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삶을 갈구하기까지..
3월 셋째 주 목요일 아침이었다. 이대로라면 3월도 숨만 죽인 채 속절없이 보내고 말 것이라는 초조함에 몸서리를 치며 웅크리며 지내왔다. 하루에도 여러 번 경기를 일으키듯 화들짝 놀라곤 하였다. 마치, 나는 뺑소니 범죄를 저지르고 자수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일상에서 무언가를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몰려드는 불안을 못 본 채 하거나 불안에 등을 돌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불안에 정면으로 맞서지도 못한 채 형체도 없는 불안은 역시 형체도 없는 공포만 가중시키고 있었다. 돌파구를 찾아야만 한다는 절박함에 짓눌리기도 하였다. 나름대로 특단의 대책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돌파구를 실행할 수 있는 그날이 밝아왔다. 그날이 바로 세 번째 목요일이었다.
이 목요일의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특별한 일상이 될 수도 있다는 자각 또한 배움이었다. 하루를 온전히 불태운 결과는 혹독하리만큼 힘들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로 기억될 것이다. 처음으로 공장 노동자가 되어 몸이 느끼는 극한만큼이나 정신은 맑고 단순해지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정신세계였다. 어쩌면 불교의 “오체투지”라는 혹독한 의식과 맥을 같이하는지도 모른다. 비록, 하루라는 짧고 일시적인 시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9시간의 힘겨운 노동이 가르쳐준 것들을 기록하다 보니 어느새 한 꼭지의 글이 되었다. 공장에서의 노동은 처음이지만 이제는 매주 한두 번 정도의 간헐적인 일상이 될 것이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불면의 밤은 육체노동을 간과한 대가라는 사실도 깨닫게 해 준 체험이었다. 약을 먹고도 잠들지 못하던 내가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단잠을 잔 것이다. 이쯤 되면, 마스크 공장을 매주 한두 번이라도 가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 것이다. 마스크 공장의 특징은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 부분 도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의 의지보다는 컨베이어 벨트라는 기계에 의해 인간이 통제된다는 것이다. 정상 컨디션이 아닌 내가 하루를 버텨내기에는 죽을 만큼 힘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나의 인생은 노동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고의적으로 회피하며 살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힘든 노동은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여겨왔다. 대학 간판이 주는 고착화된 엘리트 의식과 직원들을 채용하고 관리하는 사장 마인드에서부터 거리두기는 시작되었다. 비록 작은 가계들이지만 사장이라는 권위적이고 알량한 직함 때문에 육체가 아닌 정신으로만 일해 왔다. 그 결과, 나와 함께 일했던 많은 직원들은 나의 불투명한 탐욕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쉬운 말로, 사장질을 하면서 나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갑질을 일삼아왔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의 영혼은 가출한 청소년처럼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끈적거리는 외로움과 우울은 비현실 속의 세상을 동경하기 시작하였다. 비가 오지 못하는 사막에서 비대신 쏟아지는 낮의 햇빛들과 밤의 별빛들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작이라 평가받는 "해변의 카프카"의 15세의 주인공인 다무라 카프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소년 카프카가 가출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과 달리 성인인 나는 그렇지 못하였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며 정신이 먼저 피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이 무너지기 무섭게 육체도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내가 신봉하던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정신과 육체의 동반 하락은 결국 또 다른 삶을 동경하게 만들었다. 