 퇴장을 하면서 사단이 나고 말았다. 얼마나 참고 기다려온 순간이던가!!! 30분을 무사히 견딘 뒤꿈치가 대견해서 빌리진 스텝을 순간 잊고 만 것이다. 몇 걸음도 못가서 발병이 나고 말았다. 짓눌린 종이컵들의 대 탈출이 시작되었다. 이를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한타임 빠르게 봉사모임의 회원들이 꽃가루를 뿌려주고 있었다. 거기에 폭죽까지 발사하면서 말이다. 그 와중에도 뒤를 돌아보았다. 탈출한 종이컵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었다. 아니, 굳이 세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아무리 어려운 역경도 견디고 또 견디면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신랑 신부 퇴장!이라는 사회자의 말이 장내를 울리는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달려와 내 손을 잡고 한마디 하셨다. 아들아 장하다! 그놈의 똥 참느라고 욕봤다.
다시 1호선과 4호선으로 글머리를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실연을 당하기에 참 좋은 날이 있다는 사실도 경험치를 통해 알게 되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그날은 바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입사와 동시에 시작된 미팅과 소개팅 그리고 선까지 많은 (신) 여성을 만났다. 당시 듀오와 선우 그리고 에코러스라는 결혼정보회사가 있었다. 나는 세 군데 모두 회원이었다. 물론 시골 어머니의 독촉이 가장 컸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연애의 기술에 대해 코칭을 해대기 시작하였다.
"여자는 일단 자빠트려 부려라! 그러지 않고는 니는 장개 못간당잉!!!"
그래서 더욱 바빴는지도 모른다. 그중 지금도 듀오라는 선발주자는 살아남았다. 20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듀오 광고를 볼 때마다 3연 타석 병살타를 날리던 크리스마스이브가 떠오른다. 부천 소사역과 인천 주안역 그리고 하나는 안산의 지하철역이었다. 공교롭게도 매해 크리스마스이브 날 저녁에 그것도 비싼 레스토랑에서 칼질까지 하고 나서였다. 당시에 칼질 한번 해보려면 큰 맘먹어야 했다. 티본스테이크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의 모 체인들이 영업을 막 시작하던 무렵이기도 하다. 세 번 다 절교 선언은 비슷하였다. 내가 키가 작거나 못생겨서라는 말은 없었다. 부모님이 반대한다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라는 방식이었다. 사실, 그 이면에는 나의 작은 키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 쯤은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사귀자는 제안에 응하지를 말던가! 갑자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다.
3 연속 병살타를 당할 때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야구에서 3 연속 병살타는 불운이 아니라 실력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놈의 키가 뭐라고! 돌아오는 길에는 전철이 끊어지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슈퍼에서 빨간 뚜껑의 두꺼비를 사서 홀짝거리며 하숙집까지 돌아와야 했다. 당시 하숙집이 있던 제기 시장에는 닭발 구이가 꽤 유명하였다. 영업시간도 포장마차처럼 늦게까지 하였다. 늘 상 대하던 닭발구이 집 아주머니는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소 주 1회는 그 집에서 하숙생들이나 친구들과 술을 마셔댔기 때문이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아줌마를 볼 때마다 생각이 나서 입단속을 하지만 임계점을 넘어가면 나의 아픔과 수난사들이 흑역사가 되어 아주머니 앞에서 토해냈던 모양이었다. 빨간 뚜껑의 두꺼비를 호기롭게 딸 때마다 아버지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어 졌다. 하지만 그 시간이면 아버지는 거의 깨어있을 아침시간이었다. 신 새벽부터 아버지에게 전화질을 해서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매번 같았다.
“아버지! 왜 넷째 아들 만드시던 날 밤엔 힘이 달리셨나요? 이왕 힘쓰신 김에 한 번만 눈 질끈 감고 선심 쓰듯이 최선을 다하지 않으셨나요? 혹시 의무방어전은 아니셨나요?"
어제는 특별한 날이었다. 런던에 있는 아들의 만 18세가 되는 생일날이었기 때문이다. 아빠로서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며칠간 고민하였지만 허사였다. 1년이나 작가 행세를 하고 살아온 아빠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물리적 거리 때문에 어차피 말뿐인 선물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아들이 성인이 되는 날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었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 못지않게 크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빚을 죽을 때까지 갚아야 할지도 모른다. 간간히 생일 축하 메시지와 성인이 된 걸 축하한다는 잡다한 문자가 오고 갔지만 2% 부족한 느낌을 지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마지막 톡에 "I love you!"를 날리고 입원실에서 재활치료실로 향하였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아들에게 답이 와 있었다. 좀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그 답이 바로 "I love you too!"였다.
"표현하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니다."
어쩌면, 아니 실제로 누군가로부터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돌이켜보니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 많은 여인들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그 한마디에 오늘 밤을 지새우는 중이다. 밤의 색깔이 온통 하얀색이다. 검푸르거나 희멀건 그동안의 밤의 색깔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밤의 형상이다. 밤에도 색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남자가 된 아들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어머니 장례식 때도 밀어내지 못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설움이었고 또 복받침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랑한다는 그 흔하디 흔한 말을 아내에게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심지어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지 못하였다. 표현하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니다. 이 문장이 왜 유행가 가사가 되어야만 했는지 곱씹어본다. 이 하얀 밤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이유다.
참고로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는 삼성동 아지트리에서 "나는 매주 한 권 책 쓴다" 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 만에 책을 쓰고 매월 또는 매주 책을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처럼 매주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이 15명(매월은 60명 이상) 이상 되었다. 앞으로도 그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강의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https://www.onoffmix.com/)에서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