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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l 28. 2019

여보, 나 1년만 쉴까? #5 내가 쉬어봐서 아는데..

일과 질병이라는 일상에서 해방되어 휴식과 치유 및 힐링에 관한 연재이다.



 



평생 일만 하다 죽는다고?

     

한국에 와서 거의 매달 부고를 받고 장례식장에 간다. 뉴스를 통해서도 거의 매일 사고 소식을 접한다. 어려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을 대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부터 죽음은 익숙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죽음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는 제각각 이유가 다르고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단상은 단순하지가 않다. 특히 준비되지 않는 사고사가 너무 많다. 그렇다고 죽음을 매일 준비하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죽음은 언제든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내일 죽으면 여한이 없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단순하고 무료한 것이 인생 같지만 그 지루한 인생에는 보이지 않게 항상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일만 하다가 유서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사고로 죽어가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서글퍼진다. 실제로 그러한 죽음을 너무도 많이 접한다. 그런데도 나부터 천년만년 살 것처럼 기고만장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좀 더 겸손해지고 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작심삼일이다.

     

엊그제 뉴스에서 접한 예비신부의 죽음도 충격적이었다. 강남에서 철거작업 중 갑자가 건물 외벽이 붕괴되었다. 마침 지나가던 승용차를 덮쳤고 그 승용차에는 월차휴가를 내고 결혼반지를 찾아오던 예비 신랑 신부가 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29세의 예비신부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예비 신랑도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청천벽력과 같은 뉴스를 접한 예비신부의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도 철거회사를 대상으로 고소를 해서 딸의 한을 풀어주겠다고 울먹였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지난달 헝가리 부다페스트 유람선 참사 사고나 세월호 사고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운이 없으면 우리는 일만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갈 수도 있다. 세상은 점점 인생을 정리하고 자서전을 쓰는 여유를 부릴 수 없게 몰고 가고 있다. 모든 면에서 쉽지 않지만 한 번쯤은 안식년을 생각하고 쉬면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나는 그렇게 죽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은퇴가 두려운 사람들

     

나처럼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년퇴직까지 직장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이제 60은 시골에서는 청년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기업에서는 60까지 너그럽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40대 후반부터 눈치를 주기 시작한다. 고사양의 젊고 유능한 스펙을 갖춘 취업준비생들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똥차를 치우려고 별의별 방법을 동원한다. 내보내려는 자와 남으려는 자는 그렇게 혈투를 버릴 수밖에 없다. 평생을 직장을 위해 충성을 해도 밀려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소위 말하는 가성 비에서 젊은 취업준비생들을 당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직장인들의 현실이고 비애다.

     

그러한 직장인들의 고용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군 복무와 대학을 마치면 20대 후반에 가까워진다. 그 어려운 취업의 관문을 통과해도 20년을 채 일하지 못하고 밀려나야 하는 것이 직장인의 현주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취업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 스타트업이나 창업의 문은 좁기만 하다. 일단 그런 불안한 길보다는 확실한 월급을 받고 싶은 게 먼저다. 그것이 또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할 만 하면 어느새 고임금자가 되어있다. 회사는 또다시 가성 비를 따지기 시작한다. 은퇴는 고사하고 40대 중반부터 버티고 또 버텨야 하는 것이 직장인의 숙명이 되어버렸다. 그다음 직장은 버틸 때까지 버티고 나서 생각해볼 문제다. 재취업의 벽은 더욱 높고 견고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신호를

     

나처럼 몸과 마음이 쉬라고 신호를 보낼 때가 있다. 나처럼 운이 좋은 사람들은 쉴 수가 있지만 자영업자가 아닌 직장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몸이 신호를 보내면 철저하게 숨기고 아닌척해야 한다. 치료도 몰래 월차나 휴가를 내고 해야 한다. 몸이 신호를 보낸다고 떠벌리는 순간 교체 대상이 되는 부품이 되고 만다. 그래서 직장인들이 근무 중 돌연사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몸과 마음이 아프다는 신호를 여러 차례 보내지만 무시해야만 한다. 만약 내가 이민을 가지 않고 아직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나의 직장인으로서의 수명은 지난해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재취업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한 살이라도 젊어서 직장을 포기하고 이민을 떠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만의 생산수단을 갖추지 않으면 내가 나의 몸과 마음을 팔 수 없을 때가 다가오는 순간 아무런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월급의 달콤함을 뿌리치고 후회도 많이 하였지만 젊음이라는 무기가 있었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 같으면 진퇴양난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몸과 마음이 신호를 보낼 때 과감하게 그 신호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20년 전부터 준비하고 대비한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선견지명이나 혜안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직장 생활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때 직장 생활 체질이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암담하기만 하다. 인생은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내일도 모르면서 일만 하다 죽어갈 뻔하였다.

     

     

      

과감하게 쉬어라

     

요즘은 이기적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존감도 살리고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을 찾아서 남과는 또는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삶을 선택하는 것이 대세이다. 그러나 아직도 직장인의 한계는 뚜렷하다. 그래서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부양가족이 없으면 언제든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을 수도 있고 자영업을 할 수 도 있다. 가족의 부양이라는 커다란 책임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라이프 스타일 자체는 물론이고 직장에서의 입지나 선택 결정권까지 영향을 미친다.

     

몸에 이상 신호가 오면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 자신만 챙기면 되기 때문이다. 요즘 세대들은 평생 일만 하다 죽을 사람도 없지만 그럴 만큼 우직하지도 않다. 자신의 삶이 중심이고 자신을 위한 생활을 해 나간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 이상 신호가 오면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거나 휴직을 하고 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실행하고 있는 삶이다. 인생의 전반전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한 번쯤 쉬어주고 갈 수 있다면 후반전은 더욱더 멋진 삶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오로지 한 번밖에 살 수없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1년을 쉬어보니

     

지난해 9월 중순에 갑자기 한국에 왔다. 무작정 1년을 쉬고 싶었다. 팔자가 좋아서도 돈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쉬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심신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허리디스크의 통증과 우울증의 시너지 효과는 더욱 버티기 힘들었다. 특히 두 가지 질병이 연합해서 공격해 올 때는 속수무책이었다. 정말 죽을 만큼 힘이 들었다. 우울증 하나로도 죽음이라는 생각을 달고 살았다. 1년을 쉰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게 휴식을 취해보고 싶었다. 그동안 이민 생활에 지친 나에 대한 보상을 그렇게라도 주고 싶었다.

     

이번 여름이 지나면 1년이 된다. 여전히 통증과 그로 인한 우울과의 싸움은 진행형이다. 현대 의학의 혜택을 받을 줄 알았지만 아직도 현대 의학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분야가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질병은 그렇게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였다. 질병으로부터 나를 돌아보게 하고 질병을 다스리며 그들과 동거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불행에서 행복을 배우듯 질병을 통하여 건강한 심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니체가 왜 질병이 나쁜 대상이 아니라고 역설했는지 조금은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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