사무실이나 카페가 아닌 현장에서의 체험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 체험은 오직 한 가지 믿음에서 출발하였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무명작가의 번뇌가 담겨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바로 "나의 글에 주름이 잡히거나, 설사 주름이 잡혀도 글이 노화하지 않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그 믿음의 저편에는 철학자 니체와 에릭 호퍼 그리고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김승옥이 있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글이나 소설로 쓰는 일은 사기고 도둑질"이라고 말한 니체의 조언이 나에게 터닝 포인트가 되어주었다. 고리타분한 철학을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니체 만은 예외로 다가왔다. 그의 사유의 폭과 깊이에 매료되고 만 것이다. 칸트의 철학처럼 친절하고 논리가 탄탄하지는 못하지만 니체의 그것은 언제나 명쾌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심지어 오만함을 넘어 무례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 한 사람은 노동하는 철학자 에릭 호퍼다. 평생을 길 위에서 일하며 사색을 즐긴 미국의 에릭 호퍼도 마찬가지였다. 에릭 호퍼는 어려서 시력을 잃었다. 15세에 극적으로 시력을 회복하며 불안이 시작되었다. 그 불안은 다시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였다. 그 공포 때문에 지독하게 독서에 몰입하였다. 그 결과 그만의 독특한 사회철학을 완성할 수 있었다. 에릭 호퍼는 과일 행상부터 웨이터, 사금 채취공과 부두 노동자로 살면서 11권의 주옥같은 저서를 남겼다. 특히 1951년 발표한 "맹신자들"은 현재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공포처럼 나치즘의 광풍과 세계대전의 황폐로 야기된 맹목적인 광신자들을 다루고 있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다르고 있는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작은 해안 도시의 공포가 구체적인데 반해, 호퍼의 광신자들은 일반 대중이 어떻게 특정 종교에 빠지는지를 교과서처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코로나에 19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천지라는 집단을 이해할 수 있다. 호퍼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이 역사를 만든다."라고 굳게 믿었다.
나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믿음을 현실 세계에 접목할 수 있도록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 기반을 제공한 것은 오래전 하나의 인연 때문이었다. 나의 믿음과 실행은 하나의 이 작은 인연에서 출발한다. 인연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지만 노동, 그것도 코로나 19 시국의 가장 민감한 아이템인 마스크 공장에서의 노동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연 이야기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인해 비록 간헐 적이지만 마스크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현실 세계에서의 탈출구는 그렇게 비현실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닐 아침에 오피스텔 주차장을 나서자마자 나와 차를 한꺼번에 집어삼킨 무진의 허구처럼. 그동안 뉴스로만 접하던 공장 안에서의 노동자들이 만들어내는 소소하지만 사랑과 행복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는 단초는 그렇게 찾아온 것이다. 앞으로도 나의 삶은 다양한 노동을 통해 다양한 삶들을 이해하는 적극성을 띠며 “다름”을 받아들이는 폭이 넓어질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실상도 모르면서 그들을 편견 없이 대하는 일은 애초부터 공허할지도 모른다. 교육을 받을 만큼 받았다는 우리가 가짜 뉴스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노동이나 현장이 아닌 머리로만 세상을 이해하려 하는 오만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세상의 그 많은 일들을 경험해야 알 수 있다는 경험론적 접근 방식이 전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은 아니다.
인연의 허무함과 사랑의 가벼움
나는 유난히 인연에 집착하였다. 한번 맺어진 인연의 고리를 단절하거나 그 고리로부터 단절된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같은 공포였다. 또한 인연이란 참 허무하고 가볍다는 사실에 많이 아파했다. 인연에 집착할수록 사랑은 덩달아서 부질없어지고 흐느적거렸다. 뼈가 없는 연체동물의 삶이 흐느적거려 보이는 이치와 유사했다. 하지만, 약해 보이는 연체동물들의 삶 또한 치열하고 처절하기는 인간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마치, 휴식시간도 점심시간도 15분을 넘기지 못하며 노동하고 있는 마스크 공장의 노동자들의 삶처럼 말이다.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차가 들썩일 정도의 바람에 어릴 적 추억도 들썩 거리며 소환되었다.
어릴 적 겨울날의 추억 중 하나가 바로 시린 손을 호호 불며 했던 “연날리기” 다. 남도의 고향 마을에는 대나무가 흔했다. 겨울철이면 길고 커다란 대나무를 잘라서 말려두었다. 아버지나 큰 형님이 길고 둥근 대나무를 쪼개서 연의 뼈대를 만들어주시곤 하였다. 대나무가 갈라지면서 "쩍"하고 소리를 낼 때마다 하얀 전율이 온몸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유입된 전율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처럼 단순하고 재미도 없어 보이는 연날리기에 해가 지는 줄도 모르다가 어머니에게 혼난 적도 많았다. 연날리기에서 중요한 점은 길고 가느다란 연줄에 흐르는 연의 언어를 읽어내는 일이었다. 시린 하늘에서 다양한 바람의 결을 읽고 견뎌내야만 하는 연은 그 모든 호흡과 숨결 들을 연줄을 통해서 보내왔다. 나처럼 오른손잡이는 왼손으로 얼레를 지탱한다. 오른손으로는 얼레 질을 하며 사각형 또는 육각형의 얼레로 연줄을 감거나 풀어주어야 한다. 연이 연줄로 보내오는 메시지를 부지런히 읽어내는 것이 연날리기의 핵심 기술이다. 때로는 바람과 연이 팽팽히 대치한다. 버텨야 할 때인지 풀어주어야 할 때인지를 머리로 판단하면 이미 늦는다. 어찌 보면 낚시와도 비슷하다. 손가락, 특히 검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마디 부분의 볼록한 살결이 동시에 느끼고 판단해야 한다. 풀어주어야 할 타이밍에 풀어주지 못하고 버티다 보면 결국 사단이 난다. 연이 찢어지거나, 연줄이 끊어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뒤집어지면서 동시에 형태도 패턴도 없는 기하학적인 슬픈 원을 그리며 하강하다 추락한다. 사각형의 방패연이든 삼각형의 가오리연이든 추락하는 연에는 날개도 비상구도 없었다. 특히 가오리연이 추락할 땐 기다란 꼬리가 몸통과 한 몸을 이루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추락 속도만 빠르게 할 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의 삶이 일순간 나락으로 추락했던 것처럼.
마스크 공장 주변의 텅 빈 쓸쓸함
목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2시간 거리의 마스크 공장으로 출발하였다. 내비게이션 주소 입력을 맞추니 2시간 10분이 소요된다고 알려 준다. 친절하기도 하다.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을 나서자마자 전혀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회색빛의 암울한 세상이 나와 투덜거리는 낡은 차를 덥석 들이마신다. 황사인지 안개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는 아침이 간밤의 눈곱도 때지 못한 채 널 부러져 있었다. 늘 상 펼쳐져 있는 일상은 그날도 익숙한 하루를 열어젖히고 있었다. 출근시간,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의 정체는 인천 소래포구 근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바다와 가까워서인지, 안개는 하늘과 허공과 도로를 분간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정체가 길어질수록 마음은 바빠졌다. 짧은 가시거리만큼이나 “무진기행”이란 단편소설의 안개가 아른거렸다. 그 안개는 오후가 되어서야 물러나곤 하였다. 1964년에 발표된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에서 안개가 주는 상징성은 혼란하고 이중적인 인간의 심리다. 소설에서, 남도의 “무진”이라는 비현실의 공간은 부와 명예를 상징하는 서울이라는 현실 공간과 갈등한다. “무진기행”에서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힐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는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주인공인 화자가 서울의 아내로부터 전보를 받고 상경해야 할지 말지를 두고 고민하는 대목이다. 주인공의 심리만큼이나 세상은 온통 불안전하고 비현실적으로 그려진다.
아침의 비현실적인 풍경은 경기도의 끝자락에 이르러서 겨우 정신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나도 정신을 차려보니 시골의 풍경들이 무표정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야산의 낮고 아담한 자락에는 나이 지긋한 과수원들이 언덕마다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 지역 특산물이 왜 배가 되었는지 나무의 굵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무표정하기는 늙을 대로 늙은 배나무도 예외가 아니었다. 차분하지만 처연한 슬픔들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미 왔어야 할 봄이 배밭에서 마저 주춤거리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날 발효된 강풍주의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공장 주변에 펼쳐진 빈 들판도 슬퍼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쟁기질이 끝난 정갈한 논이나, 지난가을에 몸통이 잘려나간 채 모진 겨울 동안 거름이 되어가고 있는 벼의 뿌리나, 봄의 와중에도 봄을 기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 봄은 유난히 더디게 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얼어붙은 사람들의 사회적 거리만큼이나 봄이 오는 속도도 자연적 거리를 두고 있었다. 3월 들판의 슬픔은 논에 갇혀서 농사 때를 기다리는 물속에도 녹아들어 있었다. 비록 안개의 두터움과 싸우느라 번 아웃되어 흐릿하지만, 햇살은 안개를 밀어내고 논의 물살에 튕겨나가기를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공장 가는 길은 반대편에서 차라도 오면 낭패를 볼 만큼 좁디좁은, 경운기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법한 농로처럼 보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겨우 시멘트 포장도로를 통과하자 마침내 커다란 규모의 마스크 공장이 보였다. 주차장은 이미 빼곡하였지만 시골 마을에서 빼곡함은 서울의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2시간 만에 도착한 공장과 날 선 눈빛들
어렵지 않게 주차를 하고 마스크 공장의 생산라인에 들어서는데 경계하는 눈빛들에 결들이 제법 날카롭다. 마치 방금 간 칼날처럼 날을 세우고 있었다. 혹시라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라면 금방이라도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경계태세는 긴장의 끈을 유지하고 있었다. 입구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이 나를 경계하는 것이 눈빛으로 느껴진다. 영어도 한국어도 통하지 않는다. 현금 뭉치를 싸 들고 오던 도매상이 줄어들자 이번에는 마스크 반출을 감시하는 식약처 감독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공장의 1층과 2층은 마스크의 바디를 만드는 생산라인이었다. 마스크 바디는 자동화된 설비에 의해 만들어졌다. 마스크 품목에 따라 끈까지 일괄 생산되거나, 아니면 끈을 별도로 연결하는 공정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사실은 작업이 끝나고 물어서 알게 되었다. 각각의 생산라인은 허락된 작업자들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스크 공장의 풍경들
1층과 2층의 마스크 바디 생산라인 다음 공정으로는 3층에 마스크 입수와 실링 공정이 있다. 입수는 수작업으로 마스크를 케이스에 넣는 작업이다. 50여 명이 직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칸막이 책상에서 마스크 입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실링은 기계로 마스크를 밀봉하면서 제조일자를 프린트하는 마지막 공정이다. 시제품으로 출하되는 한 박스에는 3천 개의 마스크가 들어간다. 이 작업이 끝나면 이동식 지게차가 플라스틱 팔레트를 승강기를 통해 창고로 옮긴다. 내가 하루 동안 일했던 파트는 바로 실링이라는 최종 단계였다. 1초에 한두 장씩 밀봉과 프린트 작업이 진행될 정도로 작업 속도는 빨랐다. 그러한 생산라인이 동시에 4개가 가동되었다. 나는 컨베이어 벨트 작업대로 마스크를 올려주는 보조 작업자 역할을 하였다. 메인 작업자와 보조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이 호흡이 삐걱거리면 하루 생산할 수 있는 물량은 큰 차이가 난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의 노동 강도는 멀미가 날 정도로 노동자를 꼼짝 못 하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내가 잠깐 쉬고 쉽다고 쉴 수도 없다. 1월에 수술한 무릎은 탱탱 부어오르기 시작하였다. 허리에서 시작된 통증은 온몸에서 전류가 흐르듯이 타고 내렸다. 그때마다 몸과 마음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젊었고 러시아부터 카자흐스탄까지 국적도 다양하였다. 금발의 아가씨부터 우리와 생김새가 같은 고려인이었다. 이들과의 하루는 그동안 그들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과 그들이 느끼는 한국의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힐 수 있었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제3의 몸짓 발짓의 언어로도 충분히 의사 표현이 되고 소통이 이루어졌다. 언어도, 피부 색깔도, 나이도, 성별도 마스크 공장 안에서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면 달려와서 도와주었고 그 도움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들수록 서로의 마음을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 아름다움은, 규칙과 반복으로 1초에 한두 장씩 찍어내도록 설계된 마스크 기계의 삭막함도, 공장 안의 온갖 백색 소음들도, 언제 누군가에게 전염될지도 모르는 바이러스의 공포도, 1인당 할당된 수 만개의 작업 수량도, 마스크 두 장을 사겠다고 동네 약국마다 수 십 미터나 줄지어 한 시간씩 기다리는 사람들의 초조함도 모두 껴안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자 면사무소 소재지의 뷔페식당으로 향하였다. 12인승의 승합 차에 오른 직원들은 여자들뿐이다. 그러고 보니 남자는 내가 유일하다. 식당까지 한참을 달려야 할 만큼 공장은 외딴곳에 방치된 듯한 곳에 자립 잡고 있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공장으로 돌아왔고 곧바로 오후 일과를 시작하였다. 직장인들의 1시간짜리 점심시간에 포함된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도 이곳에서는 사치였다. 그만큼 세상에는 마스크가 부족하였다. 부족하다고 어느 날 갑자기 생산설비를 확장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마스크 공장에서는 생산 설비가 부족하지 않았다. 정작 부족한 것은 노동자들이나 마스크 필터와 같은 것들이었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동내 약국의 줄이 길어질수록 마스크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는 잔업 시간을 늘려가고 있었다. 조립이 완성된 마스크를 비닐봉지에 넣는 작업을 입수라고 한다. 입수 작업자들은 24시간 개방된 작업 공간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수량만큼 작업을 하였고 보수는 그 개수에 의해 성과급처럼 지급되었다. 부업 형태의 작업은 탄력적인 근무 시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마스크 공장은 치열하였고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노동의 질이나 가치 따위를 따질 여유도 없었다. 저질 체력으로 인해 나는 9시 잔업까지는 소화하지 못하였다. 7시에 간단한 저녁을 먹고 공장 문을 나서는데 사장님은 과일들을 한 바구니나 챙겨주신다. 까만 비닐봉지에 담긴 노란 참외와 단내가 나는 딸기 그리고 제법 과즙이 단단한 방울토마토가 내 손에 전달된다. 혼자 사는 나를 위해 특별히 사놓았던 모양이다. 남자들이 과일을 잘 챙겨 먹지 못한다는 사실까지 배려하고 있었다. 고마운 사장님이다.
다시 인연으로, 인연과 공동체 간의 사랑
사장님과의 인연은 앚 오래전의 봉사 활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인연 이야기로 마스크 공장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낡고 정리된 줄 알았던 인연이었다. 거미줄보다 가늘고 희미해 가던 인연은 다시 굵고 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인연은 어느새 비가 그친 뒤 거미줄에 물방울이 코팅된 것처럼 영롱해져 있었다. 이민으로 오랜 세월 단절되었던 봉사활동을 재개하면서부터 인연은 살아나고 있었다. 이제는 그 작은 인연들도 귀하게 여기며 살고 싶다. 전 국민이, 아니 전 세계인이 바이러스와 대치중이다. 남녀노소와 빈부격차는 물론 인종, 국가, 종교를 막론하고 우리가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를 실감하고 있다. 바이러스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화가 진행되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외롭고 고독하다. 세상에는 나 혼자밖에 없는 것처럼 불안하고 고립감을 느낀다. 혼자가 편하다는 사실은 경험해 보니 전적으로 공감하겠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19 사태를 계기로 이웃 간에, 사회 구성요소 간의 유기체적인 관계를 다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바로 가족이다. 이제라도 상처만 주고받으며 무관심했던 가족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나누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마스크 공장에는 서로 간의 격려와 사랑이 넘쳐났다. 그 삭막하고 황량한 마스크 공장에서 온기가 돌았던 이유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 따스한 온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온기인지 모른다. 행복한 하루가 뻥 뚫린 고속도로 위에 흩뿌려지며 멀어지고 있었다.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서울 선정릉 [모두의 캠퍼스] 강의 신청하기 / 월출산 국립공원 카페 [기억] 강의 신청하기